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북면 비야리] 고리산 정기 받은 '약샘' 마을의 보배

   
 
  ▲ 군북면 비야리  
 

해발 5백81m의 고리산. 이 고리산은 옛부터 군북면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면서 아흔아홉 봉우리를 거느리며 산기슭에 24개 마을을 형성시켰다. 옥천의 영산이라고 불리우는 고리산(보통 환산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주민들은 고리산이라고 부른다)은 이렇게 여러 마을을 거느리면서도 비야골을 산 아래 첫마을로 꼽았다.


"옛날부터 이 근동에서는 옥천이 제일 높고 그 옥천 중에서도 비야골이 가장 높다는 거여" 유효길(74) 노인회장이 비야골의 유래와 더불어 '배를 걸 수 있는 고리'가 있다 하여 고리산이라고 불리웠던 유래에 대해 설명해준다.

 

배를 댈 고리가 있다 하여 고리산이라고 명명되었다는 이 설명은 옛날에 이미 이곳이 대청호가 형성되어 배가 내륙 깊숙히까지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해줘 선조들의 예지력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한 고리산의 정기가 골짝으로 흘러 탄생시킨 비야골의 '약샘'은 가히 마을의 보배로 통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끊이지 않는 물.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차가운 이 약샘물은 인근 2∼3만평의 논에 충분한 물을 댄다.

 

이따금씩 방향을 돌리려는 차량들로 인해 상처를 입긴 했어도 바위 틈에서 자라난 향나무는 이 마을 최고령 노인이 어렸을 때에도 크기가 똑같았다고 전해져 적어도 2백년은 되었을 것이라는 주민들의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23가구. 노인인구가 대부분인 비야골 인구는 1백명이 채 안된다. 군북면에서도 증약리를 지나 감노골을 거쳐 비포장길 1km여를 달려야 보게되는 비야골인지라 우선은 교통문제가 가장 큰 문제이다. 이곳에서부터 중약리 국도까지의 거리가 4km가 넘으니 자연 주민들의 소득과도 연관이 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통학에도 큰 어려움이 따른다.

 

물론 비야리까지의 옥천버스가 들어온다고는 하지만 날씨가 나쁘다거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으면 안들어 오는 일수가 많아 주민들의 불편을 가중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주민들은 두가지 지역개발 소식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 하나가 증약-대정간 도로확포장. 이 도로가 완공될 경우 대정리, 항골리 주민들은 물론 비야골 주민들도 교통편의를 제공받게 돼 더욱 지역개발이 촉진되게 되었다. 감노골까지는 포장이 되었으나 비야골까지 포장이 안돼 불편을 겪던 주민들로서는 청량제였던 셈. 이와 함께 비야골 일대의 관광휴양지 개발소식이 주민들에게 희소식으로 다가오고 있다.

 

법정주소가 중약리 산 1-1 번지인 이곳에는 한 때 계광건설(대표 육동진)에서 골프장을 건설하고자 했으나 환경보전과 관련, 무산되고 만 경험이 있는데 이번에 계획되고 있는 종합관광휴양지는 수렵장, 식물원, 유기장, 수영장 등을 갖출 것으로 알려져 주민들이 대환영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최근들어 마을의 분위기가 이렇게 형성되자 주민들은 이를 계기로 도시로 나가 있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살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면 하는 은근한 바람을 갖는다.

 

이 마을의 현재가 있기까지는 10여년 전부터 시작한 상추, 꽈리고추 등의 근교농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논보다는 밭이 더 많은 마을 형편상 주민들은 좀 더 소득이 높은 작물을 선택하게 되었고 상추를 뜯고, 고추를 따 한짐 한짐 대전역 등에 내다 팔아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하기를 10여년. 현재까지도 15가구 이상이 이 소득농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근교농업 또한 교통편만 좋으면 더욱 확대될 전망이나 현재로서 특작을 한다 해도 출하수단 등 편의시설이 좋지 않아 특작물에 대한 기대를 반감시키고 있다.

 

마을에 거주하는 성씨의 분포도는 문화유씨와 옥천육씨 문중이 가장 먼저 마을의 터전을 닦은 후 별달리 많은 가구수가 거주하는 성씨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20여가구에 이르는 주민들이 모두들 한 가족같이 살고 있을 뿐. 이 마을에는 시어머니, 아니 친정 어머니 한 분이 계시다. 올해 예순아홉의 오명세 할머니.

 

젊은 시절부터 상추 등 나물장사를 시작해 5남매를 훌륭히 키웠는가 하면 아직도 건강한 몸으로 마을 가구마다 해다 먹일 것 있으면 음식을 해서 나눠주고 아프면 함께 걱정하는 23가구의 집일을 돌봐주면서 어느덧 마을 일이 모두 오 할머니의 일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91년 11월 남편인 김문기(38)씨와 함께 비야골로 들어온 부녀회장 김미경(33)씨는 누가 봐도 억척스런 농군이다. 비육우 13마리를 키우며 농어민 후계자이기도 한 김씨는 몸이 편치 않은 시어머니를 비롯, 시부모를 모시며 마을 일에도 열심인지라 주민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다.

 

이와 함께 류재성 이장이 비육우 40두를 키우며 전업농으로 성장한 비야골은 한겨레신문을 일으킨 송건호씨를 비롯, 많은 출향인들이 각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현재 비야회(회장 육영환)와 비야향우회(회장 김홍준) 등 출향인 모임이 속속 결성되고 있어 좀 더 활기찬 비야리를 위한 노력이 기대되는 등 전망을 밝게 해준다. '오염'이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야리의 봄날이 확포장되는 도로를 달리는 희뿌연 연기속에 깊어간다.

 

군북면 비야리

   
 
  ▲ 해발 581m의 고리산 아래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산골의 작은 마을 비야리. 난리를 피하고 또 출세하는 사람이 많은 고장이란 뜻으로 풀이되는 마을이름처럼 성공한 출향인들이 많은 지역이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마을에 차 3대만 들어와도 난리가 났지. 우마차도 간신히 들어오는데 자동차가 3대나 들어왔으니 빠져나갈 공간이 있었겠어"

4번 국도를 빠져나와 좁은 1차선 도로 위를 달려 온지 10여분. 증약리와 감노골을 지나 해발 581m의 고리산 아래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산골의 작은 마을 비야골.

축사와 마을 진입도로, 넓은 광장, 현대식 마을회관까지 마을 입구에서부터 비야골은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젊은 마을 `비야골'
현재 비야골에는 26가구, 72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1930년대 20여가구, 1993년 23가구에 비해 미비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주민수는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증가하고 있는 주민수보다도 더 희망적인 것은 마을 구성원들이 젊은 청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있다.

김문기(47) 이장을 비롯해 천웅희(41), 김래호(41)씨를 비롯해 4-H 연합회 회장을 지낸 유석현(27)씨까지 젊은 일꾼들이 마을의 미래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이런 젊은 힘과 주민들의 단합은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를 이끌어 냈다.

96년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돼 받은 1천만원의 상금과 군의 지원, 마을기금으로 97년에 마을회관을 건립했고, 이에 앞서 96년에는 순수한 주민들의 힘만으로 마을 앞에 광장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렇듯 주민들의 힘으로 건설된 마을회관과 광장은 초상이나 생일잔치 등 마을의 애경사시 손님을 받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에 일이 생기면 모를 심다가도 달려오는 마을이 바로 비야골이죠" 이경서(75) 전 노인회장의 얘기처럼 산골의 작은 마을이지만 가족적인 마을 분위기는 옛날 고향의 인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리산과 비야골 옹달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곳이 물로 덮여있었던 모양이야. 고리산 정상에는 배를 매는 고리가 있었다는 거지. 그래서 산이름도 고리산이라고 불리고 있어"

군북면의 중심이면서도 옥천을 상징하는 산으로 인식되고 있는 고리산이지만 비야골 주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이 전 노인회장의 말처럼 어떤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봉화터와 고리산 정상의 헬기장은 주민들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추억의 공간이다.

고리산과 함께 `비야골 옹달샘'은 마을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이 옹달샘에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담겨있어 주민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다음은 이경서 전 노인회장이 전해준 옹달샘에 대한 전설로 비야골의 형성과정까지 소개되어 있다.

「인적이 드문, 10리마다 집이 한 채 보일까 말까하는 그런 오랜 옛날, 옥천육씨 문중 사람이 이곳 비야골을 찾았다.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전국을 다니며 치료약을 구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던 그 사람은 이곳을 지나다 소가 발로 밟은 모양의 구멍에서 김이 나오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김속에 고여있던 물을 마신 그 사람은 다른 곳에 비해 물맛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이곳에 움막을 짓고 기거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그 물을 마신 육씨문중 사람은 몸속의 병이 다 치유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샘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아무리 가물어도 샘의 물이 줄지 않고 또 장마가 져도 물이 불지 않는다는 이 옹달샘은 겨울에도 15도의 온도를 유지하며 따뜻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고 한여름에는 단 몇 분도 물속에 발을 담가두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을 지니고 있다.

이 옹달샘에 대한 애정은 주민뿐만 아니라 이곳을 찾는 외지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다. 옹달샘 주변에는 외지사람들의 이름을 써 놓은 물그릇들이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옹달샘 옆 향나무와 베어진 느티나무
옹달샘과 함께 바위틈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는 200년이상 된 향나무도 주민들에겐 큰 자랑거리다. 옹달샘의 물맛도 이 향나무가 좋게 해준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지금에 와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옹달샘 옆 향나무와 함께 비야골의 상징으로 자리잡던 600년 된 느티나무도 주민들이 기억하고 있는 추억의 한 장소이다. 나무아래 돌탑이 쌓여 있어 주민들의 소원을 기원하는 장소로, 또 정월대보름이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도 지내 왔지만 30년전 무늬목으로 사용하기 위해 베어졌다.

마을의 상징이었던 만큼 이 후 얘깃거리도 많았다. 나무를 베자 속에서 뱀 두 마리가 나왔다는 얘기에서부터 나무를 벤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까지, 주민들의 아쉬움을 담아낸 얘기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좁은 농토 극복 위해 시작한 축산
비야골의 주 소득원은 꽈리고추 등 밭작물이다. 논보다는 밭이 많은 마을의 특성이 소득원으로 나타나고 있다.

26가구 대부분이 꽈리고추, 상추와 같은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고, 지난해 2천원까지 떨어졌던 거래가격도 7일 오전 꽈리고추 4kg 한 상자가 9천원에 거래되고 있어 올해 가격시세도 좋은 상황이다. 밭작물 재배와 함께 축산은 마을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전, 유재성(50)씨로부터 시작된 축산은 김문기 이장이 10년 전부터 소 사육을 시작했고 5년 전부터는 김래호씨, 지난해부터는 천웅희씨까지 소 사육을 이어가고 있다. 또 마을의 가장 젊은 일꾼인 유석현씨가 아버지 유재성씨를 이어 소 사육에 열정을 보이고 있다.

2권역 변경, 주민들의 숙원
"현재 비야골은 대청호 수질보전특별대책지역 1권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1인당 120평 이상의 축사는 지을 수 없는 형편이며 120평에는 소 40여마리밖에는 사육할 수 없습니다"

비야골 주민들은 소 사육을 통해 좁은 농토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지만 부적합한 환경규제로 인해 더 이상의 소득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청호 주변지역이라면 이해라도 되는데 이곳에서 대청호까지는 16km이상 떨어져 있을 겁니다. 환경규제를 하더라도 책상 위에서 얘기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실사를 통해 마을의 상황에 맞게 설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질보전특별대책지역 1권역 지정의 피해는 축산인 뿐만이 아니다. 일반 주민들도 조그마한 조립식 주택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25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가는 정화조를 설치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가장 가난한 마을에서 이제는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마을로 성장한 비야골이지만 `더 이상의 꿈을 펼칠 수 없는 불합리한 수질보전특별대책지역 권역은 반드시 변경되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주민들의 바람으로 남아있다.

▶폐고속도로 활용 문제
최근 증약-감로 간 도로 확포장공사가 진행되면서 비야골 주민들은 20∼30분씩 공사차량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불편을 겪고 있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주민들은 공사기간 만이라도 폐고속도로 활용을 요구하고 있다.

터널의 전기료 문제와 쓰레기 처리 문제 등을 사용불가의 이유를 들고 있지만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감로에서부터 비야골까지라도 폐고속도로를 활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다. 폐고속도로 활용과 함께 마을 진입도로의 중앙선 문제도 주민들의 불만이다.

"다른 마을 진입도로는 모두 중앙선이 끊어져 있지만 비야골 진입도로에만 중앙선이 이어져 있다. 마을주민들이 감로리 방향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모두 위반을 해야하고 사고가 났을 때 많은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며 마을입구 진입도로의 중앙선을 끊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난리를 피하고 출세하는 사람 많은 곳
날비(飛), 이끼야(也). 난리를 피하는 곳이고 또 출세하는 사람이 많다는 곳이라는 뜻으로 마을이름을 풀이하는 이경서 전 노인회장의 얘기처럼 이곳 비야마을에는 유난히 성공한 출향인들이 많다.

서울교도소장을 지낸 유청일씨를 비롯해 철도청장을 지낸 송달호씨도 비야골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비야골을 대표할 수 인물로는 한겨레신문사 발행인 겸 대표이사를 지낸 송건호씨를 꼽을 수 있다.

1926년 비야리에서 태어난 송 회장은 지난 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시 후배기자들의 해임에 항의, 사임한 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해직언론인협회 등 3개 단체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의장을 지냈으며 1985년에는 `말'지를, 1987년에는 국민주를 표방한 한겨레신문을 창간해 발행인 겸 대표이사로 새로운 언론문화를 펼쳐 보였다.

이런 활발한 활동을 펼친 송 회장은 지난 97년부터 전신마비 증상을 보이며 투병중이며 송 회장의 가족에 따르면 현재 `식물인간' 상태인 것으로 전해져 마을 주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군북면 감로리] 배가 특산품, 군내 최대 주산 단지

   
 
  ▲ 군북면 감로리  
 

바위틈새를 비집으며 얼마나 많은 시간 햇빛 보기를 위해 흘렀을까? 마침내 수정같이 맑은 물은 감로사(甘露寺) 터 뒷편 바위를 뚫고 주민들의 식수가 된다. '감로'라는 한자를 그대로 해석한 '단이슬'은 바로 감로사 터의 약수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바위 틈을 흘러내린 감로사 물은 골짜기를 흘러 감로리 주민들의 상수원이 되니 그야말로 고리산(환산) 자락의 자연혜택을 그대로 입고 있는 셈이다. 달은 이슬의 흐름이 시작되는 이곳은 군북면 감로리의 실질적인 경계가 형성되는 곳으로 감로리 산 1번지를 이룬다.


마을에서부터 골짝을 타고 고리산 산자락을 1km 가량 오르면 오솔길 한쪽 옆으로 나타나는 빈터. 1백평 남짓한 이 터는 바로 감로리의 마을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하는 감로사 절터이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 등 옛 지리지에 사찰 이름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감로사는 제법 큰 규모를 자랑했거나 유래가 있었을 것이란 추정이다. 1백평의 법당 자리 외에도 2백평의 요사터가 있고 군데군데 깨진 기와장이 뒹구는 정터 아래로는 옛날에 경작했던 농경지가 6백여평 남짓하다. 지금은 폐허로 변해 각종 넝쿨과 가시덤불, 억새풀 등이 빽빽이 들어선 이곳.

 

향토사학자들은 이곳에서 발견되는 기와 파편이 조선시대의 것이며, 그것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에 지어지고 중기 이후에 없어진 절이라고 추정한다. 감로사는 추소리 안양사, 묘정암 절터와 함께 고리산에 있었던 3개 사찰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감로사로부터 시작되는 감로라는 옛날 자연마을로는 '감로골'로 불리워졌을 망정 별도의 행정단위로 분리되지는 않았으며 증역리의 1개 마을로 기록에 전해진다. 현재 58세대에 1백50여명의 주민들이 평화롭게 배밭을 일구며 평범하게 산다.

 

마을로 들어서는 관문을 증약리이다. 증약리 입구를 가로지른 경부철도와 청석교를 지나 군도로 지정된 도로를 2km 남짓 따라 올라가면 감로리다. 증약리와 마찬가지로 감로리 입구에는 경부고속도로가 가로질러 나있다. 주민들은 교량으로 가설된 이 구간의 지하차도를 이용해 마을을 출입하는데 고속도로의 소음으로 인해 주민들이 민원을 계속 제기한 결과 93년말 방음벽이 설치되어 소음으로 인한 고통을 약간 감소했다.

 

물론 문제는 하나 더 남아 있다. 마을 입구의 지하차도 이외에 마을에서 비야리로 넘어가는 구간에서 통과해야 하는 또 하나의 지하차도는 비야리 주민들은 물론 감로리 주민들의 숙원이 되어 있다.이 지하차도가 있는 한 비야리로는 레미콘 트럭을 비롯한 대형차량은 통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증약-대정간 군도 개설사업에도 막대한 차질을 초래하고 있다. 올해 마을 앞에 가로질러 있는 고속도로를 증약리와의 경계 쯤으로 이전하는 공사가 시작돼 이 공사가 완공될 때 쯤이면 주민들의 소음공해 피해는 그만큼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 완공 이후 사용하지 않는 고속도로 부지를 군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 김영복 이장 등 주민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감로리는 군내 최대의 배 재배지이다. 군내 어느 곳을 가도 새로 식재되는 작목이 포도라면 이곳에서는 배나무이다. 15°이상의 경사지라면 온통 배나무일 뿐만 아니라 최근에 논을 개량해 배나무를 심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김순조씨가 배를 재배하기 시작해 70년대 초반에 배 재배가 일반화되었다. 한창 만부병이 번진 포도나무를 캐내고 배나무를 심은 것이 적중해 배 재배적지라는 결과를 도출해 배영농클럽(회장 김차랑) 32가구의 농가들은 20여ha의 면적에서 1년에 3억원 이상의 소득을 올린다. 감로리 특산품으로 자리잡은 배는 별도의 '감로배'라는 상표를 달고 도시로 출하된다.

 

1만여평의 과수원을 갖고 있는 김차랑 회장은 1년 소득만도 1억원을 넘긴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 올해 군 전체 배 재배농가를 포함하는 영농법인 설립준비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주민들의 참여가 없이는 불가능할 정도의 위세다. 과수 이외에 부수입으로는 상추, 부추, 토마초 등 과채류가 주요 소득원이다. 과채류를 주로 재배하는 가구수는 대략 15가구. 그래서 옛부터 자모리와 함께 소득이 높은 마을로 꼽혔었다.

 

마을에는 옛부터 13가구에 이르는 김해김씨와 12가구에 이르는 광산김씨가 오래도록 살아왔는데 김해김씨의 경우 마을에 들어온 지 대략 3백년 가량 될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대전이 생활권으로 나물이나 채소 등을 뜯어 대전 시장에 팔아 소득을 올려온 마을 부녀자들의 부지런함이 돋보이는 마을이다. 과수와 채소가 주요 작물인 이곳은 상대적으로 벼농사가 적다. 대중교통수단인 시내버스가 닿지 않아 증약리 국도까지 2km를 걷는 불편을 제외하고는 고리산 산자락에 기대앉은 마을의 분위기는 매우 평온하다.

 

별다른 아쉬움이 없이 살아가는 주민들이지만 아직까지 향우회 조직이 정식으로 결성되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건축업을 하는 천상준씨를 비롯, 김세웅(대전보건환경연구원)씨, 김현창(서울 거주)씨 등의 출향인이 있는데 현재 대전 및 서울지역의 각 출향인 계모임을 통합해 향우회를 조직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증약리, 비야리 등 인근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 주민들의 가장 큰 숙원은 증약리-대정리간 군도가 훤히 뚫리는 일이다.

[군북면 와정리] 통상 대정리라 불리는...

   
 
  ▲ 군북면 와정리  
 


하루 여섯 번. 세시간 간격으로 운행되는 631번 대전 시내버스가 주민들의 교통수단. 이제 만성이 되어 괜찮다고, 차 시간 맞춰 기다리면 된다고 편하게 생각하고 산다지만 역시 교통불편은 여러가지 불편 중 가장 큰 불편 중의 하나다.

 

통상 대정리라 불리는 옥천군으로서는 따로 동떨어진 섬같은 이곳. 와정을 비롯, 항곡, 대촌리 등지에 모두 1백50여 가구가 살지만 그중 와정리가 72가구로 주민수가 가장 많다. 와정을 시작으로 대정분교가 있는 자구티, 거먹골과 세거리로 나뉘어 있다. 군내의 섬마냥 대정리가 된 것도 원인은 대청댐 건설이었다. 군북면 추소, 이평리를 통해 오가던 이곳 마을은 수몰되면서 세천 방면으로 돌아가야만 하도록 되었다. 수몰로 인한 마을 변화는 이루 다 말할수는 없어도 젊은이의 감소로 인한 대정초교의 분교장 격하도 주민들의 아픈 부분이다.

 

수몰 당시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돌아올리는 만무하지만 요즘들어 대청호변의 아름다운 경관과 맞물려 남은 여생을 조용히 마치고자 와정리를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만 해도 최근 들어서 3가구가 이곳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주위가 대청호로 둘러싸여 있음으로 해서 주민들의 직업 구성도 어업이 하나 추가된다. 대부분은 농사를 짓지만 마을 내에서 두 가구가 어업 허가권을 얻어 고기를 잡고 있다. 별다른 소득이 없이 어업을 전업으로 하고 있는 이들 어민들은 고기가 잘 잡히는 해에는 일반적인 농업소득 보다는 낫다.

 

하지만 올해는 장마가 없어 수위가 낮은 때문인지 고기잡이가 그리 신통치 않다. 어업허가 자체가 별다른 농업소득이 없는 어려운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했을 때 마을 내 6가구에 달하는 영세민 등 어려운 주민들에게 어업허가가 확대되길 바라는 주민이 많다. 고기잡이 이외에 부수입을 올리는 것으로는 '민물 새우잡이'. 가을 새우잡이가 시작된 요즘 같으면 제법 시세가 좋아 4kg에 2만5천원까지 한다.

 

날마다 할 수는 없어도 봄, 가을로 4월에서 6월까지 9월에서 12월까지가 새우잡는 시기이다. 5가구 가량이 참여하고 있는데 수입이 좋을 때는 월 70∼80만원 수준은 된다. 농사는 역시 벼농사가 가장 많다. 전원창씨, 이점석씨, 김영봉씨, 이춘옥씨, 박경래씨 등이 8년여 전부터 재배하고 있는 포도는 이 마을 주민들이 주로 재배하는 과수로 현재 11가구에 달한다. 이중 전원창씨는 3천여평의 포도 밭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올리는 주인공이다.

 

방아실 '돌섬'하면 웬만한 낚시꾼이라면 다 안다. 옛부터 낚시가 잘되던 곳이라는 이 돌섬은 항곡리로 가는 옛길 주위에 위치해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청호변이라면 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강변 쓰레기 처리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현재 이곳과 비야리, 감노리와 중약리에 이르는 군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옛날보다는 면 소재지와의 연결이 한결 쉬워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만 이 연결도로로도 현재의 대전 생활권 만큼은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대전 시내버스가 와정-비야-중약노선을 통해 수환하든가 옥천시내버스가 현재의 비야리 노선을 확장해 운행하는 방안이 세워졌으면 하는 것이 바람. 출향인으로는 조경철(대전 동양강철 대표)씨가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으며, 김홍선(26)씨와 김종국씨가 열심히 사는 주민들로 인정받고 있다. 생활권 및 행정구역 상의 불일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는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로 안겨져 있다.

 

군북면 와정리

               -희망과 자신감으로 가득∼

 

   
 
  ▲ 대정분교와 마을회관이 들어선 자괏마을은 32가구가 거주하며 와정리 중심마을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  
 

찬바람이 파고드는 세밑. 하지만 군북면 와정리 주민들의 가슴은 어느때보다 따뜻하다. 올 한 해 와정리 주민들은 어느해보다 알찬 수확을 거둬들였다.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던 마을회관 준공을 앞두고 있으며 물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주민들은 올해 3월부터 신설된 상수도로 더 이상 물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수확은 바로 주민들이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주민 하나로 묶은 퇴비화 사업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19일, 군북면 와정리에서 항곡리 중간 지점의 꾀꼬리봉 줄기 아래 공터에 60여명의 와정리 주민들이 퇴비생산을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수풀에 가려져 있던 옛 도로도 본래의 모습을 찾았고 넝쿨로 둘러 쌓여있던 나무들도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비록 최우수마을에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우수마을로 선정, 1천500만원의 상사업비와 75만원의 상금을 얻어 퇴비생산과 깨끗해진 주변환경 등과 함께 부수적인 성과도 거둬들였다. 이런 성과와 함께 김우태 이장은 `이번 퇴비화 사업으로 인해 주민들이 하나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라는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희망'과 `자신감' 가장 큰 수확
내년 1월4일 6천400만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마을회관과 찜질방이 준공식을 갖는다. 6천400만원의 사업비 중 자부담 금액은 모두 1천400만원. 700만원 정도가 조성돼 있던 마을 기금 중 500만원을 사용했고 올해 운영을 시작한 방아실 낚시터에서 300만원의 기금을 지원해 주었다. 나머지 600만원도 각 반마다 조성돼 있던 기금과 주민들의 작은 정성들로 채워졌다.

"4개 자연마을로 떨어져 있는데다 거리도 멀어 전혀 다른 마을로 생각될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 마을회관 건립이 숙원사업이었음에도 적극적인 추진이 어려웠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죠. 하지만 이번 일을 추진하면서 결과로 나타난 성과물보다 오히려 `희망'이나 `자신감'이 생겼다는데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조금씩 해결되는 숙원
지난해까지 와정리 주민들이 겪었던 가장 큰 고통은 바로 물 부족 문제였다. 수량도 부족했지만 관정을 깊이 뚫지 않으면 석회 성분이 섞여 나와 사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대정분교 등이 위치해 있는 자괏(2반) 마을의 경우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어려움은 올 3월, 상수도가 신설되면서 일시에 해소되었다. 상수도 신설을 시작으로 지난 10월 퇴비생산 우수마을에 선정돼 받은 1천500만원의 상 사업비는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마을의 각종 숙원사업을 해결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우선 4개 마을에 가로등이 신설돼 주민들이 밤에도 안전하게 이웃집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고 규모가 적어 지원 받지 못했던 새거리 앞 작은 수로정비사업도 해결했다. 이밖에 마을회관 앞 광장을 정비한 것도 바로 퇴비생산 우수마을에 선정돼 받은 상 사업비로 추진한 사업이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와정리 주민들은 내년에는 반드시 퇴비생산 최우수마을로 선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다양한 소득원
와정리는 4개 자연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군북면 항곡리를 지나 처음 나타나는 마을이 새거리로 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새거리에 이어 거먹골(금오골)에는 16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대정분교가 위치한 자괏마을은 32가구가 거주하며 와정리 중심마을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

자괏마을과 함께 외정이라 불리는 마을에는 30가구가 거주, 두 번째로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4개 마을이 각각 떨어져 위치한 만큼 주민들의 소득원도 다양하다. 86가구 대부분이 벼농사를 짓고 있어 가장 큰 소득원이며 이밖에 포도 8가구, 배 3가구, 소와 돼지 사육을 비롯한 축산 농가도 4가구에 이른다.

또한 옥천지역은 물론 대전에서도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있는 방아실 돼지집을 비롯해 여울목, 영일가든, 운하파크 등의 사업체와 방아실, 하우스 낚시터 등도 와정리의 중요한 소득원 중 하나다.

 

올해 수매에서 36.5% 특등비율
해마다 정부수매량이 줄어들면서 창고마다 쌀가마들이 가득 쌓여있는 모습은 농촌마을의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올해 와정리에서 수매한 양은 모두 413가마. `두 사람만으로도 다 채울 수 있을 정도'라며 양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내고 있지만 와정리 주민들은 다른 마을에서처럼 재고분에 대한 걱정만큼은 하지 않는다.

"쌀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그런지 시내 사람들이 맞춰놓고 먹는 경우가 많아요. 또 방아실에 위치한 횟집에서 대부분 와정리 쌀을 이용하고 있고 횟집을 다녀간 사람들이 직접 쌀을 사가기도 하지요"

김우태 이장은 와정리에서 생산된 쌀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까지 주민들의 벼농사에 대한 열의를 가장 큰 요인으로 들고 있다.

"밤에 자다가도 비오는 소리가 들리면 나가서 물꼬를 확인할 정도로 열의가 높아요"

이러한 열의는 품질향상으로 이어져 올해 수매에서 와정리는 151가마가 특등 등급을 받아 36.5%의 높은 특등비율을 나타냈다. 1등급은 242가마로 58.7%, 2등급은 20가마로 4.8%를 나타냈다. 이 같은 비율은 군 전체 특등비율인 11.2%보다도 높은 수치이며 군북면 전체인 27.29%보다도 높다.

 

마을의 안녕 기원하는 느티나무
대전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외정이 마을에는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입구 양옆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사이를 금줄로 연결하는 마을의 풍습이 전해 내려온다. 이러한 전통은 대전과의 경계를 이루는 첫 번째 마을이기 때문에 와정리 마을 뿐 아니라 옥천 전체를 보호해 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언제부턴가는 잘 모르지. 나 어렸을때도 그만큼 큰 나무였으니까 나무의 수명만큼 오래됐을 거야"

이종(64) 전 이장은 외정이 마을의 입구를 금줄로 막는 마을의 전통에 대해 외정이 마을 앞 느티나무와 그 역사를 같이 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을 내놓고 있다. 외정이 마을 느티나무와 함께 거먹골 앞 정자나무도 외정이 느티나무만큼 주민들이 사랑하고 있다.

"정자나무가 세워진 곳은 옛날에 사정날망이라 불리던 곳이었어. 네 그루의 정자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 그런데 그 정자나무들은 모두 늙어 쓰러지게 되었고 6.25때 지금의 정자나무를 새로 심게 된 것이지"

옛 사정날망 자리에 심어진 두 그루의 정자나무는 이제 마을 주민들의 편안한 쉼터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

 

규제에 대한 불만
대청호 주변 마을로 와정리는 다른 마을과 함께 규제에 대한 강한 불만의 목소리를 나타내는 마을 중 한 곳이다. 특히 이곳은 대전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서 더 큰 차별로 느끼고 있었다.(대전은 상수원 보호구역 지원사업이 있다)

"보이는 것만 비교해 봐도 대전쪽과 차이가 커요. 똑같이 규제를 받는 지역이지만 대전쪽 마을에는 심야보일러는 물론 농기계, 고추건조기까지 지원해 주고 있어요. 규제만큼 혜택도 받고 있는 셈이죠. 하지만 옥천은 규제만 있지 혜택은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불평등한 지원은 주민들이 농촌을 떠나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고 김 이장은 전한다.

"대전이 가깝기 때문에 자연속에서 생활하며 출퇴근하려는 사람들이 집터를 알아보기 위해 많이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규제 때문에 정작 이주해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대청호로 인해 농토가 물에 잠긴데 이어 이제는 규제 때문에 생산성을 높이는 모든 작업이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이 주민들에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다가서고 있다.

[군북면 항곡리] 생활권 대전, 대청호반의 인심좋은 고리산 주변마을

   
 
  ▲ 군북면 항곡리  
 

이평리 쪽으로는 험하디 험한 공곡재가 가로막고 비야리 쪽으로는 고리산의 주봉이 흘러내려 육로로의 통행을 막은 큰 골짜기 황골. 본래 황골이란 골이 크다라는 뜻으로 골이 깊고 커서 불리워지게 되었는데 이 옛 명칭을 한자로 쓰면서 항곡리(恒谷里)라고 표기하게 되었다.

 

한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항곡리인 관계로 마을에서 보면 고리산 정상이 곧바로 올려다 보인다. 이 역시 고리산이 잉태한 마을이란 느낌을 갖게하는데 옛부터 지금까지 자연조건으로 인해 옥천군에 속해 있으면서도 생활권은 대전으로 이원화된 마을중의 하나이다.

 

와정리.대촌리와 더불어 대청호를 따라 이루어진 이 마을은 본래 군북면 방하곡리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전면조정시 나뉘어졌다. 옛부터 한 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40가구 147명의 주민들은 한 가정같이 화목한 인심을 자랑하며 서로 걱정해주는 마을을 형성했다. 외부에서 보는 생활권과 행정권이 분리되어 불편하겠다는 시각에 오히려 주민들은 별다른 불편함을 못느낀다는 말투다.

 

하루 여섯번 다니는 대전시내버스가 그런대로 주민들의 발을 움직이게끔 하고 있다.현재는 증약초교 대정분교의 학구가 있고 대전시 동구 판암동에 위치해 있는 동산중학교로 학생들이 등교해 학구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행정적인 불편은 주민들이 가장 크게 감수하고 있는 어려움이다. 면사무소에 주민등록등본 한장을 때러 가더라도 버스가 없는 시간에는 한시간 가량이나 걸어나가 와정리에서 승차한 다음 세천동에서 내려 다시 군북으로 들어와야 하기 때문.

 

최근 이평-항곡간 임도가 다듬어지고 증약-항곡간 도로가 개설되고 있어 이러한 불편은 크게 개선될 것으로 보고는 있으나 많은 주민들이 직접 생활하는데는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 표정이다. 이곳역시 감비야에 대단위 휴양지가 들어설 경우 도로개설과 함께 마을의 활성화가 더욱 촉진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는 한편 대청댐이 건설된 이후 변화된 농사여건이 주민들의 이목을 끈다. 비옥한 토지가 수몰되고 점차 안개일수가 늘어, 감의 경우 조기낙엽 현상으로 수확량이 크게 떨어졌다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주장한다.

 

열매를 맺는 작물의 경우가 이같은 피해를 당하고 있으면서도 주민들은 밭7만여평, 논 6만여평의 고리산 주변에 형성된 산골마을로서는 비교적 넓은 경지를 거의 노는 땅없이 경작하고 있다. 서로 염려해주는 주민들의 인심도 인심이려니와 부지런한 주민 심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대목. 불과 8~9년전까지도 대부분의 농가가 담배농사를 지었으나 노동력의 노령화와 이농으로 인해 잠업으로의 작목전환이 시도되었고, 잠업이 소득작목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며 농민들로부터 소외되자 최근 들어서는 단옥수수 재배농가가 증가했다.

 

5년전부터 시작된 단옥수수는 현재 마을에서 4~5집만 제외하곤 모두 재배할 정도로 주종을 이루고 있다. 특별히 소득이 높아서가 아니라 땅을 묵히기가 싫어 보여주는 주민들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대청호가 바로 지척인데도 농업용수가 부족한 것이 마을로서는 큰 숙제이다. 올해야 봄가뭄이 없어 수원이 풍부하나 봄가뭄이 있는 해엔 영낙없이 물부족에 시달린다. 그래서 올해 가뭄을 대비해 관정을 하나 팠으나 역시 가뭄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으로 여겨져 또 하나의 관정을 요구하고 있다.

 

대청호 물을 용수로 끌어쓰려면 3단계 양수를 거쳐야 가능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인심좋은 이 마을주민들 중에서도 박종성(대전법원근무)씨의 효행은 모든 주민들이 칭찬한다. 대전에 거주하면서도 매주 거르지 않고 고향의 부모를 찾아 농사일을 거들며 효행에 힘쓰고 있음을 주민들이 눈여겨 보고 있으며 현재는 동이면 호병계장으로 승진한 강정옥씨를 많이 기억한다.

 

"강정옥씨가 우리 마을 담당으로 다시 왔으면 좋겠어요" 하는 주민들의 말대로 동이면으로 옮겨간 이후에도 강씨는 사흘이 멀다하고 전화로 주민들의 안부를 물어오곤 한단다.

 

또한 황순임씨는 팔순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효부로, 김성준(대전)씨와 조석구(대전)씨는 고향에 많은 관심을 쏟는 출향인으로 이름나 있다. 89년, 92년 등 두번에 걸쳐 범죄없는 마을로 선정된 바 있는 항곡리는 대청호변 마을이 너나없이 겪는 쓰레기 몸살에 빠져있다. 특히 인근 대전 등지에서 오는 낚시꾼들로 인한 피해가 가장 많은데 올때마다 얘기를 해도 잘 안된다며 의식개혁을 주창한다.

 

공곡재를 넘어 이평.추소리로 통하는 농로는 비만 오면 수렁으로 변해 경운기 통행조차 어려운 지역으로 주민들은 이 농로가 댐건설 후 이설도로로 건설되었던 만큼 성의있는 도로보수가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특히 공곡재 중턱엔 옛부터 기와를 구워냈던 가마터가 일부 남아있는 가운데 염종열 이장의 포도밭엔 지금도 옛 기와파편이 수없이 발견되고 있다.

 

[군북면 대촌리] 대청호변 횟집.낚시터로 유명한 '방아실'

   
 
  ▲ 군북면 대촌리  
 

아흔아홉 봉우리를 거느렸다는 명산. 군북면의 중심에 위치해 어디를 가도 그 연봉을 볼 수 있는 고리산이 군의 가장 끄트머리에 빚어놓은 마을이 군북면 대촌리이다. 가구수가 43호에서 45호 사이를 오르내리고 인구수는 2백여명에 이르는 작은 마을. 그러나 이러한 수치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빚어낸 결과물이다.

 

이 마을의 성쇠는 결국 대청댐이 좌지우지한 셈이 되었다. 수몰전 1백20호에 달하던 주민들의 수가 3분의 1수준인 40여호에 불과할 정도로 감소한 것은 수몰이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마을이 크고 골짜기마다 형성되어 있어서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간다 해도 어디인가 한 귀퉁이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인 점을 감안하면 수몰을 전후에 대촌에 일어났던 변화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수몰은 마을의 위치나 주민들의 생활상을 완전히 변화하게 했다. 대촌리에 오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진입로로 올 수는 없었다. 지금의 횟집이 많이 들어선 곳이 본래 마을이 있던 자리였는데 마을을 오기 위해서는 지금으로 말하면 강변을 따라 대청호변을 돌아와야 했다.

 

대정초교를 거쳐 '방화정'이란 정자를 거쳐 들어오는 길은 수몰된 후 새로 개설된 도로이다. 말하자면 마을의 앞과 뒤가 뒤바뀐 것이다. 현재 횟집이 들어찬 대청호변 쪽이 옛날로 말하자면 큰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막다른 곳으로 변했고 길도 제대로 없어 좁은 길로 사람만 통행했던 산간지역은 주민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 어엿한 마을의 형태를 갖춘 마음이 되었다.

 

대청호 수몰로 당장 갈 곳이 없어진 주민들이 새로 마을을 만든 곳은 지금은 마을 자랑비가 서있는 신주택지이다. 이전까지는 불과 몇 가구의 주민들이 거주했지만 마을 양 방면 진입로가 수몰되어 산 너머로 이설되자 주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마을 하나를 건설하는 대역사를 펼쳤다. 3천여평에 달하는 24가구의 집터를 닦은 것은 물론 마을 개천 양쪽의 8백m 석축을 주민들의 힘으로 완공했으니 이들 주민들은 1개 마을을 자신들의 힘으로 이룩한다는 보람으로 이 대역사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수몰 후 '마을 출력이 너무 많아 농사를 짓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면서도 마을 터닦기나 도로 관리를 위해 적극 나섰다. 수몰 후 주민들이 새로 조성한 마을에서 옛 방화실(방아실, 현재 횟집이 많은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주민들이 뜻을 모아 '방화정'이란 정자를 세운 것은 마을 조성을 모두 끝낸 기념으로 건립한 것이다.

 

그렇다면 '방화정'이란 명칭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기록에 따르면 대촌(大村)은 자연마을로 분구할 당시마을이 가장 크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 외부에서는 '방아실'이란 지명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인근 대전에서도 '방아실'하면 횟집으로, 낚시터 등으로 유명하다. '방아실'이란 지명은 본래 마을의 생긴 모양이 디딜방아 같이 생겼다 하여 지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본래 지명은 '방아실'이 아니라 '방화실(方花)'이라고 주장한다.

 

대전시와 경계를 이루는 마을 뒷산의 이름이 꽃재이기 때문에 꽃화(花) 자를 써서 마을 이름이 정해졌다가 방아실로 변천되었다는 유영래 노인회장의 증언. 현재 출향인들과 모임은 구성되어 있지 않으나 경로잔치 때나 각종 행사가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출향인들과 연계가 맺어진다. 문화류씨 대전 종친회에서 수몰 후 마을 도로변에 은행나무 가로수를 심어준 것도 이와같은 맥락에서이다.

 

전체 45가구 가운데 30가구 가까이가 문화류씨로 성씨가 구성되어 있는 이곳에는 문화류씨 사당이 있어 매년 10월이면 시제를 지내러 오는 문중 사람들로 붐빈다. 공식적인 문화류씨 족보에는 1506년 유 근 공이 처음 자리잡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마을이 생긴지는 꼭 11년이 빠지는 5백년 세월이다. 마을 주민들의 가장 큰 숙원으로는 방아실 입구-와정-항곡리에 이르는 도로의 확포장이다.

 

현재 비야-항곡간 도로 확포장공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실제 주민들의 생활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구간인 항곡-대촌간 도로나 증약-감로리 구간의 도로가 먼저 확포장되어야 한다는게 주민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옥천-대정간을 잇는 현재의 도로 확포장공사가 주민들의 생활권을 기존의 대전권에서 옥천권으로 돌려놓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게 주민들의 분석이다. 기름진 논밭이 대부분 수몰된 후 이 마을에서 택한 것이 포도 농사이다. 현재 10가구가 포도 재배에 참여하고 있으며 포도와 함께 한우 사육이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이다.

 

[군북면 환평리] 고리산 닮은 듯한 주민 심성 아름다워

   
 
  ▲ 군북면 환평리  
 

고리산 자락에 기대어 땅을 일구며 말없이 살고 있는 곳이 군북면이라면 군북면에서도 환평리는 고리산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런 마을이다. 마을 이름이 그러거니와 99봉 가운데 한 산자락에 매달려 있지만 고리산을 닮은 듯한 주민들의 심성 또한 그러하다. 주민들의 여망과 한이 함께 서려있는 만큼 주민들의 생활터전이 바로 고리산이다.

 

대청호변 254군도를 따라 얼마간을 가서야 비로소 환평에 닿을 수 있다. 고리산이 고리산이라 불리지 않고 환산이란 생소한 이름이라 불리듯 환평리도 본래 명칭보다는 행정편의를 위해 한자로 바꾼 사례이다.

 

고리산의 명칭은 '고리환'으로 해석, 환산이라 했듯 환평이는 환산이란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아흔아홉 고리산 봉우리 기슭에 기대앉아 있는 군북면내 열 개 여느 마을보다 고리산과 환평리가 친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산 명칭에서 마을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다. 본래 환평은 '고무실'이라는 전래의 명칭이 있었다. 고무딸기나무라는 식물이 마을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고무실'이라 불렸는데 환평이란 지명은 일제시대 이후 생겨났다.

 

지금도 마을의 돌담에 자생하는 고무딸기나무가 '고무실'이란 명칭을 뒷받침한다. 지금도 옛 어른들은 '환평'이란 지명보다는 '고무실'이란 옛지명으로 불러야 쉽게 알아듣는다. 254군도가 대청호변을 따라 대정리까지 이어지듯 환평리에 이르는 길은 수려한 자연경관이 연속되는 그런풍경이다. 그래서 송시열 선생 등 옛 선비들도 자주 찾던 곳 아니었던가? 그러나 실제 주민들의 삶은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많은 변화를 강요당했다. 기름진 논은 거의 대청호수에 수몰되고 마을의 절반 가량이 타의에 의해 타향으로 떠나게 되었으며 이제는 노인가구가 대부분인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대청호라는 인공호수가 생기기 이전의 환평리는 73가구에 달하는 제법 큰 마을을 형성했었다. 하나 둘 주민들이 떠난 지금은 45가구, 1백60여 주민들이 거주할 따름이다. 수치상으로야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실제 주민들이 느끼는 심정은 겉에서 보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그래도 주민들은 묵묵히 삶을 살아낸다. 봄이면 등산객이, 사시사철 낚시꾼이 찾는 이곳이지만 아직은 농촌의 냄새를 물씬 풍겨내는 그런 곳이다.

 

수몰로 인해 논보다 밭이 더 많은 환평이기에 20년쯤부터 재배되는 포도를 비롯, 밭작물이 소득의 근간을 이룬다. 올해 1농가가 새로 식재한 것을 비롯, 최근들어 포도재배 면적이 크게 늘었다. 현재 16가구가 포도재배에 임하고 있다. 포도도 포도지만 환평에서 최근들어 점차 늘고 있는 작목은 단연 부추이다. 3년 전부터 시작된 부추재배는 평당 1만5천원꼴의 소득을 올리는 작목으로 떠올라 확대재배되는 추세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자연산 산두릅'은 환평리의 명물임에 틀림이 없다.

 

집집마다 울타리나 돌담에는 어김없이 산두릅나무가 있다. 적게는 몇 그루에서 많게는 수십, 수백 그루까지, 봄철만 되면 주민들의 손길은 두릅순을 따내 다듬기에 바쁘다. 본래 고리산에서 자생하던 산두릅을 따다 팔던 주민들은 10여년전 전상금(68)씨가 집주변에 두릅나무를 심은 것을 계기로 너나없이 한 그루씩 심게 되었고 지금은 아예 산두릅 나무를 전문으로 재배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주민들이 따낸 산두릅 첫 순은 지난해만 해도 한 묶음당 5천원을 호가했다. 땅두릅과는 값이나 맛에서 비교가 안된다는 설명이다. 그야말로 무공해 자연식품인 셈이다. 대청호 수몰로 인해 시련을 겪은 주민들이 그나마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산두릅이나 부추같은 짭짤한 재미가 나는 소득작물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마을에서 고리산으로 올라가노라면 ' 사시골' 이란 절터가 나온다. 이 절터를 주민들은 빈대절터라고도 하는데 그 옛날 작은 암자였던 이곳은 쌀이 바위구멍에서 나왔다고 전하는 곳이다. 손님이 오면 용케 손님 몫의 쌀까지 나오는 이 구멍에 호기심이 생긴 스님이 하루는 쌀이 더 나오게 할 욕심으로 '부지깽이'로 구멍을 후비니 그 자리에서 쌀 대신 빈대가 나와 결국 절까지도 없어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문필봉 중턱엔 장수굴이 있어 6.25 전쟁 당시에는 의용군 징집을 피하느라 젊은이들이 피신했다 하며 날망에는 장수의 손가락 자욱이 새겨져 있다고 전한다. 경주이씨와 전주이씨가 전 가구의 5분의 4를 차지한다는 환평리, 이제는 9세대가 노인 혼자, 8세대가 두 노인만 거주하는 등 전체 거주세대의 3분의 1 이상이 노인들만 사는 마을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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