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전통 매사냥 유네스코 등재 추진
2010년 01월 25일 (월) 서이석 기자 abc@cctoday.co.kr
   
 
  ▲ 전통 매사냥 무형문화재인 박용순 응사.  
 
대전시 무형문화재인 ‘전통 매사냥’의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 등재가 추진돼 초미의 관심을 끌고 있다.

문화재청과 한국전통매사냥보전회에 따르면 야생 맹금류인 매를 길들여 동물을 사냥하는 ‘매사냥’이 올해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 등재 여부를 가리는 심사를 앞두고 있다. 유네스코는 이에 따라 올해 상반기 예정된 요건심사와 올 하반기 국제심사위원회를 통해 등재 여부를 최종 결정할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사회에서는 인류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수렵술 중 하나로 기원전 4000년 전으로 올라가는 매사냥의 역사성과 문화성, 학술성, 희소성을 감안할 때 유네스코 등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아시아에선 중동을 제외하면 한국과 몽골 등만 등재 신청된 것으로 알려져 ‘살아있는 무형유산’인 매사냥의 종주국 위상을 전 세계에 떨칠 절호의 기회란 평가다.

한국에서는 한국전통매사냥보전회와 국내 매사냥 기능보유자로 대전시 무형문화재 8호(2000년 지정)인 박용순(53) 응사(鷹師) 등이 개인 및 단체로 등재 신청됐다.

 

사냥 매와 동고동락 40년 … ‘야생의 제왕’ 호령하다
[사람속으로]⑤ 매사냥 무형문화재 박용순 응사
2010년 01월 25일 (월) 서이석 기자 abc@cctoday.co.kr
   
 
   
 

“홋!”

짧고 우렁찬 단발마가 마을을 휘돌아 산(山) 기슭을 채 감는다.

날카로운 눈과 매서운 부리.

서로를 응시하는 강렬한 눈빛은 애증마저 초월했다.

맹금류의 제왕(帝王)인 매와, 야생과 인간의 영역 사이에서 제왕을 길들이는 사람.

대전시 무형문화재로 전설의 매사냥꾼인 박용순 응사(鷹師·53)와 그의 또 다른 가족 ‘매’ 들이다.

한치 양보없을 것 같던 팽팽한 긴장감은 박 응사의 부름으로 일단락된다.

그의 호령에 1m 가량의 양 날개짓과 함께 허공을 박차 오른 매는 박 응사의 손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 제왕의 도도한 자태를 보란 듯이 과시한다.

“응사는 매의 마음을 읽을줄 알아야 합니다. 야생의 습성이 매우 강해 주위의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서로 동반자란 인식을 갖도록 하는게 가장 중요하죠. ‘응사’로써 가장 어려운 일이자 보통의 정성과 애정을 갖고선 엄두도 못낼 일입니다.”

응사(鷹師)는 매와 매사냥에 있어서 최고 경지에 오른 사람을 일컫는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대전시 동구 이사동에서 ‘고려응방’을 운영하며 전통의 매사냥법을 보급하고 있는 박용순 응사와 전북의 박정오 응사 단 두 명만이 전통 매사냥의 명맥을 잇고 있다.

박용순 응사는 지난 2006년 작고한 전영태 전북 무형문화재에 이어 지난 2000년부터 대전시 무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현존하는 국내 최고 ‘응사’인 것이다.

지난 2003년부터 국내 유일의 전수기관인 한국전통매사냥보전회를 발족했고, 대전 동구 이사동에 고려응방도 만들었다.

매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 개인이 잡거나 기르는게 법으로 금지된데 따른 고육지책이다.

이 후 매년 겨울마다 대전에서 매사냥 공개 시연회를 하고 있다.

“매사냥은 겨울이 제철이다. 매는 더위에 매우 약합니다. 또 산란기에는 집중력이 떨어지죠. 여름에 털갈이를 하고 몸을 만든 후 서서히 찬바람이 불면 훈련에 들어갑니다. 본격 시즌은 11월 중순부터 3월말이죠.”

박 응사의 직함은 여러가지다.

대전시 무형문화재 제8호. 한국전통매사냥보전협회장, 한국조류보호협회 구조단장 등등.

하나같이 굵직한 명함이지만 그는 응사로 불리기를 바란다.

지난 40년 동안 낮에는 송골매, 참매를 길들이고 밤에는 옛 문헌에 파묻혀 매사냥 연구에 매달려 온 그에게 응사는 그의 ‘혼(魂)’이다.

매를 훈련시켜 야생동물을 잡게하는 매사냥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수렵술 중 하나다.

기원전 4000년 전 중앙아시아 유목민들로부터 시작돼 중동 및 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됐다고 한다.

한반도에는 고조선시대 만주 동북지방의 수렵인들로부터 시작됐다.

고려시대에 절정을 이루며 고려 충렬왕때는 전담기관인 응방(鷹坊)을 만들었고, 그 전통은 조선시대 숙종때까지 이어졌다.

날렵하고 용맹하면서도 우아한 기품을 가진 매와 함께 들판을 누비며 사냥하는 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과 귀족의 상징.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일반 백성도 즐길 수 있는 오락이 됐던 매사냥은 한국전쟁을 거치고 총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매사냥이 어렵사리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마찬가지. 현재 세계 50여개 나라 3만명 정도가 매사냥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일부에선 동물학대란 말을 꺼내지만 잘몰라서 하는 얘기다.

강제하면 매는 주인을 떠나 날아가 버린다. 극도로 사랑해야 매도 사람 곁에 있다.

그래서 흔히 응사들은 정성이 80%, 기술은 20% 라고들 한다.

사랑과 관심이 그래서 여느 동물보다 더욱 중요하다.

낮에는 팔뚝에 기르고 밤에는 등불을 밝혀 기른다.

“처음 매를 받을때는 숙식을 같이 합니다. 끼고 살아야 하죠. 밤에 잘때도 방안에서 팔베개를 하고 재우죠. 두려움이 가득하던 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저를 인정하게 됩니다.”

   


평생을 바친 매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가 전수를 위해 마련한 동구 이사동 ‘고려응방’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의 거처는 곳곳이 허름해 외관상 사람이 사는 곳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마당 건너편 매들의 거처는 한눈에 봐도 깔끔하고 정돈돼 있다.

그의 고려응방에는 보라매, 수진이, 송골매, 새매, 황조롱이 등 모두 6마리 가량의 매가 있다. 그의 또 다른 가족. 하루 종일 매를 지켜본다는 그의 말이 허투로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야생은 야생이다.

사람과 정이 많아 길들이기 쉬운 개와는 전혀 다르다.

조물주로부터 야생이란 유전자 DNA가 주어져 있다. 인간이 아무리 인위적으로 가공해도 변하지 않는다.

다만 사냥본능을 유출하고 사람과 가까워질 뿐이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동반자가 아닌 한 때의 동반자”라고 말한다.

박 응사는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새매로 매사냥 연습을 시작했다.

“논산 성덕초 5학년때였죠. 산에 갔다가 우연히 새매 새끼를 주어왔습니다. 개구리를 먹이로 잡아다 주고 하다보니 정이 들더라고요.”

그의 매 사랑은 남달랐다.

초등학교 6학년때 가족과 함께 대전으로 이사 온 후 중학교와 고등학교, 군대에서도 ‘매사랑 외길 인생’은 이어졌다.

군대에선 매새끼를 탄창 주머니에 주워 와 부대내에서 키웠다.

하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매를 개인이 소유하거나 키울 수 없어 전통 매사냥법 전수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가 무형문화재가 되기로 결심하지만 매가 천연기념물이라는 제약조건 때문에 무형문화재 등록은 쉽지 않았다.

3년 동안 문화재청을 오가면서 겨우 무형문화재로 등록될 수 있었다.

평생 매사냥에 빠져 있던 박 응사의 가족들에게 매는 그야말로 애증의 대상이다.

매만 끼고 산다며 가족들로부터 눈치도 받았다.

지난해 말 군입대한 큰 아들 박상원(23)씨는 가족보다 매에 빠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매사냥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고 자원했다.

아들 박상원씨의 매와의 100일간 얘기는 당시 교육방송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다.

처음 3일간은 쳐다만 봤다고 한다. 손등에 올리는 것조차 힘이 들지만 초보 응사에게 아버지 박용순씨는 응사는 매와 하나가 돼야 한다고 주문처럼 말했다.

매와 언제나 붙어 다니는 그이지만 매에게 조금이라도 소홀한 모습을 보이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참매 똥을 치워주고 식량인 메추라기를 갖다 바친다. 박상원씨에게 이건 응사가 아니라 엄마가 된 기분이다.

“공부를 잘했어요. 학교에서 1등급 받아 담임선생님이 서울쪽 대학을 권유했죠. 그런데 뒷바라지를 못하겠다고 했더니 결국 교사가 되겠다며 충남대 공업교육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로써의 박용순씨에게 아들과 가족 얘기는 가슴을 저미게 한다.

“돈은 못벌어오고 매만 붙잡고 사는데 어느 누가 좋다고 하겠습니까. 서방을 매한테 뺐겼다며 아내가 이혼하자고 한적도 있어요(웃음).”

무형문화재가 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후계자 문제는 갈수록 고민이다.

전통의 맥이 끊어져서는 안된다고 이곳 저곳을 누비고 있지만 응사란 직분으론 생계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현 여건상 누구에게 권유하기도 조심스럽다.

현재 무형문화재 지정 후 그의 수입이라곤 보조금 70만 원이 전부다. 아내도 부업을 하고 있지만 살림살이가 쉽지 않다.

“응사는 두 가지 직업을 갖지 못하는 특수무형문화재입니다. 하루종일 매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죠. 남들은 언론에도 나오지 뭔가 돈벌이는 되겠구나 바라보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전통문화재 유지를 잇겠다며 서울과 부산, 심지어 제주에서도 대전을 찾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다른 무형문화재는 장인의 기술 등으로 일부 돈벌이가 되지만 응사는 현행법상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매를 개인이 소유하거나 키울 수 없어 전통 매사냥법 전수와 생계에 많은 제약이 따르고 있다.

엊그제는 가스가 끊겨 냉방에서 잠을 청했다.

“우리의 매사냥은 수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전수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어요. 매사냥법이 제정되길 바라지만 관계기관은 원칙만 얘기합니다.”

그래도 2010년 새해들어 희망을 새로 그리는 그다.

지난해 한국을 포함 전 세계 10여개 국과 공동으로 매사냥법을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또 매사냥의 역사성, 희소성, 학술성을 감안할 때 현 지방무형문화재에서 국가주요무형문화재로 위상이 승격되길 바라고 있다.

“한국은 매사냥 종주국입니다. 그러나 전승자가 없어 실낯같은 명맥만 유지하는 현실에 유네스코 등재 역시 고민을 깊어지고 하고 있죠. 일반 기능보유자가 제도문제는 고민하지 않는 그런 날이 오기만 학수고대합니다.” 글=서이석 기자 abc@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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