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古都’의 신록엔 ‘조선’이 숨쉬고 있었다
조선의 자취를 찾아… 색다른 경주 여행 |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
옥산서원으로 드는 길은 수백년이 넘은 회화나무와 굴참나무, 향나무들이 숲을 이뤄 그야말로 울울창창합니다. 서원 앞을 흘러내리는 물에는 자줏빛(紫) 시내(溪)라 해서 ‘자계천’이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천변에는 지금 이팝나무꽃이 소담스레 피어 온통 흰 눈이 내린 것 같습니다.
자계천 물줄기가 바위 사이로 자그마한 폭포를 이뤄 흘러내리는데, 그 개울을 건너는 외나무다리에 걸터앉았습니다. 청아한 물소리와 신록의 가지를 흔들고 지나는 바람소리에서 봄의 향기가 묻어납니다. 아, 참으로 평화로운 봄날입니다. 이곳은 경주입니다. 벚꽃이 다 지고 난 이즈음의 경주는 한가롭기 그지없습니다. 사실 경주는 벚꽃이 만개해 인파로 북적일 때보다는 아무래도 이렇듯 호젓한 시간이 더 어울리지 싶습니다. 그런 호젓함을 즐기려면 알려진 유물과 유적지들이 즐비한 경주의 한복판에서 조금 뒤로 물러서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경주가 신라의 고도(古都)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경주에 신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월의 깊이와 왕도의 화려함에 뒷전으로 밀리고 말아 아는 이들이 적긴 하지만, 경주에는 조선시대 유림의 흔적들도 곳곳에 있습니다. 경주에는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양반마을의 전형으로 꼽히는 양동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조선 중종 때 문신 회재 이언적이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했던 세심마을이 있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것 같은 양동마을의 정취도 좋지만, 그보다 이언적이 마흔 한 살의 나이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했던 독락당과 그를 배향한 옥산서원은 그 주인이나 시간의 무게를 빼고도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자계천을 끼고 세워진 독락당은 온통 독(獨)과 락(樂)의 공간입니다. 집을 낮추고 겹겹이 낮은 담을 쌓아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높은 담을 쌓아 자신을 가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몸을 숙여 낮췄던 셈이지요. 독락당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라면 바로 자계천변의 너럭바위에 한쪽 기둥을 딛고 선 운치 있는 정자인 계정(溪亭)입니다. 독락당에 은거했던 이언적은 계정에서만큼은 숨을 열고 자연을 고스란히 정자안으로 들여놓았습니다. 짙은 숲에 물이 어우러진 계정의 정취는 탄성을 자아냅니다. 독락당을 굽이돈 자계천이 흘러내리는 쪽에는 옥산서원이 있습니다. 서원으로 향하는 길에는 한데 어우러진 거목들이 시간의 깊이를 그려 보입니다. 찾아드는 이 없는 서원은 물소리와 이따금 흔들고 가는 바람소리뿐 고즈넉합니다. 서원의 낡은 현판을 하나씩 읽어봅니다. 한석봉의 글씨는 흔하고, 추사 김정희와 퇴계 이황 솜씨까지 보입니다. 경주시내에서는 시대와 불화했던 천재 매월당 김시습의 흔적을 찾아 남산에 올랐습니다. 금오산과 고위산을 거느리고 있는 남산은 골짜기마다 150곳이 넘는 절집과 석불, 석탑이 들어서 신라시대 장엄한 불국토를 이뤘던 곳이지만, 남산에 꼭 ‘신라의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산 용장골에는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에 책을 다 불태우고 평생을 유랑했던 김시습이 금오산실을 짓고 7년간 머물며 ‘금오신화’를 썼다는 용장사터가 있습니다. 그 절터의 뒤 깎아지른 벼랑에서 삼층석탑과 마주쳤습니다. 불과 4.5m의 높이에다 옥개석도 군데군데 깨져 나가긴 했지만, 바위 위에 우뚝 서서 저 아래 사바세계를 내려다보는 석탑은 병풍처럼 둘러쳐진 건너편 산의 능선들과 어우러져 웅장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경주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 munhwa.com 남산 석탑엔 600년 전 김시습의 한숨 들리는 듯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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