7시간의 단절… 넉넉하게 그 섬을 품었다
경남 사천·수우도 |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
경남 사천시 삼천포항에서 뱃길로 2시간 남짓. 그곳에 아름다운 섬 ‘수우도(樹牛島)’가 있습니다. 질러가면 40분이면 되는 거리지만, 이른 새벽 출항한 낡은 여객선 일신호는 좀처럼 서두는 기색이 없습니다. 마치 느긋한 유람이라도 나선 듯 수우도 앞 사량도의 상도와 하도 포구를 천천히 들고 나면서 2시간이 걸려서야 맨 마지막에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통영 땅인 수우도에 가닿았습니다. 나무가 많은데다 생김새가 소와 같아서 이름이 붙었다는 수우도는 자그마한 섬입니다. 배를 타고 섬 한바퀴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분 남짓. 섬을 둘러친 산의 능선을 다 타고 넘어봐야 2시간 안쪽이면 충분한 곳입니다. 섬마을은 더 작아서 바위 틈의 따개비처럼 산 능선 틈 사이에 옹색하게 자리잡고 있지요. 주민들은 스물 한 가구에 서른 다섯 명 남짓. 네댓 명을 빼고는 대부분 환갑이 훨씬 넘은 노인네들입니다. 작은 섬 수우도에서의 시간은 육지에서의 시간과는 다릅니다. 여객선이 하루에 두 번 닿으니 첫 배로 섬에 발을 디뎠다면, 막배가 오기 전 7시간 동안은 섬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넉넉하게 주어진 시간만큼 섬에서의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갑니다. 수우도에서는 트레킹이 제격입니다. 은박산의 능선을 따라 암벽으로 둘러친 둘레를 일주하는 것이지요. 주의사항이 있다면 단 하나, 천천히 걸어야 한다는 것. 처음 방파제 끝에서 동백나무와 소사나무 울창한 숲길로 들어섰을 때만 해도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빼어난 경관이 있다”며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수·우·도·란 섬 이름을 써줬던 이의 말을 잠시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숲길을 한 10분쯤 올랐을까요. 앞이 탁 트인 암릉을 딛고 서자마자 탄성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까마득한 직벽의 해안 아래 파란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모습이 가슴이 뛸 만큼 아름다웠으니까요. 발바닥이 간질간질한 수직의 암봉 끝에서 까마득한 바다를 내려다봅니다. 바다쪽으로 둥근 머리를 길게 내민 바위는 마치 거대한 고래와도 같아 보여서 금세라도 분수처럼 힘차게 물을 뿜고 몸을 뒤채면서 깊은 바닷속으로 자맥질할 것 같았습니다. 길은 이런 빼어난 절경을 따라 이어집니다. 걸음을 재게 놀리지 않아도 됩니다. 숨이 차면 이제 막 여린 새 잎을 낸 동백숲 그늘에서 쉬기도 하고, 바위에 누워서 떠가는 구름을 보며 휘파람도 불어보고, 먼바다로 나가는 어선이 바다 위에 그려내는 포말을 오래오래 바라보기도 합니다. 배가 닿지 않는 섬에서의 시간이 어쩌면 이리도 마음을 평안하고 여유롭게 하는지요. 수우도에 가게 된다면 사천의 명소들은 덤입니다. 사천에는 실안해안도로의 낙조나 다솔사로 드는 소나무 숲길처럼 눈을 즐겁게 하는 경관도 빼어나지만, 유독 마음을 끄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사천에는 미륵을 기다리던 민초들의 간절한 기원을 담은 매향비도 있고, 세종과 손자 단종의 태실지가 있습니다. 판소리 ‘수궁가’의 무대인 비토섬도 있고,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이야기가 빚어진 곳도 있습니다. 다 둘러보려면 시간이 모자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수우도에서만큼은 꼼짝없이 여유로워져야 할 겁니다. 아마도 그건 작은 섬 수우도가 숨가쁜 일상에 지친 우리들에게 주는, 풍광보다 더 값진 선물입니다. 사천·통영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
그윽한 茶 맛도 좋지만, 애틋한 사람 香 더 좋네
수우도 가는 길… 놓칠 수 없는 사천 |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
# 수우도에 가면 시간이 느려지는 이유 수우도에 도착했을 때 배에서 내린 승객이라곤 섬 안의 자그마한 발전소에서 일한다는 청년 한 명이 전부였다. 객선을 마중 나온 할머니가 일신호 선장에게서 우편 행낭 하나를 익숙하게 받아 들었다. 우편물을 받는 건 원래 마을 이장의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고작 스물 한 가구가 사는 섬에서는 애초부터 ‘어떤 일이 누구 몫의 일인지’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 그저 손이 비는 사람이 받아 들면 그만인 것이다. 어디 우편 행낭을 받는 일뿐일까. 수우도에서는 마치 물건이나 집도 다 공동 소유처럼 보였다. 예컨대 외지인이 물 한잔을 청하면, 주민들은 가까운 아무 집에나 제 집처럼 서슴없이 들어가서 물을 떠오는 식이다. 다닥다닥 붙어선 수우도의 집들은 대부분 아예 대문이 없었고, 문이 달린 집이라 해도 그 문의 역할은 ‘닫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는’ 데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너나없이 ‘트고’ 사는 것이 수우도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니, 수우도에 당도하거들랑 일찌감치 ‘섬을 찾은 이유’부터 설명하는 게 낫겠다. 그러지 않는다면 나른하고 무료한 좁은 섬 생활에 지친 할머니들의 집요한 시선을 오래도록 받는 것쯤은 각오해야 하리라. 간혹 울긋불긋 등산복을 갖춰 입은 등산객들이 찾아들긴 하지만, 아직도 수우도에 외지인이 내리는 것은 섬 사람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풍경이다. #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되 절경을 가진 섬 사실 섬 산행의 목적지로만 본다면 수우도는 인근 사량도에 비하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기기묘묘한 암봉과 암릉이 즐비해 일찌감치 ‘한국의 100대 명산’에 꼽히는 사량도의 망지리산에 비한다면, 수우도 은박산의 산세는 어림도 없다. 종주코스의 길이만 봐도 고작 1시간40분의 은박산 트레킹 코스는 5시간쯤 걸리는 망지리산의 본격적인 등반 종주코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우도의 트레킹 코스에는 다른 섬들이 갖지 못한 독특한 매력이 있다. 수우도 트레킹의 최고 매력이라면 섬을 둘러친 육중한 해벽(海壁) 위를 걷는 맛이다. 한려수도의 풍광에 취한 채 해벽에 걸터앉아 150m가 넘는 깎아지른 벼랑 저 아래 청색 바다를 내려다보노라면 발바닥이 간질간질하다. 수우도의 북서쪽부터 남동쪽 해안은 온통 해식애가 발달된 암석해안이다. 수우도의 능선을 따라 도는 길은 줄곧 숲과 암석의 경계선에 그어져 있다. 능선의 안쪽은 짙은 동백과 소사나무숲이고, 바깥 바다쪽은 은빛 바위다. 은박산이란 이름도 어쩌면 반짝이는 암석해안이 ‘은박’처럼 보여 붙여진 것이 아닐까. 암석해안은 갖가지 형상을 하고 있다. 바다쪽으로 머리를 길게 빼고 있는 웅장한 바위는 갈데없는 고래 모습이라 ‘고래바위’란 이름이 붙었고, 한쪽 해안에는 바위 벽에 구멍이 숭숭 뚫려 ‘해골바위’라고 불린다. 고래바위 앞의 삼각형 모양 작은 섬은 ‘매바위’다. 모두 다 그럴 듯하지만, 이런 이름들은 근래들어 삼천포항에서 출항한 유람선이 간혹 이쪽에 들르면서 관광 가이드들이 지어붙인 것들이다. # 다솔사에서 그윽한 차 맛과 정갈한 사람의 향을 느끼다 수우도에 가려면 경남 사천에 들러야 하니, 들른 김에 사천의 명소를 빼놓지 말자. 사천에 간다면 첫 번째로 가봐야 할 곳이 바로 다솔사다. 곤명면 용산리의 봉명산 기슭에 자리잡은 다솔사는 절집의 위세보다는 절집이 가진 풍성한 이야기들로 충만한 곳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바로 다솔사 적멸보궁 뒤편의 차밭에 있다. 다솔사는 광복 이후 우리나라의 차문화를 이끈 곳. 그래서 ‘차 좀 마셔봤다’는 사람들이 순례 삼아 들르는 곳이다. 다솔사의 차가 이름이 나게 된 것은 1960년대 초반 다솔사 주지 효당 스님이 절집 뒤편에 제멋대로 자라난 수백년 묵은 야생 차나무를 다듬고, 새로 차나무를 가져다 심으면서부터다. 스님은 이렇게 키워낸 차를 직접 덖어 차를 만들었다. 찻잎을 물에 데친 뒤 9번을 덖어내고는 황토방에서 말려냈으니 이름하여 ‘반야로’란 명차였다. ‘반야(般若)’란 불가에서 지혜를 의미하고 여기에 ‘이슬 로(露)’자를 더하니 차의 이름을 풀자면‘지혜의 이슬’쯤이 되겠다. 효당 스님 생전의 반야로만큼은 못하다지만, 다솔사에서 나오는 차들도 제법 유명하다. 이즈음 차밭에는 차를 따는 아낙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다솔사의 차 중에는 찻잎을 대나무 대롱에 넣어 숙성시켜 만든 죽향차가 이름이 났는데, 차에 대나무 향이 배어나 은은하고 부드러운 맛과 그윽한 향이 좋다. 다솔사의 두 번째 이야기는 절집에 얽힌 인물들이다. 먼저 만해 한용운. 1930년대에 그는 이곳에 은거하며 항일비밀결사 ‘만당’을 조직했다. 만해는 차를 덖던 효당 스님의 스승이다. 다솔사에 기거하던 만해가 머물던 곳은‘안심료(安心療)’란 현판이 붙어있는 건물. 건물 앞에는 3그루의 측백나무가 서 있는데, 만해가 회갑을 맞아 지인들과 함께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두 번째 인물은 소설가 김동리다. 만해의 제자인 효당 스님은 1934년 다솔사 아랫마을에 야학 ‘광명학원’을 세웠고, 문학청년이었던 김동리가 야학교사로 부임했다. 김동리는 이곳 다솔사 요사채에 머물면서 ‘황토기’‘역마’‘바위’ 등의 소설을 썼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나 소재가 됐던 사연들이 절집 주변 마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다솔사에서 만해로부터 ‘분신 공양’에 대해 들었던 김동리는 20년 동안 그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대표작으로 꼽히는 ‘등신불’로 빚어 세상에 내놓았다. # 미륵을 기다리는 하심. 세종과 단종이 태를 묻은 터 사천은 역사 이야기만으로도 풍성하다. 곤양면 흥사리 흥곡마을의 묵곡천변에는 고려말기에 세운 매향비가 있다. 때는 고려말 혼란의 시기. 왜구들은 들끓고, 국운이 쇠퇴하고 관료들의 학정이 판을 치던 당시에 민초들은 미륵을 기다리며 갯벌에 향나무를 묻었다. 석가모니 열반 후 56억7000만년이 지나서야 도솔천을 건너 세상에 온다는 미륵. 그러나 현실세상의 고통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억겁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다. 그래서 갯벌에 묻었던 향나무가 1000년 뒤에 물 위로 떠오르면 미륵이 오고, 그때 미륵 앞에 1000년 묵은 향을 피워올린다는 믿음을 가졌다. 매향비란 바로 그곳에 향나무를 묻고 매향의식을 치렀음을 징표하는 비석이다. 곤명면 은사리에는 세종대왕과 그의 손자인 단종의 태실지가 있다. 태실이란 왕가의 자손들이 태어나면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웠던 곳.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해에 ‘전국에서 가장 좋은 길지’라고 해서 세종의 태를 이곳에 안치했다. 세종의 태실에서 수백m 떨어진 곳에 단종의 태를 봉안했던 태실지도 있다. 세종은 손자 단종이 태어나자 자신의 태실 앞산에 단종의 태실을 만들도록 어명을 내렸다. 이렇듯 애틋한 손자였던 단종이 결국 자신의 아들(세조)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니, 세종은 저 세상에서도 얼마나 손자가 안쓰러웠을까. 세종과 단종의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서삼릉의 태실로 죄다 옮겨졌지만, 태실비와 석물들은 아직 남아있다. 이 밖에도 사천에는 별주부전의 원형인 판소리 수궁가의 무대 비토섬과 토끼섬, 거북섬이 있고, 낙조로 유명한 실안해안도로도 있다. 남일대 해수욕장의 코끼리바위는 사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이고, 믿기진 않지만 2400년 된 소나무를 중국에서 들여와 깎아 만들었다는 백천사의 와불도 신도들을 모으고 있다. 이곳들까지 둘러본다면 사천으로의 여정은 더 보탤 것이 없다. 사천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가는 길… 묵을 곳 & 먹을 것 # 사천·수우도 가는 길 = 사천까지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진주갈림목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순천 방면으로 향하다 사천나들목에서 내리면 된다. 다솔사에 먼저 가려면 곤양나들목으로 나가는 게 더 낫다. 수우도에 가려면 삼천포항으로 가야 한다. 삼천포항에서 수우도 가는 배는 하루 두 번. 오전 6시30분과 오후 2시30분에 있다. 삼천포항에서 수우도까지 바로 가면 40분이면 족하지만, 오전 6시30분에 출발하는 배는 사량도의 금평, 돈지 등을 거쳐서 배를 바꿔타고 가므로 2시간 남짓 걸린다. 오후 2시30분 배는 수우도에 먼저 들렀다가 사량도를 거쳐가니, 40분이면 도착한다. 수우도 주민들이 민박을 치고 있지만, 굳이 섬에서 숙박을 하기보다는 오전 배를 타고 들어갔다가 오후 3시30분 배를 타고 나오는 게 더 낫다. 일신해운 055-832-5033, 011-571-5033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삼천포해상관광호텔(055-832-3004)은 실안해안도로변의 삼천포대교 아래에 있어 사천 팔경 중의 하나라는 ‘실안낙조’를 바라볼 수 있다. 삼천포항 인근 노산공원쪽의 팔포매립지에는 새로 들어선 모텔들이 바다를 끼고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1박 3만5000~4만원선. 팔포에는 해안을 끼고 있는 횟집들도 즐비하다. 곁들이 음식들을 내놓는 본격적인 횟집들인데, 저렴하게 회를 양껏 먹고 싶다면 이곳보다는 사천파출소 부근부터 삼천포어시장까지 이르는 길에 늘어선 횟집거리에 가는 편이 낫다. 식당 앞 좌판에서 횟감을 골라, 건너편 식당에서 양념값을 내고 먹는 방식이다. 요즘 가장 맛이 좋은 것은 도다리. 1㎏에 3만원선. 사천은 냉면으로도 유명하다. 사천읍 수석리의 ‘재건냉면’(055-852-2132)이 그 중 알려진 곳. 전통적인 평양냉면의 메밀면이 아니라 전분 함량이 높은 쫄깃한 면을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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