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그리고 희망, 바다의 가슴에 번지다

진도 조도 등대기행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하조도 돈대산의 손가락바위는 켜켜이 쌓인 층암으로 이뤄져 있다. 손가락바위 검지 중간쯤에는 바위동굴이 있는데 그 안으로 들면 동굴 끝이 바다를 향해 터져 있다. 동굴에 오른 마을 주민이 하늘이 열려 햇살이 쏟아지는 관매도 쪽을 바라보고 있다.

상조도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조도군도. 다도해의 풍광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손가락바위 동굴끝에 서면 바위가 액자가 되고 바다와 멀리 관매도가 액자안으로 들어와 그림이 된다.
섬이 어찌나 많던지 바다 위에 새처럼 내려앉았다 해서 ‘새 조(鳥)’자에 ‘섬 도(島)’자를 쓰는 곳. 어둠이 내리고 있는 조도의 겨울 바다에 섰습니다. 겨울바다의 어둠은 푸른색입니다. 오후 5시42분. 하조도의 등대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습니다. 마침 겨울 바다 위로 분분히 날리는 눈발 사이로 등대가 밝힌 불빛이 먼바다까지 힘차게 뻗어갑니다.

등대가 선 깎아지른 벼랑 아래는 목포에서 제주로 향하는 뱃길이 있습니다. 들물과 날물이 만나면서 해류가 뒤틀려 성나게 일렁이는 물길 ‘장죽수도’입니다. 등대는 그 거친 물길의 어둠을 환하게 밝히고, 때로 해무가 바다를 뒤덮을 때면 무적(霧笛)을 불어대며 뱃길을 안내합니다. 스스로를 밝혀 길을 내는 등대의 불빛이 참 따스합니다.

하조도의 등대에 처음 불이 밝혀진 것이 1909년이라니 올해로 꼭 100년하고도 1년입니다. 100년의 세월을 다 지켜내고 또다시 새로 첫해를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처음 불을 밝혔던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듯 등대는 하루도 쉬지 않고 밤바다의 어둠을 환하게 밝히며 서 있습니다.

진도에서 페리호를 타고 30분. 조도는 참 멀리 있습니다. 조도까지 가는 길은 지도를 짚는 것만으로도 숨이 다 가쁠 지경입니다. 조도에 가 닿으려면 먼저 진도에 가야 합니다. 진도에 가려면 해남을 거쳐야 하고, 해남을 가려면 목포를 거쳐야 하고, 목포에 가려면…. 그렇게 머나먼 섬 조도까지 가서 등대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아직 새해 첫 마음일 때 스스로를 밝히며 등대를 바라보며 그 첫 마음을 헤아려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애초에 해안 숲길을 걸어 등대를 찾아갔을 때만 해도, 등대를 ‘스스로 가진 꿈과 소망을 밝히는 상징’쯤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겨울 밤바다를 지키는 등대 앞에 서고 보니, 내가 가진 소망을 밝히기보다는 ‘내가 누군가를 위해 등대처럼 설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돌이켜보자니 스스로 나 자신을 위한 소망만 차고 넘쳤다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지요.

조도란 다리로 이어진 상조도와 하조도를 묶어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고, 진도 앞바다의 154개의 섬들이 죄다 속해있는 면 소재지 이름이기도 합니다. 조도 주변의 섬들은 모두 군도(群島)로 이뤄져 있습니다. 가사군도, 성남군도, 독거군도, 거차군도, 맹골군도, 상도군도…. 이 군도들을 다시 모두 묶어서 조도군도라고 부릅니다. 군도를 이룬 가사도와 독거도, 거차도, 맹골도 등의 섬들이 지원선을 거느린 구축함처럼 떠있다면, 이 구축함을 이끌며 항공모함처럼 떠있는 섬이 바로 조도인 셈입니다.

조도의 풍광은 독창적이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상조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점점이 떠있는 섬들의 모습도 그렇고, 하조도 돈대봉의 층암절벽인 손가락바위에 올라 바위동굴에서 내다보는 액자 속에 가둬놓은 다도해의 풍경도 그랬습니다. 바다와 산이 빚어놓은 이런 기경(奇景) 중의 기경은 다른 곳에서는 비슷한 것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목포를 지나고, 해남을 지나고, 진도를 지나서 조도까지 가야 할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큰 보상도 공치사도 없는 일이지만 ‘남에게 소용있는 일’ 믿음으로 지켜”
하조도 등대지기 23년 박만근씨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겨울의 밤바다를 지키고 있는 하조도의 등대는 마치 푸른 색조의 그림엽서와도 같았다. 누구에게는 그 풍경이 그림엽서처럼 낭만적이지만, 등대를 지키고 선 이들에게는 삶의 일상이다. 하조도 등대의 박만근(50·사진) 등대장. 등대란 명칭이 ‘항로표지관리소’란 멋대가리없는 행정명칭으로 바뀐 지 오래니 등대장이란 직함도 ‘항로표지관리소장’이 돼야 하겠지만, 박 대장은 굳이 스스로를 ‘등대장’이라고 했다.

박 대장이 등대를 지켜온 지도 올해로 23년째. 전남 무안이 고향인 그는 목포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등대원 생활을 꿈꿨다. 오며 가며 마주치는 목포구등대를 보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저 집은 어떤 집이오?” “등대 사람들이 산단다.” 그 뒤로 그는 높은 등대 위에 살면서 불을 밝히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러나 꿈은 곧 잊혔고, 그는 고교졸업 후 소방대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소방대원 생활도 괜찮았지만, 대학진학을 하겠다는 생각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공부는 마음처럼 쉽지 않았고, 1년 만에 다시 목포로 내려왔다.

“마침 등대지기를 모집하는 공고가 났는데 옛날 꿈이 다시 살아났어요. 등대지기가 되고 싶었지만 정작 등대생활은 아무것도 몰랐지요.”

그렇게 덜커덕 합격해서 1987년 처음 부임한 곳이 고도(孤島) 맹골죽도였다. 결혼해서 아내와 아들까지 두고 있던 그는 아내에게는 등대지기로 취직됐다는 사실을 숨긴 채 목포에서 배를 탔다. 영진호를 타고 서거차도에 내려 하루를 묵고 이튿날 새마을호를 타고 가는, 꼬박 이틀이 걸리는 뱃길이었다. 둘째 아이를 임신한 아내는 연방 뱃멀미를 하면서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냐’고 보챘지만, 맹골죽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는 등대지기가 됐다는 사실을 숨겼다.

“아내가 ‘가지 말자’고 막아설까봐 겁이 나서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일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끝까지 숨겼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등대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한때 등대지기가 ‘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임신 중인 아내가 한밤중에 몸이 아파 목선을 빌려 타고 거차도까지 나가는데, 이러다 아내를 죽이는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그때만 해도 뱃사람들은 여자를 태우지 않는 것을 불문율처럼 여기고 있었는데, 아내를 태워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눈물부터 나더라고 했다.

기름을 실어 올리고, 발전기를 돌리고, 축전지에 전기를 넣고, 에어탱크를 점검하고…. 고된 등대지기생활이었지만, 맹골죽도에서 3년을 채웠고, 이후 홍도 등대로 옮겼다. 홍도로 옮기니 우선 사람구경을 할 수 있어 살 만했다. 그래도 등대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해남의 어룡도 등대로 옮긴 뒤부터 비로소 등대지기를 천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룡도는 15가구가 사는 작은 섬이었지만, 학교도 있고 파출소도 있었다. 마을 주민들과의 유대는 끈끈했다. 등댓불을 밝히고 있으면 어선들이 배를 대고 그날 잡은 고기를 건네주기도 했고, 저녁에는 학교 교사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그가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등대를 지켜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그는 “‘남에게 소용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보상이 없더라도, 공치사가 없더라도, 이런 믿음만 갖고 있으면 스스로의 삶 앞에서 당당해지는 법”이라고 했다. 등대지기건 어부이건, 혹은 평범한 회사원이건, 삶의 모습이야 다르겠지만 그 본질은 같으리라. 밤바다를 밝히는 하조도의 등대에서, 그 등대를 지키는 등대장에게서 배울 것 하나. 그것은 ‘남에게 소용되는 일’의 소중함과 ‘스스로의 삶 앞에서 당당해지는 법’이다.

바다위엔 흩뿌려진 섬들이… 등대위엔 아름다운 마음이 반짝
진도 조도 등대기행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해가 저물고 푸른 어둠이 내릴 무렵에 하조도 등대가 불을 밝혔다. 마침 눈발이 분분히 날리는 밤바다를 등대는 10초에 1섬광으로 환하게 밝혔다.

사진 위부터 조도의 특산물인 겨울 무. 단단하면서 달다. 모라개해수욕장 끝 갯바위에 붙은 자연산굴. 작은 돌로 두드려 깨서 그 자리에서 맛볼 수 있다. 율목마을의 밭에서 쑥을 캐는 주민. 육지는 한겨울이지만, 조도에는 지금 쑥이 지천이다. 읍구마을 개펄에서 굴과 조개를 캐는 주민. 고기잡이는 쇠락했지만, 조도의 개펄은 아직 찰지다.
경관의 우열을 가리는 일은 그다지 효용성이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다도해의 풍경에 순번을 매겨본다면 그 맨 앞줄에 조도를 놓아야 옳다. 아니, 꼭 다도해에 한정할 것도 없다. 우리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꼽으라고 한다 해도, 조도에서 내려다보는 다도해의 모습을 단연 앞줄에 올려야 하겠다. 조도에 가보지 않은 이들은 ‘웬 호들갑이냐’고 나무랄지 모르겠지만, 한 번이라도 조도의 상조도 전망대에 올라 본 이들이라면 이런 단언을 대번에 수긍하리라.

상조도 도리산을 아슬아슬 올라가는 포장도로를 따라 산길을 오를 때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쪽빛 바다는 더 맑아지고, 그 바다 위에 저마다 다른 모양의 섬들이 주르륵 펼쳐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보석처럼 흩뿌려진 다도해 섬들의 광대함은 아예 시야의 범위를 넘어선다. 상조도의 전망은 무딘 글솜씨로는 잘 그려지지 않거니와, 사진으로도 좀처럼 담아낼 수 없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풍광이 360도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앞도, 뒤도, 옆도 모두 바다고 섬이다. 도무지 어디를 기준점으로 삼아 풍경을 살펴야 할지 당혹스럽다. 동영상 카메라를 삼각대에 세워놓고, 팬닝으로 360도 돌린다 해도, 머리 위 푸른 하늘의 색감까지 다 담아낼 수 없을 터이니, 그마저도 조도군도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낼 수 없을 터다. 상조도 전망대에서 내다보는 아름다움은, 그래서 직접 가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200여 년 전에 상조도 도리산에서 내려다본 다도해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국함대의 바실 홀 선장이다. 1816년 청나라 위하이(威海)에 갔다가 돌아가던 홀 선장은 함대를 이끌고 진도 조도해역에 정박했다. 그때 홀 선장은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쓴 ‘한국 서해안과 유구도 탐색항해 전말서’란 보고서에서 도리산에 올라 조도군도의 섬을 135개까지 세고서는 ‘세상의 극치’라고 외쳤다고 했다.

함대를 이끌며 전세계를 누볐던 낯선 이방인에게도 조도군도의 아름다움은 가슴 떨릴 정도로 극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별명은 아니지만, 조도 군도의 절경을 ‘한국의 하롱베이’라 부르는 것도 조도의 아름다움이 이른바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리라. 그만큼 조도의 풍광은 독창적이고, 또 세계적이다.

상조도에 도리산 전망대가 있다면 하조도에는 푸근한 바다와 근육질의 산이 만나 이뤄낸 풍경이 있다. 하조도의 조도면사무소 뒷산인 돈대봉(230.8m)이 바로 그곳이다. 해발고도로 보자면 육지의 이름난 산에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지만, 암봉과 층암절벽이 빚어내는 풍광은 가히 절경이라 부를 만하다. 굳이 등산이라 이름붙일 것도 없다. 진도에서 온 페리가 닿는 어유포항에서 차로 10분쯤 거리의 산행마을에 차를 세우고 1㎞쯤만 산길을 오르면 돈대봉 최고의 경치라 일컬어지는 손가락바위를 만나게 된다. 경사도 급하지 않고 길도 거칠지 않다.

손가락바위라니 손가락 한 개처럼 솟은 바위를 연상하겠지만, 솟아있는 층암은 다섯 개의 손가락 형상이 뚜렷하니 ‘손바위’나 ‘장갑바위’란 이름이 더 적합지않을까 싶다. 구들장을 만드는 점판암처럼 떡시루를 쌓은 듯 솟아있는 바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장엄하다. 바위 중간쯤에는 사람 두엇이 드나들 만한 동굴이 나있는데, 나무로 엮어 만든 사다리를 타고 들 수 있다. 동굴은 점점 좁아지다가 반대편 끝이 바다를 향해 활짝 열린다. 동굴 사이로 내다보는 바다 풍경은 황홀하다. 동굴이 그대로 액자가 되고, 그 액자가 붙잡고 있는 그림 속에는 관매도가 떠있는 바다가 펼쳐진다. 동굴 안에 앉아서 관매도와 바다를 내다보는 짜릿한 기분이라니….

내친김에 손가락바위를 지나 돈대봉의 주능선에 올라도 좋겠다. 짙은 상록활엽수림 위로 솟은 상어이빨 같은 날카로운 암릉을 디디면 사방팔방으로 바다와 섬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거칠 것 없는 파노라마의 경치다. 점점이 섬이 떠있는 바다는 맑고 호수처럼 잔잔하다. 그 잔잔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어선들이 지나는 모습이 아름답다. 이렇게 주능선을 다 타고 넘는다 해도 4㎞ 남짓. 천천히 올라도 3시간 안쪽이면 넉넉하다.

하조도의 동쪽 끝 벼랑을 끼고 있는 곶부리에는 순백의 등대가 서 있다. 하조도 항로표지관리소라는 행정명칭으로 불리는 하조도 등대다. 조도가 인근 군도의 모함 격이라면, 하조도 등대는 그 모함의 선수를 밝히는 등불이다. 하조도 등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등대 아래 해안에는 나무데크도 만들어놓았고, 등대 뒤편의 암벽에는 나무데크 계단 끝에 정자도 세워놓았다. 하조도 등대의 정취를 만끽하려면 낙조 무렵이 가장 좋겠다. 서쪽 하늘의 붉은 노을이 한껏 달궈졌다가 꺼지고, 푸르게 어둠이 내릴 무렵 불 밝힌 등대의 모습은 한 장의 그림엽서와도 같다. 하조대 등대는 10초에 1섬광을 뿜어낸다. 인근의 가사도 등대는 15초에 1섬광. 섬광의 간격만 보고도 배들은 그곳이 어느 등대인 줄 안다. 자동차들이 너나없이 내비게이션을 달듯 지금은 화물선이나 여객선은 물론이고 웬만한 규모의 어선에는 자동항법장치가 설치돼 있다. 그래도 모니터속의 좌표기호가 어찌 등대의 불빛이 주는 위안을 대신해줄 수 있을까.

하조도 등대가 밝히는 물길에는 ‘장죽수도’란 이름이 붙여져 있다. 장죽수도는 목포와 제주, 인천을 잇는 삼거리. 부산과 인천에서 출항한 화물선이 제주를 오가는 길목이다. 지금은 줄었지만, 한때 조도 일대의 바다는 꽃게잡이와 멸치잡이 어선들이 불야성을 이루던 곳이었다. 154개의 섬을 거느린 조도면은 한때 감성돔과 우럭이 지천으로 잡히고, 꽃게와 멸치잡이로도 유명했던 곳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온 뱃사람들로 섬이 흥청거려 한창때는 2만명을 넘었다던 인구는 이제 3800여명이 고작이다. 어유포에서 밥집과 다방, 술집을 내서 뱃사람들에게서 긁어모은 돈을 가마니에 담아 다리미로 다렸다던, 그 돈으로 서울에 큰 집을 샀다는 마을주민 박씨의 상경기는 섬 안의 전설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대신 조도는 쇠락했으되 소박한 어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섬 안의 모든 길이 바다를 끼고 달리는 낭만적인 드라이브 코스가 되는 곳. 슬레이트 지붕이 잇닿은 포구의 마을들이 정겹고, 쑥을 심은 텃밭에는 벌써부터 수확이 한창이고, 배보다 달다는 무가 그득한 곳. 그곳이 바로 목포에서 해남으로, 해남에서 진도로, 진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가서 닿는 섬, 조도다.

조도(진도)=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가는 길

조도로 가려면 우선 진도로 가야 한다. 진도는 우수영 관광지가 있는 해남군 문내면과 진도대교로 이어져 있으므로 서해안고속도로나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해남까지 가서 진도대교를 건너야 한다. 진도 남단 임회면 팽목항에서 조도로 가는 배를 타야 한다.

팽목항에서 조도 창유(어유포)항까지는 30분 남짓. 페리호가 운항하므로 차를 싣고 섬으로 들 수 있다. 팽목항에서 창유까지는 오전 8시20분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6차례 운항한다. 뱃삯은 3700원. 승용차는 운전자포함 편도 1만7000원이다.

창유에 도착하면 국립공원관리소 조도분소에서 간이 지도를 얻자. 차량용 내비게이션에는 조도의 도로가 아예 나오지 않는 것들도 있다. 섬 내에는 버스가 2대 있긴 하지만, 1대는 단체관광객용이고, 상시 운행하는 것은 1대뿐이므로 뱃시간에 맞춰 운행한다.

섬에는 택시도 단 1대밖에 없다. 숙박은 창유 선착장의 버드아일랜드(061-542-5102)를 추천할 만하다. 근래 지은 건물인데다 내부 시설도 잘 갖춰놓았다. 창유리에 산수장(061-542-2445), 신비장(061-542-5139) 등 두 곳의 여관이 있으나 시설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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