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둣빛 꽃길 사이로 ‘내 인생’을 돌아보다
대청호 주변 오지마을 가는 길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충북 옥천군 군북면 막지리는 한때 120여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지만, 대청댐 건설로 마을과 전답이 물에 잠기면서 주민들이 이주해 고작 21가구만 남아 있는 오지가 됐다. 오랜 가뭄으로 드러난 막지리의 호반에는 개여뀌가 자라나 흐드러진 꽃밭을 이뤘다. 이 길 끝에는 물 건너로 가는 배가 묶여 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흙길 위에 타닥거렸습니다.

길가의 흰 찔레꽃이며 보라색 오동나무 꽃들도

함빡 젖었습니다. 인적 없는 좁은 흙길을

구불구불 넘어 대청호의 그림 같은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섰습니다. 잠깐 비가 그친 사이로

산봉우리에는 구름이 걸렸고, 짙은 녹음의 골짜기마다

안개가 피어올랐습니다. 어디선가 뻐꾹새 한마리가

촉촉한 울음소리를 보탭니다.

대청호반의 오지마을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청평호충주호처럼 이름난 호수들은

잘 닦인 드라이브코스가 곳곳에 있고,

풍광 좋은 곳이라면 대개 으리으리한 별장들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대청호 주변은 다릅니다.

호반을 따라가는 번듯한 국도 구간도 있지만,

해발 300~400m를 오르내리는 봉우리를 타고 넘으며

호젓한 오지의 산골마을로 이어지는

정감 있는 흙길들도 여태껏 남아있습니다.

대청호의 오지마을을 찾는 여정은

인적이 없는 조용한 숲길을 가는 맛뿐만 아니라

빼어난 절경을 만나는 기회도 선사합니다.

깊으면서도 또한 아름다운 길을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이런 오지로의 여정은 유쾌하고 떠들썩한 행락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번잡한 일상에 치여

삶의 여유를 찾고 싶을 때, 혹은 사방이 막혀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그저 바람처럼

다녀와볼만한 곳이지요. 그 길 위에 서면 호젓한 숲길과

맑은 물빛 그리고 무엇보다 오지마을의 고요함이

도회지에서 지친 심신을 위로해주리라 믿습니다.

몇 곳의 군청과 면사무소를 들르고,

5만분의 1 지도를 짚고, 인근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찾아낸 대청호 부근의 깊은 오지마을은 3곳입니다.

대청호 인근에는 댐이 생기면서 오지가 된 마을들이

허다하지만, 그중에서도 첩첩산중의 연봉으로

둘러싸인 충북 보은군 회남면 은운리,

그리고 대청호에 마을을 묻고 뒤로 물러앉으면서

뒤로는 첩첩산중이 앞으로는 물이 길을 막아버린

충북 옥천군 군북면 용호리,

또 막지리를 찾아가봤습니다. 이곳들은 모두

이 땅에서 몇 안되는 오지 중의 오지입니다.

아니 오지라기보다는 ‘사라져가는 마을’이라는 쪽이

더 가까울 것 같기도 합니다.

외딴 곳에 깊이 숨어 있는 이들 오지마을을

한번에 다 돌아볼 수 있는 드라이브코스를 그려봤습니다.

적요한 숲길과 청정한 자연 그리고 낡은 집들과

때묻지 않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여정으로 안내합니다.

대전·청원·보은·옥천 = 글·사진 박경일기자parking@munhwa.com
 
 
물에 막히고 산에 덮이고, 구름도 울고 넘는 오지로…
대청호 주변 구비구비 산골마을 가는 길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충북 보은군 회남면 분저리에서 비포장 산길을 넘어 오지마을 은운리 쪽으로 향하다 만난 대청호 풍경. 고요한 숲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호수 풍경은 마치 그림 속 세상과 같다. 비가 막 그친 뒤라 물 건너 멀리 보이는 산자락이 구름에 덮여 있다.
# 손대지 않은 자연 ‘대청호’

대전과 충북에 걸쳐 있는 대청호는 금강을 막아 이루어진 호수다. 여느 호수 못지않은 빼어난 풍광과 멋진 드라이브 코스를 갖고 있음에도 대청호는 충주호나 팔당호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대청호의 담수가 이뤄지자마자 청원군 문의면 신대리 호반에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가 들어선 탓이 아닐까. 청남대가 들어선 이후 대청호 인근은 삼엄한 통제 속에서 까다로운 규제들이 만들어졌다. 하다못해 청남대가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조차 사진 찍는 것을 금지했을 정도니….

그러다 지난 2003년 4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남대를 충북도에 반환했고, 청남대는 곧 일반에 공개됐다. 대청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때묻지 않은 풍광을 끼고 있다. 대청호란 이름은 대전시와 충북 청원군의 첫자를 따서 만들어진 것. 그러나 대청호는 충북 보은군과 옥천군에도 걸쳐 있다. 대전과 청원 쪽의 호안은 부드러운 능선으로 이뤄져 있지만, 물 건너편 보은과 옥천 쪽은 국사봉의 가파른 능선들이 첩첩이 이어져 있다.

알려지기로는 대청호 드라이브 코스는 문의마을과 대청댐이 있는 대전과 청원 쪽이 유일하지만, 사실 보은과 옥천 쪽의 풍광이 몇배 더 아름답다. 대신 여태껏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아 길은 험하고 마을은 깊다. 산속 깊은 마을로 이어진 도로는 아직도 포장되지 않았고, 대청호 담수로 인한 수몰로 뒤로 물러앉은 마을 중에는 섬 아닌 섬이 돼서 배를 타고 뭍으로 나다니는 곳들이 남아 있다. 이렇게 보은과 옥천 땅의 숨겨져 있는 풍경을 따라 오지마을을 찾아가본다.

# 출발:오지 아닌 곳이 없는 ‘회남면’

대청호의 오지마을을 찾아가는 여정의 출발점은 충북 보은군 회남면 소재지에서 시작한다. 회남면 소재지까지는 청원~상주간 고속도로 회인나들목으로 나오는 것이 가장 빠르지만,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판암나들목으로 나와서 571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는 편이 더 낫다.

두 길 모두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길이고, 회인나들목에서 이어진 길이 대청호의 물줄기에 바짝 붙어서 가긴 하지만, 판암에서 나오는 길이 농촌 마을의 평화로움을 더 만끽할 수 있다. 더구나 판암 쪽으로 길을 잡았다면 대청호반에서 가장 낭만적인 카페 겸 레스토랑인 ‘꽃님이’(042-274-7328)에 들를 수 있다. 저물녘 은은한 라이브 음악 속에서 14번 혹은 15번 야외테이블에 앉아 대청호를 바라보는 맛은 각별하다.

회남면은 1980년 대청댐이 만들어지고 마을 일부가 수몰되면서 급속도로 쇠락했다. 담수가 시작되면서 6개리(里)는 흔적도 없이 물 속으로 잠겼고, 용케 수몰을 면한 마을들도 저지대의 전답들을 다 잃었다. 면소재지도 수몰되는 바람에 거교리의 산자락을 깎아 옹색하게 들어섰다. 수몰민들은 집이나 농토를 물 속에 남긴 채 객지로 흩어졌다. 한때 6000명을 헤아렸던 회남면민의 숫자는 지금 760명에 불과하다. 회남면이 16개리를 갖고 있으니 이 단위의 평균인구는 47.5명인 셈이다. 인구만으로 보자면 오지 아닌 곳이 없는 셈이다. 식당과 구멍가게 두어개가 들어선 면소재지는 너무도 작아서 코앞에 두고서 몇번을 지나쳤을 정도다.

# 경유1:구름도 숨는 ‘은운리 가는 길’

회남면 소재지에서 거신교를 건너자마자 분저실·은운리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하면 502번 지방도로를 타게 된다. 이 길을 따라가면 곧 자그마한 농촌마을 분저리에 이른다. 체험마을로 꾸며진 분저리는 고려말 최영 장군이 군량을 모아 가루로 만들어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곳이라 해서 ‘분저실’이라고 불린다. 분저리는 지난 2003년 농촌체험마을로 조성돼 마을에서 운영하는 번듯한 펜션이 들어섰다.

분저리를 지나면 길이 좁아지면서 곧 비포장도로가 된다. 이 길이 바로 은운리로 가는 길이다. 덜컹거리는 비포장 숲길을 달리다보면 가르쳐주지 않아도 은운리의 한자이름이 ‘구름도 숨는다’는 ‘은운(隱雲)’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은운리로 가는 외길인 이 도로에서는 차량을 마주치는 법이 거의 없다. 눈이 내리거나 폭우가 쏟아지면 사정이 달라지긴 하지만, 비포장도로임에도 길이 잘 다져져서 승용차로도 그리 무리하지 않고 통과할 수 있다.

고도를 높이면서 산허리를 타고 넘는 깊은 숲길은 참으로 고요하다. 길가로 찔레꽃이 환하게 피어 있는 유연하게 휘어진 흙길은 그것만으로도 마음을 빼앗기기에 충분하다. 사실 이 길은 차로 달리는 것보다 트레킹이 더 어울린다. 오지마을을 향해 인적 없는 산길을 타박타박 걷는 맛을 어디에다 비할까. 이 구간의 백미는 오른편으로 시야가 탁 터지면서 대청호와 그 물 건너의 서탄리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풍경이다. 물 건너편의 산자락은 아예 길이나 인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전인미답의 지역이다.

# 경유2:깊은 골의 아름다움 ‘은운리’

은운리는 을미기, 가산, 지경 등 3개의 마을로 이뤄져 있다. 산자락을 내려와 가장 먼저 만나는 마을인 을미기는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오지로 꼽힌다. 크고 작은 연봉들로 사방을 둘러친 곳에 푹 파묻혀 있다. 어찌 이런 깊은 산에까지 사람들이 들어와 터를 닦았을까. 마을에 대한 기록은 없고, 그저 주민들로부터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만 남아있다. 이곳에 사람이 들어와 산 것은 임진왜란 무렵. 청주에 사는 차씨와 김씨가 꿩사냥을 나왔다가 꿩이 떨어진 자리에서 우물자리를 발견하곤 이곳에 거처를 잡았단다. 을미기에는 그때의 우물이 아직 남아서 향나무 아래에서 차가운 단물이 솟고 있다.

을미기는 ‘언목’이란 이름이 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마을 주민은 언목이 아니라 ‘언묵(言默)’이라고 고쳐줬다. 주민들의 말대로라면 이리 깊은 산골에서 말(言)을 닫고 침묵(默)한다면 얼마나 적적할까 싶기도 하다.

이제는 예닐곱채의 집들만 남아 있고, 그마저도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은 두세집에 불과하지만 은운리는 한때 제법 위세가 있는 부자마을이었다. 화전을 일구었던 사람들이 마을에 과실나무를 심어 가을이면 과일들을 거둬들였다고 했다.

을미기를 지나 내려서면 우람한 당산나무 한그루가 서있는 곳에서 맑은 물길 가산천을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걸어서 들면 가산천 하류의 물길이 대청호와 합쳐지는 곳이고, 왼쪽으로 접어들면 물길의 상류로 이어지게 된다. 길을 가자면 왼편으로 가야 하지만, 이쯤에서 차를 세워두고 오른편 천변으로 들어서보자. 첩첩이 둘러싼 산자락에는 은사시나무가 이파리를 반짝거리며 서있고, 물가에는 우람한 버드나무들이 서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 경유3:산과 물에 막힌 ‘막지리·용호리’

을미기를 지나 비포장도로를 다 내려서면 곧 지경마을이다. 지경마을도 예닐곱가구가 고작인 작은 마을이지만, 포장도로가 나있는 데다 옥천과 보은으로 가는 버스까지 다닌다. 지경마을은 작은 도랑 하나를 놓고 이쪽 저쪽의 행정구역이 다르다. 한쪽은 보은군 회남면 은운리이고, 개울 건너는 옥천군 안내면 답양리다.

도랑을 경계로 행정구역이 나눠지니 한 마을임에도 보은과 옥천에서 두 명의 우체부가 오고 순회 보건진료도 두 곳에서 온다. 지경마을을 지나 가산식당 못 미쳐서 오른쪽으로 난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 시멘트 포장길로 한참을 들어서면 곧 막지리와 용호리가 갈라지는 삼거리를 만난다. 왼쪽으로 들면 막지리이고, 오른쪽 길로 가면 용호리다. 두 마을 모두 수몰되면서 뒤로는 첩첩산이, 앞으로는 물이 막아서면서 오지가 돼버린 곳이다.

막지리는 대청호 수몰 마을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곳. 조선시대 문신인 우암 송시열이 이곳을 지나다가 보리가 많다고 해서 맥계(麥溪)라고 부르던 것이 음운변화로 ‘맥기’라고 불려오다가 마을이름을 한자화하면서 ‘막지(莫只)’가 됐다. 한때 120여 가구가 살았지만 마을과 농토가 수몰되면서 지금은 다 떠나고 21가구만 남았다. 지금은 비좁은 시멘트일망정 길이 났지만, 아직도 마을 주민 대부분은 배를 타고 강 건너 옥천 쪽으로 나간다. 대청호는 오랜 가뭄으로 물이 줄어들었지만, 막지리쪽에는 물이 빠진 자리에 진초록 풀들이 자라나 메꽃을 비롯한 들꽃들이 마치 심어 기른 것처럼 만발해 독특한 풍광을 만들어내고 있다.

막지리도 오지로 꼽히는 곳이지만, 삼거리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비포장길과 시멘트포장도로를 번갈아가며 4㎞를 더 가야 마주치는 마을 용호리에 대면 대처나 다름없다. 용호리는 파주 염씨 집성촌으로 염씨 일가가 17대에 걸쳐 살아온 유서 있는 마을. 1946년 6월의 대홍수로 마을이 몽땅 떠내려간 뒤에도 주민들이 맨손으로 다시 마을을 일궈냈으나 대청호가 만들어지면서 그만 마을이 다 잠기고 말았다. 주민들이 죄다 마을을 떠났고, 지금 남은 가구는 7가구가 고작. 주민들은 벌을 치고, 자그마한 텃밭을 일구며 살고 있다.

마을의 수몰로 섬 아닌 섬이 돼버린 용호리 주민들은 구절양장의 비포장도로 대신 배를 타고 옥천까지 나가는데, 5t짜리 마을 배를 모는 박수성(80)씨는 “지난 1994년 가두리양식장을 관리하기 위해 마을로 들어왔다가 마을의 풍광에 반해 눌러앉았다”며 “대한민국 땅에서 이리 경치 좋고 깊은 오지는 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청원·보은·옥천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청원갈림목에서 청원~상주간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회인나들목으로 나와서 571번 지방도로를 따라 회남면소재지 쪽으로 내려가다 거신교 못 미쳐서 좌회전해 502번 지방도로를 탄다. 이 길이 바로 오지 드라이브의 들머리인 분저리로 향하는 길이다.

분저리를 지나면 은운리로 가는 비포장도로가 시작된다. 은운리의 마을을 지나 지경마을로 내려서면 포장도로가 나온다. 여기서 502번 도로를 계속 타고 1㎞쯤 가다가 작은 다리가 있는 농로로 우회전하면 막지리와 용호리로 가는 삼거리를 만난다. 삼거리에 이정표가 잘돼 있어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묵을 곳 & 먹을 것

오지마을인 은운리나 막지리, 용호리에는 숙소는 말할 것도 없고 식당도 없다. 분저리 마을주민들이 운영하는 녹색체험마을(070-7723-8592)의 펜션에서 숙박하는 것을 추천할 만하다. 다만 인원수에 관계없이 큰 방 하나에 10만원을 받으니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면 비용을 아낄 수 있다.

펜션에서는 미리 부탁하면 두부만들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오지마을 드라이브 구간에는 맛집은커녕 식당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단 대전 쪽 판암나들목에서 출발하는 경우 대청호반의 레스토랑 ‘꽃님이’(042-274-7328)에 들러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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