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북면 비야리] 고리산 정기 받은 '약샘' 마을의 보배
해발 5백81m의 고리산. 이 고리산은 옛부터 군북면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면서 아흔아홉 봉우리를 거느리며 산기슭에 24개 마을을 형성시켰다. 옥천의 영산이라고 불리우는 고리산(보통 환산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주민들은 고리산이라고 부른다)은 이렇게 여러 마을을 거느리면서도 비야골을 산 아래 첫마을로 꼽았다.
배를 댈 고리가 있다 하여 고리산이라고 명명되었다는 이 설명은 옛날에 이미 이곳이 대청호가 형성되어 배가 내륙 깊숙히까지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해줘 선조들의 예지력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한 고리산의 정기가 골짝으로 흘러 탄생시킨 비야골의 '약샘'은 가히 마을의 보배로 통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끊이지 않는 물.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차가운 이 약샘물은 인근 2∼3만평의 논에 충분한 물을 댄다.
이따금씩 방향을 돌리려는 차량들로 인해 상처를 입긴 했어도 바위 틈에서 자라난 향나무는 이 마을 최고령 노인이 어렸을 때에도 크기가 똑같았다고 전해져 적어도 2백년은 되었을 것이라는 주민들의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23가구. 노인인구가 대부분인 비야골 인구는 1백명이 채 안된다. 군북면에서도 증약리를 지나 감노골을 거쳐 비포장길 1km여를 달려야 보게되는 비야골인지라 우선은 교통문제가 가장 큰 문제이다. 이곳에서부터 중약리 국도까지의 거리가 4km가 넘으니 자연 주민들의 소득과도 연관이 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통학에도 큰 어려움이 따른다.
물론 비야리까지의 옥천버스가 들어온다고는 하지만 날씨가 나쁘다거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으면 안들어 오는 일수가 많아 주민들의 불편을 가중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주민들은 두가지 지역개발 소식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 하나가 증약-대정간 도로확포장. 이 도로가 완공될 경우 대정리, 항골리 주민들은 물론 비야골 주민들도 교통편의를 제공받게 돼 더욱 지역개발이 촉진되게 되었다. 감노골까지는 포장이 되었으나 비야골까지 포장이 안돼 불편을 겪던 주민들로서는 청량제였던 셈. 이와 함께 비야골 일대의 관광휴양지 개발소식이 주민들에게 희소식으로 다가오고 있다.
법정주소가 중약리 산 1-1 번지인 이곳에는 한 때 계광건설(대표 육동진)에서 골프장을 건설하고자 했으나 환경보전과 관련, 무산되고 만 경험이 있는데 이번에 계획되고 있는 종합관광휴양지는 수렵장, 식물원, 유기장, 수영장 등을 갖출 것으로 알려져 주민들이 대환영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최근들어 마을의 분위기가 이렇게 형성되자 주민들은 이를 계기로 도시로 나가 있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살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면 하는 은근한 바람을 갖는다.
이 마을의 현재가 있기까지는 10여년 전부터 시작한 상추, 꽈리고추 등의 근교농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논보다는 밭이 더 많은 마을 형편상 주민들은 좀 더 소득이 높은 작물을 선택하게 되었고 상추를 뜯고, 고추를 따 한짐 한짐 대전역 등에 내다 팔아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하기를 10여년. 현재까지도 15가구 이상이 이 소득농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근교농업 또한 교통편만 좋으면 더욱 확대될 전망이나 현재로서 특작을 한다 해도 출하수단 등 편의시설이 좋지 않아 특작물에 대한 기대를 반감시키고 있다.
마을에 거주하는 성씨의 분포도는 문화유씨와 옥천육씨 문중이 가장 먼저 마을의 터전을 닦은 후 별달리 많은 가구수가 거주하는 성씨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20여가구에 이르는 주민들이 모두들 한 가족같이 살고 있을 뿐. 이 마을에는 시어머니, 아니 친정 어머니 한 분이 계시다. 올해 예순아홉의 오명세 할머니.
젊은 시절부터 상추 등 나물장사를 시작해 5남매를 훌륭히 키웠는가 하면 아직도 건강한 몸으로 마을 가구마다 해다 먹일 것 있으면 음식을 해서 나눠주고 아프면 함께 걱정하는 23가구의 집일을 돌봐주면서 어느덧 마을 일이 모두 오 할머니의 일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91년 11월 남편인 김문기(38)씨와 함께 비야골로 들어온 부녀회장 김미경(33)씨는 누가 봐도 억척스런 농군이다. 비육우 13마리를 키우며 농어민 후계자이기도 한 김씨는 몸이 편치 않은 시어머니를 비롯, 시부모를 모시며 마을 일에도 열심인지라 주민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다.
이와 함께 류재성 이장이 비육우 40두를 키우며 전업농으로 성장한 비야골은 한겨레신문을 일으킨 송건호씨를 비롯, 많은 출향인들이 각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현재 비야회(회장 육영환)와 비야향우회(회장 김홍준) 등 출향인 모임이 속속 결성되고 있어 좀 더 활기찬 비야리를 위한 노력이 기대되는 등 전망을 밝게 해준다. '오염'이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야리의 봄날이 확포장되는 도로를 달리는 희뿌연 연기속에 깊어간다. |
군북면 비야리
"10년 전만 하더라도 마을에 차 3대만 들어와도 난리가 났지. 우마차도 간신히 들어오는데 자동차가 3대나 들어왔으니 빠져나갈 공간이 있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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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북면 감로리] 배가 특산품, 군내 최대 주산 단지
바위틈새를 비집으며 얼마나 많은 시간 햇빛 보기를 위해 흘렀을까? 마침내 수정같이 맑은 물은 감로사(甘露寺) 터 뒷편 바위를 뚫고 주민들의 식수가 된다. '감로'라는 한자를 그대로 해석한 '단이슬'은 바로 감로사 터의 약수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바위 틈을 흘러내린 감로사 물은 골짜기를 흘러 감로리 주민들의 상수원이 되니 그야말로 고리산(환산) 자락의 자연혜택을 그대로 입고 있는 셈이다. 달은 이슬의 흐름이 시작되는 이곳은 군북면 감로리의 실질적인 경계가 형성되는 곳으로 감로리 산 1번지를 이룬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 등 옛 지리지에 사찰 이름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감로사는 제법 큰 규모를 자랑했거나 유래가 있었을 것이란 추정이다. 1백평의 법당 자리 외에도 2백평의 요사터가 있고 군데군데 깨진 기와장이 뒹구는 정터 아래로는 옛날에 경작했던 농경지가 6백여평 남짓하다. 지금은 폐허로 변해 각종 넝쿨과 가시덤불, 억새풀 등이 빽빽이 들어선 이곳.
향토사학자들은 이곳에서 발견되는 기와 파편이 조선시대의 것이며, 그것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에 지어지고 중기 이후에 없어진 절이라고 추정한다. 감로사는 추소리 안양사, 묘정암 절터와 함께 고리산에 있었던 3개 사찰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감로사로부터 시작되는 감로라는 옛날 자연마을로는 '감로골'로 불리워졌을 망정 별도의 행정단위로 분리되지는 않았으며 증역리의 1개 마을로 기록에 전해진다. 현재 58세대에 1백50여명의 주민들이 평화롭게 배밭을 일구며 평범하게 산다.
마을로 들어서는 관문을 증약리이다. 증약리 입구를 가로지른 경부철도와 청석교를 지나 군도로 지정된 도로를 2km 남짓 따라 올라가면 감로리다. 증약리와 마찬가지로 감로리 입구에는 경부고속도로가 가로질러 나있다. 주민들은 교량으로 가설된 이 구간의 지하차도를 이용해 마을을 출입하는데 고속도로의 소음으로 인해 주민들이 민원을 계속 제기한 결과 93년말 방음벽이 설치되어 소음으로 인한 고통을 약간 감소했다.
물론 문제는 하나 더 남아 있다. 마을 입구의 지하차도 이외에 마을에서 비야리로 넘어가는 구간에서 통과해야 하는 또 하나의 지하차도는 비야리 주민들은 물론 감로리 주민들의 숙원이 되어 있다.이 지하차도가 있는 한 비야리로는 레미콘 트럭을 비롯한 대형차량은 통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증약-대정간 군도 개설사업에도 막대한 차질을 초래하고 있다. 올해 마을 앞에 가로질러 있는 고속도로를 증약리와의 경계 쯤으로 이전하는 공사가 시작돼 이 공사가 완공될 때 쯤이면 주민들의 소음공해 피해는 그만큼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 완공 이후 사용하지 않는 고속도로 부지를 군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 김영복 이장 등 주민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감로리는 군내 최대의 배 재배지이다. 군내 어느 곳을 가도 새로 식재되는 작목이 포도라면 이곳에서는 배나무이다. 15°이상의 경사지라면 온통 배나무일 뿐만 아니라 최근에 논을 개량해 배나무를 심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김순조씨가 배를 재배하기 시작해 70년대 초반에 배 재배가 일반화되었다. 한창 만부병이 번진 포도나무를 캐내고 배나무를 심은 것이 적중해 배 재배적지라는 결과를 도출해 배영농클럽(회장 김차랑) 32가구의 농가들은 20여ha의 면적에서 1년에 3억원 이상의 소득을 올린다. 감로리 특산품으로 자리잡은 배는 별도의 '감로배'라는 상표를 달고 도시로 출하된다.
1만여평의 과수원을 갖고 있는 김차랑 회장은 1년 소득만도 1억원을 넘긴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 올해 군 전체 배 재배농가를 포함하는 영농법인 설립준비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주민들의 참여가 없이는 불가능할 정도의 위세다. 과수 이외에 부수입으로는 상추, 부추, 토마초 등 과채류가 주요 소득원이다. 과채류를 주로 재배하는 가구수는 대략 15가구. 그래서 옛부터 자모리와 함께 소득이 높은 마을로 꼽혔었다.
마을에는 옛부터 13가구에 이르는 김해김씨와 12가구에 이르는 광산김씨가 오래도록 살아왔는데 김해김씨의 경우 마을에 들어온 지 대략 3백년 가량 될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대전이 생활권으로 나물이나 채소 등을 뜯어 대전 시장에 팔아 소득을 올려온 마을 부녀자들의 부지런함이 돋보이는 마을이다. 과수와 채소가 주요 작물인 이곳은 상대적으로 벼농사가 적다. 대중교통수단인 시내버스가 닿지 않아 증약리 국도까지 2km를 걷는 불편을 제외하고는 고리산 산자락에 기대앉은 마을의 분위기는 매우 평온하다.
별다른 아쉬움이 없이 살아가는 주민들이지만 아직까지 향우회 조직이 정식으로 결성되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건축업을 하는 천상준씨를 비롯, 김세웅(대전보건환경연구원)씨, 김현창(서울 거주)씨 등의 출향인이 있는데 현재 대전 및 서울지역의 각 출향인 계모임을 통합해 향우회를 조직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증약리, 비야리 등 인근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 주민들의 가장 큰 숙원은 증약리-대정리간 군도가 훤히 뚫리는 일이다. |
[군북면 와정리] 통상 대정리라 불리는...
통상 대정리라 불리는 옥천군으로서는 따로 동떨어진 섬같은 이곳. 와정을 비롯, 항곡, 대촌리 등지에 모두 1백50여 가구가 살지만 그중 와정리가 72가구로 주민수가 가장 많다. 와정을 시작으로 대정분교가 있는 자구티, 거먹골과 세거리로 나뉘어 있다. 군내의 섬마냥 대정리가 된 것도 원인은 대청댐 건설이었다. 군북면 추소, 이평리를 통해 오가던 이곳 마을은 수몰되면서 세천 방면으로 돌아가야만 하도록 되었다. 수몰로 인한 마을 변화는 이루 다 말할수는 없어도 젊은이의 감소로 인한 대정초교의 분교장 격하도 주민들의 아픈 부분이다.
수몰 당시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돌아올리는 만무하지만 요즘들어 대청호변의 아름다운 경관과 맞물려 남은 여생을 조용히 마치고자 와정리를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만 해도 최근 들어서 3가구가 이곳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주위가 대청호로 둘러싸여 있음으로 해서 주민들의 직업 구성도 어업이 하나 추가된다. 대부분은 농사를 짓지만 마을 내에서 두 가구가 어업 허가권을 얻어 고기를 잡고 있다. 별다른 소득이 없이 어업을 전업으로 하고 있는 이들 어민들은 고기가 잘 잡히는 해에는 일반적인 농업소득 보다는 낫다.
하지만 올해는 장마가 없어 수위가 낮은 때문인지 고기잡이가 그리 신통치 않다. 어업허가 자체가 별다른 농업소득이 없는 어려운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했을 때 마을 내 6가구에 달하는 영세민 등 어려운 주민들에게 어업허가가 확대되길 바라는 주민이 많다. 고기잡이 이외에 부수입을 올리는 것으로는 '민물 새우잡이'. 가을 새우잡이가 시작된 요즘 같으면 제법 시세가 좋아 4kg에 2만5천원까지 한다.
날마다 할 수는 없어도 봄, 가을로 4월에서 6월까지 9월에서 12월까지가 새우잡는 시기이다. 5가구 가량이 참여하고 있는데 수입이 좋을 때는 월 70∼80만원 수준은 된다. 농사는 역시 벼농사가 가장 많다. 전원창씨, 이점석씨, 김영봉씨, 이춘옥씨, 박경래씨 등이 8년여 전부터 재배하고 있는 포도는 이 마을 주민들이 주로 재배하는 과수로 현재 11가구에 달한다. 이중 전원창씨는 3천여평의 포도 밭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올리는 주인공이다.
방아실 '돌섬'하면 웬만한 낚시꾼이라면 다 안다. 옛부터 낚시가 잘되던 곳이라는 이 돌섬은 항곡리로 가는 옛길 주위에 위치해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청호변이라면 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강변 쓰레기 처리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현재 이곳과 비야리, 감노리와 중약리에 이르는 군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옛날보다는 면 소재지와의 연결이 한결 쉬워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만 이 연결도로로도 현재의 대전 생활권 만큼은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대전 시내버스가 와정-비야-중약노선을 통해 수환하든가 옥천시내버스가 현재의 비야리 노선을 확장해 운행하는 방안이 세워졌으면 하는 것이 바람. 출향인으로는 조경철(대전 동양강철 대표)씨가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으며, 김홍선(26)씨와 김종국씨가 열심히 사는 주민들로 인정받고 있다. 생활권 및 행정구역 상의 불일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는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로 안겨져 있다. |
군북면 와정리 | ||||||||||||
-희망과 자신감으로 가득∼
찬바람이 파고드는 세밑. 하지만 군북면 와정리 주민들의 가슴은 어느때보다 따뜻하다. 올 한 해 와정리 주민들은 어느해보다 알찬 수확을 거둬들였다.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던 마을회관 준공을 앞두고 있으며 물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주민들은 올해 3월부터 신설된 상수도로 더 이상 물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수확은 바로 주민들이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주민 하나로 묶은 퇴비화 사업
`희망'과 `자신감' 가장 큰 수확
다양한 소득원
올해 수매에서 36.5% 특등비율
마을의 안녕 기원하는 느티나무
규제에 대한 불만 |
[군북면 항곡리] 생활권 대전, 대청호반의 인심좋은 고리산 주변마을
이평리 쪽으로는 험하디 험한 공곡재가 가로막고 비야리 쪽으로는 고리산의 주봉이 흘러내려 육로로의 통행을 막은 큰 골짜기 황골. 본래 황골이란 골이 크다라는 뜻으로 골이 깊고 커서 불리워지게 되었는데 이 옛 명칭을 한자로 쓰면서 항곡리(恒谷里)라고 표기하게 되었다.
한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항곡리인 관계로 마을에서 보면 고리산 정상이 곧바로 올려다 보인다. 이 역시 고리산이 잉태한 마을이란 느낌을 갖게하는데 옛부터 지금까지 자연조건으로 인해 옥천군에 속해 있으면서도 생활권은 대전으로 이원화된 마을중의 하나이다.
와정리.대촌리와 더불어 대청호를 따라 이루어진 이 마을은 본래 군북면 방하곡리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전면조정시 나뉘어졌다. 옛부터 한 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40가구 147명의 주민들은 한 가정같이 화목한 인심을 자랑하며 서로 걱정해주는 마을을 형성했다. 외부에서 보는 생활권과 행정권이 분리되어 불편하겠다는 시각에 오히려 주민들은 별다른 불편함을 못느낀다는 말투다.
하루 여섯번 다니는 대전시내버스가 그런대로 주민들의 발을 움직이게끔 하고 있다.현재는 증약초교 대정분교의 학구가 있고 대전시 동구 판암동에 위치해 있는 동산중학교로 학생들이 등교해 학구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행정적인 불편은 주민들이 가장 크게 감수하고 있는 어려움이다. 면사무소에 주민등록등본 한장을 때러 가더라도 버스가 없는 시간에는 한시간 가량이나 걸어나가 와정리에서 승차한 다음 세천동에서 내려 다시 군북으로 들어와야 하기 때문.
최근 이평-항곡간 임도가 다듬어지고 증약-항곡간 도로가 개설되고 있어 이러한 불편은 크게 개선될 것으로 보고는 있으나 많은 주민들이 직접 생활하는데는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 표정이다. 이곳역시 감비야에 대단위 휴양지가 들어설 경우 도로개설과 함께 마을의 활성화가 더욱 촉진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는 한편 대청댐이 건설된 이후 변화된 농사여건이 주민들의 이목을 끈다. 비옥한 토지가 수몰되고 점차 안개일수가 늘어, 감의 경우 조기낙엽 현상으로 수확량이 크게 떨어졌다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주장한다.
열매를 맺는 작물의 경우가 이같은 피해를 당하고 있으면서도 주민들은 밭7만여평, 논 6만여평의 고리산 주변에 형성된 산골마을로서는 비교적 넓은 경지를 거의 노는 땅없이 경작하고 있다. 서로 염려해주는 주민들의 인심도 인심이려니와 부지런한 주민 심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대목. 불과 8~9년전까지도 대부분의 농가가 담배농사를 지었으나 노동력의 노령화와 이농으로 인해 잠업으로의 작목전환이 시도되었고, 잠업이 소득작목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며 농민들로부터 소외되자 최근 들어서는 단옥수수 재배농가가 증가했다.
5년전부터 시작된 단옥수수는 현재 마을에서 4~5집만 제외하곤 모두 재배할 정도로 주종을 이루고 있다. 특별히 소득이 높아서가 아니라 땅을 묵히기가 싫어 보여주는 주민들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대청호가 바로 지척인데도 농업용수가 부족한 것이 마을로서는 큰 숙제이다. 올해야 봄가뭄이 없어 수원이 풍부하나 봄가뭄이 있는 해엔 영낙없이 물부족에 시달린다. 그래서 올해 가뭄을 대비해 관정을 하나 팠으나 역시 가뭄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으로 여겨져 또 하나의 관정을 요구하고 있다.
대청호 물을 용수로 끌어쓰려면 3단계 양수를 거쳐야 가능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인심좋은 이 마을주민들 중에서도 박종성(대전법원근무)씨의 효행은 모든 주민들이 칭찬한다. 대전에 거주하면서도 매주 거르지 않고 고향의 부모를 찾아 농사일을 거들며 효행에 힘쓰고 있음을 주민들이 눈여겨 보고 있으며 현재는 동이면 호병계장으로 승진한 강정옥씨를 많이 기억한다.
"강정옥씨가 우리 마을 담당으로 다시 왔으면 좋겠어요" 하는 주민들의 말대로 동이면으로 옮겨간 이후에도 강씨는 사흘이 멀다하고 전화로 주민들의 안부를 물어오곤 한단다.
또한 황순임씨는 팔순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효부로, 김성준(대전)씨와 조석구(대전)씨는 고향에 많은 관심을 쏟는 출향인으로 이름나 있다. 89년, 92년 등 두번에 걸쳐 범죄없는 마을로 선정된 바 있는 항곡리는 대청호변 마을이 너나없이 겪는 쓰레기 몸살에 빠져있다. 특히 인근 대전 등지에서 오는 낚시꾼들로 인한 피해가 가장 많은데 올때마다 얘기를 해도 잘 안된다며 의식개혁을 주창한다.
공곡재를 넘어 이평.추소리로 통하는 농로는 비만 오면 수렁으로 변해 경운기 통행조차 어려운 지역으로 주민들은 이 농로가 댐건설 후 이설도로로 건설되었던 만큼 성의있는 도로보수가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특히 공곡재 중턱엔 옛부터 기와를 구워냈던 가마터가 일부 남아있는 가운데 염종열 이장의 포도밭엔 지금도 옛 기와파편이 수없이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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