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특집] 지리산 칠선골~뱀사골 르포
원시의 칠선골과 웅장함의 절정 뱀사골을 잇다
칠선골~천왕봉~화개재~뱀사골 38km 1박2일 산행

성하의 지리산은 살아 움직였다. 숲 울창한 골짜기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물을 토해내며 빛나는 풍광을 자랑했다. 짙푸른 능선은 골짜기에서 올라온 구름과 함께 꿈틀거렸다. 산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골짜기와 산릉을 따르며 대자연을 향유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월간山 5월호를 통해 소개된 칠선골을 7월 초 다시 찾은 것은 독자들에게 이 골짜기의 진면목을 확인시켜드리기 위해서였다. 석 달 전에 비해 7월의 칠선계곡은 더욱 깊었고 화려했다. 신비감과 은밀함이 공존했다. 7폭(瀑) 33소·담(沼潭)으로 일컬어지는 칠선골은 골 어디 하나 절경이 아닌 곳이 없었다. 장마철을 맞아 물줄기가 굵어지고 숲이 더욱 울창해지면서 선녀탕에서 마폭에 이르기는 골짜기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신비로울 만큼 은밀한 풍광을 뽐냈다.

주능선을 따라 하루거리로 떨어져 있는 뱀사골을 이은 것은 칠선골과 뱀사골을 비교해 보고픈 마음에서였다.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골짜기였다. 칠선골이 은밀함의 극치라면 뱀사골은 웅장함의 절정이다. 병풍소, 병소, 간장소 등 수많은 소와 담들은 옥빛 계류를 넉넉하게 담고, 와폭은 그 옥빛 물을 아래 소와 담으로 넘겨주면서 넉넉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다.

“갑자기 기온이 왜 이렇게 떨어지는 거야?”


▲ 여름을 맞아 더욱 원시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칠선계곡. 비선담 위쪽 도강 지점.
추성동에서 1km쯤 떨어진 두지동을 지나자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엄습한다. 물줄기에 바짝 붙은 산길을 따르다 계곡을 가로지른 출렁다리에 올라서자 와폭 아래 널찍한 소가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짙푸르고도 신비로운 빛을 띠고 있다.

시공이 멈춘 원시 골짜기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 칠선폭, 대륙폭, 삼층폭, 마폭 등 칠선골 풍광은 7폭 33소와 담으로 일컬어진답니다. 이 정도 소는 이름도 없어요.”

칠선골 산행 안내에 나선 허승철(지리산 함양분소) 팀장은 설악산 천불동, 한라산 탐라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꼽히는 칠선골의 아름다움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선녀탕으로 향하는 사이 산길에 비닐장판 조각이 보이자 허 팀장은 “두지동에 다섯 가구가 살고 있는데 예전에는 이 일대에도 민가가 있었다”며 “저기 바위에 움푹 파인 곳은 돌절구로 사용하던 것”이라 일러준다.

출렁다리를 건너선 다음 숲길을 따라 30분쯤 오르자 선녀탕이 나타난다. 숲그늘이 드리운 소 안의 물은 유난히 맑고 푸르다. 주변 바위에 푸른 이끼가 덮여 있어 옛날 고옥을 보는 기분이다. 선녀탕 위로 올라서자 이번에는 옥녀탕. 선녀들이 경쟁하듯 맵시를 자랑하는 듯하다. 소 바로 옆을 끼고 지나서인지 더욱 아름답다. 옥녀탕은 탕도 탕이지만 그 위로 이어지는 와폭이 더욱 근사하다. 위에서 흘러내린 물을 더욱 아름답고 곱게 꾸며 옥녀탕으로 흘리고 있었다.
▲ 이틀 전 내린 비로 많은 물을 쏟꼬 있는 선녀폭포.
고즈넉한 숲길을 따르는 사이 온몸이 땀에 젖어든다. 바람 한 점 없이 무더운 날이다. 그래도 맑은 물 흘러내리는 골짜기를 걷는다는 것은 너무도 즐거운 일이다. 옛길을 따라 지면에서 띄워 설치한 데크를 지나자 비선담(飛仙潭·해발 710m·추성동 3.9km)이다. 선녀탕에서 목욕한 선녀들이 하늘로 오르는 곳이다.

비선담 출렁다리를 지나 호젓한 숲길을 빠져나가자 비경이 계속 이어진다. 역시 와폭과 소의 연속이다. 어지간한 산이라면 그럴 듯한 이름을 얻었을 텐데 워낙 빼어난 풍광의 폭포와 소가 많다 보니 무명으로 남아 있는 것일 게다. 하기야 7폭에 33소·담 모두에게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옥석이 뒤섞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선담에서 500m쯤 올라갔을까, 관리소 직원 3명이 데크통제대에 모여 있고, 위쪽 산길과 이어진 출입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다. 비선담 통제소다. 허 팀장은 “여기서부터 천왕봉까지 5.4km 구간은 특별보호구역으로 올해부터 봄가을 두 달씩 예약 가이드제에 의해 개방한다”며, “7, 8월 여름철에는 통제했다가 9, 10월 두 달 동안 다시 예약 가이드제를 실시한다”고 알려준다.

통제소를 지나자 숲이 더욱 우거지고 산길은 한층 좁아진다. 산죽 군락은 얼굴을 툭툭 때려댈 만큼 우거져 있다. 모처럼 만난 징검다리가 반갑기도 하지만 미끄러져 계류에 빠져들까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럽다.

“야, 이거 천왕봉에서부터 내려가려면 엄청 미끄럽겠는데….”

이영석씨는 미리 짐작했던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돌마다 이끼가 자라고 있고, 이끼마다 물을 듬뿍 머금어 밟기 무섭게 미끄러진다. 청춘 남녀가 비를 피해 들어섰다가 깊은 사랑에 빠졌다는 풋풋한 얘기가 전하는 청춘홀 기암을 지나자 어둠침침해진다. 숲이 더욱 울창해진 것이다. 그런데도 나뭇잎 사이로 포말이 쏟아져내리는 골짜기를 바라보노라면 대자연에 동화되어 블랙홀로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다.

 

 

말없이 걷던 석상명씨가 물을 마시려고 지계곡에 들어섰다 풍덩 빠져들었는데도 김승완 기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계류에 담근 채 꿀꺽꿀꺽 마셔댄다. 지계곡을 가로질러 100m쯤 나아가던 허 팀장이 산길을 벗어나 물가로 내려선다. 칠선폭포를 보기 위해서였다. 높이는 5m 안팎에 불과하지만 제법 넓은 암반을 타고 물줄기가 거세게 쏟아져 웅장하기 그지없다. 허 팀장은 이틀 전 내린 비의 양이 많아 폭포가 더욱 힘차게 느껴진다고 한다. 마침 오전 내내 찌푸려 있던 하늘이 열리면서 햇살이 내리쬐자 포말이 옥구슬이 쏟아져 내리는 듯 반짝인다. 이 모습에 천상의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계곡에 이어 주계곡을 가로지른 다음 허 팀장이 안내한 왼쪽 지계곡으로 들어서자 칠선골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륙폭포가 우뚝 솟구친다. 15m 높이의 대륙폭포는 물이 아닌 하늘의 빛을 쏟아붓고 있었다. 물줄기가 거센 덕분인지 골바람이 더욱 시원스레 불어대고, 물보라가 얼굴에 와닿으니 한여름 더위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대륙폭포를 지나면서 산길은 더욱 좁아지고 가팔라진다. 바위벼랑마다 이끼가 두텁게 덮여 있고, 이끼에 맺힌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게 태곳적 자연을 보는 듯 흥분되게 한다. 숲이 짙어지자 숲 사이로 바라보이는 물줄기는 더욱 신비롭다. 포말은 정지상태의 화면을 보는 듯하고 옥빛 소와 담에 담긴 물도 억겁 세월을 지나면서 굳어버린 보석처럼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시공이 멈춘 것이다.

두 개의 와폭과 수직폭이 한 줄기로 이어지는 삼단폭포 아래에서 빵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에 다시 천왕봉으로 향한다. 바윗덩이가 골을 메우고 물줄기도 급격히 약해지지만 숲은 오히려 더욱 울창해진다. 이끼 옷 입은 나무와 고사리류 식물 등이 눈에 자주 띄고 숲이 더욱 우거지는 게 원시림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다 골짜기가 한층 좁아지더니 협곡 속에 신비감 넘치는 소와 와폭이 나타나 마음을 더욱 들뜨게 한다.

“여기서부터 마폭 위쪽 일대가 예전에 사람들이 길을 잃곤 했던 구간입니다. 계곡에서 미끄러져 다치거나 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섰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도 있었고요. 특히 안개가 끼거나 비가 내리는 날에 사고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노시철씨(남원시지역자율방재단장)는 이 일대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하고 땅속에 묻혀 있다 겉모습을 드러낸 쓰레기는 예전에 장사하던 사람들이 버린 것이라고 알려준다.

잠시 후,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맨 뒤에서 좇아오던 황원선씨는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다 겨우 산길을 찾아 올라오고, 이영석씨는 이끼 덮인 바위를 밟는 순간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그 충격으로 한동안 꼼짝하지 못하다 한참 뒤에서야 모습을 나타낸 것. 그래도 더욱 큰 일을 당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 선녀폭은 이끼 덮인 벼랑과 어우러져 한층 아름답게 느껴진다.

마폭 앞에 다가서자 모니터링 중인 관리소 직원들과 학계 전문가, 지역주민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관리소는 전문가들과 지역주민들로 구성된 조사단을 통해 1년에 네 차례씩 칠선골을 답사, 생태 변화를 파악하고 있다. 올해는 예약 가이드제 실시 이전에 한 차례, 그리고 실시 후인 지금 두 번째 모니터링 중인 것이다.

마폭을 지나자 산길에 박혀 있는 바위 크랙에서 자라는 구상나무 치수(稚樹·어린나무)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15년 전 찾았을 때에 비해 분명 자연이 많이 되살아난 모습이다. 낙엽과 토사층도 두터워져 있고, 사태로 엉망이 되었던 지역도 숲이 우거져 옛 상흔은 사라진 상태다.


▲ 칠선계곡 상류는 산길이 희미해 안개 낀 날은 길을 잃을 염려가 있다.

“와, 이거 보기 드문 식물인데…. 자세히 보면 정말 꿩의 다리를 보는 것 같지 않아요?”

노시철씨는 숲속에서 껑충 자란 꿩의다리를 바라보며 “예전에는 군락을 형성한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정말 귀한 식물”이라며 반가워한다. 고개를 드는 순간 머리가 핑 돈다. 고소증세인가. 해발 1,400m대 위에서 자생하는 구상나무가 눈에 들어오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부가 바라보인다. 구상나무는 마침 새잎이 자라나면서 한층 환한 모습이다.

명계곡 잇기 위해 15km 지리주능선 산행

마지막 철계단이 장딴지를 뻐근하게 해 입에서 아이구 아이구 소리가 나오는데도 쏟아지는 햇살이 반가워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칠선골 등로를 빠져나와 곧바로 올라선 천왕봉은 역시 해발 1,915m 높이의 남한 내륙 최고봉답게 무더위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올라서 있다. 계곡은 하루종일 우중충한 날씨였건만 산릉에 올라서자 파란 하늘 아래 뭉게구름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멋진 풍광을 펼쳐낸다. 하지만 풍광에 취해 마냥 정상에 머물 수 없다. 오늘 묵을 세석대피소까지는 아직 3시간 가까이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는 즐거움도 좋지만 역시 주능선을 따르는 맛이 압권이다. 구름 안개 오락가락하며 선경을 연출하고 새소리와 함께 바람소리가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하지만 엉덩방아를 찧는 등 고난을 겪은 이영석씨는 “무슨 계곡이 이렇게 기냐?”, “벌써 8시간 넘게 걸었는데 또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느냐?”며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툴툴댄다.

통천문을 내려서고 제석봉(1,806m)을 넘어 장터목대피소로 내려서자 등산객들이 저녁식사를 하느라 어수선하다. 고기 굽는 냄새, 찌개 냄새에 잔뜩 허기진 일행에게 입맛을 다시게 하지만 얼마 쉬지도 못한 채 세석대피소로 향한다.


▲ 골짜리를 벗어나면 아름드리 주목과 소나무가 우거진 능선을 따라 천왕봉까지 이어진다.

연하봉(1,730m)과 촛대봉(1,703.7m)을 넘어 7시 반경 도착한 세석대피소 역시 등산객들로 어수선하다. 빈 식탁은 하나도 없고, 바람이 제법 거세게 불어대는데도 샘터 주변의 공터에 삼삼오오 앉아 저녁을 먹는 이들로 곳곳이 북적인다. 잠자리를 배정받고 대피소 앞 한쪽 식탁을 차지하고 버너 위에 밥을 올려놓은 뒤 석상명씨와 이영석씨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은 등산객들에게 다가간다. 그리곤 “뭐가 그리 좋으냐”고 말을 붙이더니 결국 장터목에서 이루지 못한 목적을 달성한다. 술 한 잔에 돼지고기 한 점-.

세석대피소는 새벽 2시를 넘어서면서 소란스러워진다. 천왕일출을 맞으려는 등산객들 때문이다. 크고 작은 소요와 소동은 날이 밝은 5시 너머까지 이어지더니, 도시인들이 겨우 눈을 비빌 시간인 6시경에는 오히려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세석에서 하루 묵은 사람치고는 게으름뱅이 등산객인 된 일행은 오전 6시 반 대피소를 출발, 화개재로 향한다.


하늘은 동이 트기 전부터 이미 파랗다. 구름은 밤새 골짜기로 숨어들어 숨죽이고 있다가 해가 뜨자마자 요동치기 시작하고, 산새들이 그 흥을 이어받아 지저귄다. 이런 새날 새 아침의 분위기를 누리며 세석을 출발, 영신봉(1,651.9m)에 올라서자 명선봉과 삼도봉을 거쳐 반야봉과 노고단까지 기운차게 뻗어나간 지리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가슴 설레게 한다.

“아니 저기까지 가야한단 말이에요? 김승완 기자는 무릎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어제도 11시간 이상 걸었는데, 이거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이영석씨는 어제 피로가 덜 풀렸는지 시작부터 힘든 표정을 짓고, 김승완 기자는 아예 표정이 없다. 세석에서 뱀사골 초입 화재재까지는 약 14km.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25.5km이니 주능선 길이의 반도 넘고 당연히 만만치 않은 거리다. 하지만 지리산 최고의 명계곡을 잇는 일이 어찌 쉬울 리 있을 소냐.


▲ 천왕봉을 내려서는 취재팀.

바위는 바위대로, 숲은 숲대로 반짝이고, 사람까지도 빛이 난다. 아침 햇살은 이렇게 온 세상을 보석처럼, 해처럼 환하게 빛나게 한다. 이제 7시가 조금 넘었는데 벽소령에서 출발한 등산객들이 올라오고 있다.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굳은 의지와 열정이 넘쳐난다. 이게 천왕봉이 우리에게 주는 힘이고, 지리 주능선이 주는 즐거움일 게다.

걷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조망 좋은 바위지대가 나타나면 산사람들이 모여 앉아 풍광에 취해 있다. 트랜지스터 라디어에서 ‘목로주점’ 노랫가락이 나오자 분위기는 한층 무르익는다. ‘멋들어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 언제라도 그곳에서 껄껄껄 웃던 / 멋들어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 / 월말이면 월급 타서 로프를 사고 / 연말이면 적금 타서 낙타를 사자 / 그래 그렇게 산에 오르고 / 그래 그렇게 사막에 가자…’


▲ 칠선계곡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륙폭포. 지계곡에 숨어 있다.

호젓한 숲길은 발걸음을 더디게 하고, 숲 터진 암부에 닿으면 골에서 올라오는 흰 구름이 산릉을 향해 덩실거리는 풍광에 갈 길을 잊곤 한다. 이제 구름이 꿈틀거리는 건지 실루엣 진 산릉이 꿈틀거리는지 헷갈릴 정도다.

선비샘은 20대 초반 젊은이들의 웃음으로 꽃을 피우고 있고, 벽소령대피소(세석 6.3km, 연하천 3.6km, 음정 6.7km)는 주능선을 따르는 등산객에 마천면 음정 마을쪽에서 올라온 이들까지 합쳐지면서 한층 북적인다. 이영석씨는 “벽소령도로 따라 음정 마을로 내려서는 길이 지리산에서 가장 좋아하는 산길”이라 너스레를 떨다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연하천대피소로 향한다.

형제봉과 토끼봉을 넘어 도착한 연하천대피소에서 라면을 끓여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 1시가 조금 못 미처 화개재로 향한다. 김승완 기자와 이영석씨는 무릎 관절에 통증을 느껴 먼저 출발했건만 뒤쫓아 출발한 일행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추월당하고 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보호대를 댄 ‘환자’ 일행에게도 밀리고 말았다. 이 날 새벽 3시경 중산리를 출발한 이들은 오후 5시까지 성삼재에 도착하기 위해 강행군 중이었다. 지리산은 한때 3박4일이나 2박3일은 잡아야 능선종주가 가능한 산이었으나 이제는 당일종주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얼마나 더 걸어야 뱀사골로 내려설 수 있어요?”

화개재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20분. 장마철답지 않게 비가 내리지도 않고 바람 한 점 없는 후텁지근한 날씨에 모두들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성삼재에서 능선을 타고 온 등산인들이 여기까지 잘 걸어놓고도 뱀사골로 내려서는 길을 정확하게 몰라 헤매고 있다. 화개재 삼거리에 안내판이 서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단길 아래 뱀사골대피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공사용 건물 한 채와 널찍한 공터만 보일 뿐이다. 예전 대피소와 취사장 자리는 포크레인으로 정지작업이 끝나고 토사유출방지용 그물로 덮여 있다. 시원스러우면서도 왠지 허전한 것은 오랜 추억의 장소가 자취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일 게다.

뱀사골대피소 자리를 지나면서 발걸음이 빨라진다. 화개재에서 만난 등산객에게 진통제를 얻어먹은 김승완 기자도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는지 걸음이 빨라지더니 물줄기가 나타나자 얼굴에 생기가 돈다. 물소리 울리는 골짜기가 이래서 좋은가 보다.


마음을 심연처럼 가라앉혀 주는 뱀사골

대피소 자리에서 1km쯤 내려섰을까, 좌측 골짜기 물이 합쳐지면서 골은 한층 커지고 물소리도 드세진다. 연하교를 건너는 사이 푸른 이끼 덮인 커다란 바윗덩이 사이로 흘러내리는 계류는 작은 포말을 일으키며 골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한다. 이어 안영교(安永橋) 아래 지계곡 물과 합쳐져 세를 더욱 키우더니 유유교(幽幽橋)에 이르러 제 규모의 골짜기로 모습을 갖춘다.


▲ 구름과 산릉이 멋진 조화를 이룬 지리산. 칠선봉 부근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풍광이다.

 순하디 순한 골짜기 풍광에 착 가라앉은 분위기로 반선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서늘해온다. 간장소와 병풍소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이다(반선 6.5km, 구뱀사골대피소 2.5km). 옛날 마천장과 화개장을 넘나들던 보부상이 어느 날 중산이재(화개재)를 넘어 마천으로 내려서다 소에 빠졌는데, 등짐에 있던 소금이 녹아버렸고, 그 빛이 간장빛과 같다 하여 간장소로 불리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하지만, 실상은 맑디맑은 옥빛을 띠고 있다. 그 빛에 매료되고 말았는지 하산 중이던 20대 초반 청년이 옷 입은 채로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고 만다.

재승교(再承橋)를 건너는 사이 오후 막바지 햇살에 골짜기를 파고든다. 순간 다리 위의 작은 폭포와 소는 이름난 폭포나 소 못지않은 풍광을 보여주고, 다리 아래쪽으로 쭉 뻗은 골짜기는 칠선골 부럽지 않다는 듯 반짝인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줄기는 소에 들어가 휘감기다 다시 크고 작은 턱을 넘으며 포말을 일으킨다. 그러다 좁은 협곡 사이 담에 잠겨 평정을 되찾는다. 골짜기는 저녁 햇살이 넘어가기 전 절정의 풍광을 보여주려 안간힘을 다했다.

 옛날 고승이 불자들의 애환을 달래기 위해 제를 올렸다는 제승대(祭僧臺)를 지나 고운 옥빛 계류에 취해 대웅교와 옥류교에 이어 명선교를 건너고 병풍소를 지나친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병풍소는 이제 기암절벽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들이고 있다. 뱀사골만이 아니라 삼라만상을 다 받아들일 기세다. 조망대 벤치에 앉아 병풍소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본다. 깊고 웅장한 골짜기는 사람을 쉽사리 내보내려 하지 않는다. 버스시각에 맞춰 하산하려는 등산객들이 잰걸음으로 지나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칠선골은 9,10월 가을철에 예약 가이드제로 개방
뱀사골~세석대피소~한신골 잇는 산행 시도해볼만

칠선골 중단부의 비선담에서 천왕봉 구간은 2027년까지 생태계 보호와 계곡 오염 방지를 위해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지리산 관리소(소장 김성수)는 올해부터 내년 말까지 5~6월과 9~10월 넉 달간에 한해 탐방예약 가이드제를 시범 운행한 다음 이후 환경훼손여부에 따라 횟수를 조절할 계획이다.


▲ 뱀사골 병소.

내년 말까지는 1주당 4회 회당 40명의 탐방을 허용한다. 등행은 월·목요일에는 추성동에서 07:00 출발(천왕봉 15:00 도착)하며, 하행은 화·금요일 07:00 천왕봉에서 출발(추성주차장 14:00 도착)한다. 지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jiri.knps.or.kr) 참조. 공원탐방→칠선계곡 탐방 클릭. 단, 하행 참가자는 산행 전날 로타리대피소나 장터목대피소 이용을 사전 예약해야 한다.
전화 지리산 사무소 055-972-7771, 함양분소 055-962-5354.

지리산은 칠선골이 아니더라도 좋은 계곡이 많이 있다. 특히 취재팀이 하산길로 잡은 뱀사골은 계곡휴식년제 실시 이후 계곡물에 들어설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산길 대부분 계곡을 끼고 이어지므로 시원스런 계곡산행을 즐길 수 있다. 이 뱀사골과 한신골을 잇는다면 지리산 내에서 가장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계곡산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계곡의 자연미가 빼어나고 길면서도 계류를 수시로 건너면서 산행을 하기 때문에 계곡 풍광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뱀사골 산행은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반선에서 시작한다. 버스종점에서 와운교까지 2km 구간은 승용차도 통행이 가능하다. 와운교를 건너 오른쪽 계단길을 올라서면서 뱀사골 산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뱀사골은 계곡자연휴식년제가 시행되는 골짜기여서 탐방로를 벗어나 계곡으로 들어서는 것은 금지돼 있다. 그러나 숲길에서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맛도 좋은 데다 데크가 물가를 따라 설치돼 있고, 수시로 다리를 건너기 때문에 계곡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에는 큰 문제 없다.


▲ 뱀사골 초입의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등산인들. 계곡 휴식년제 시행으로 계류로 내려서는 것은 금지돼 있다.

요룡소, 뱀소, 병소, 병풍소, 간장소로 이어지는 뱀사골은 유유교를 건너면서 서서히 좁아지고, 이끼 낀 바윗덩이가 뒤엉킨 골짜기로 바뀌다가 뱀사골대피소터로 올라선다. 뱀사골대피소는 현재 완전 철거된 상태다. 반선에서 약 4시간. 이후 주능선 상의 화개재까지는 가파른 계단길을 따라 200m쯤 오르면 된다.

화개재에서 세석까지는 약 14km로 7시간 정도 걸리며, 중간 숙박지로는 연하천대피소와 벽소령대피소가 있다. 반선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다면 세석대피소까지도 갈 수 있으나, 혹서기 때는 다른 계절에 비해 체력 소모가 심하므로 벽소령에서 하루 산행을 마치는 게 적당할 듯싶다. 주능선 상에서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연하천대피소, 벽소령대피소, 선비샘(벽소령 2.4km, 세석 3.9km), 세석대피소 등이다.




세석대피소에서 한신계곡으로 내려서려면 촛대봉으로 향하다 첫 번째 갈림목(백무동 6.5km, 장터목 6.3km)에서 능선을 넘어서야 한다. 가내소폭포와 하동바위길 갈림목을 지나 탐방안내소까지 3시간 정도 걸린다.
▲ 쥐오줌풀.

교통

칠선골행과 백무동행은 함양, 뱀사골행은 남원에서 운행하는데, 모두 88고속도로 변의 인월을 경유한다.
서울→백무동 동서울터미널에서 백무동행 함양지리산고속버스(055-963-3745~6)를 타면 인월과 마천을 경유해 백무동까지 운행한다.
동서울터미널 출발시각 08:20, 10:30, 13:20, 15:20, 17:30, 19:00, 24:00(야간).
백무동 출발시각 07:20, 08:50, 11:30, 13:30, 14:50, 16:00, 18:00. 3시간50분 소요, 요금 19,800원, 야간 21,700원.
함양→추성동 시외버스정류장 앞 시내버스정류장에서 마천 경우 함양지리산고속 농어촌버스가 약 30분 간격(06:30~18:30) 운행. 약 1시간 소요, 요금 3,300원.
남원→뱀사골 공용버스터미널(063-633-1001)에서 1일 10회(07:30, 08:50, 10:41, 11:40, 12:10, 13:28, 15:45, 17:18, 18:30, 20:00) 운행. 약 1시간 소요, 요금 4,200원.
함양→백무동 시외버스터미널(055-963-3281)에서 1일 17회(07:00~18:30) 운행. 요금 3,300원.
※인월 시외버스정류장 전화 063-636-2000.

숙박

뱀사골 들머리인 반선과 한신골 초입인 백무동에는 민박집과 음식점이 많이 있다.
△뱀사골 거시기식당 063-626-3320, 와운 통나무산장 063-626-3791 △백무동 느티나무집(탐방지원센터 아래) 063-962-5345, 옛고을가든(주차장 위) 963-4037, 반달곰펜션(주차장 부근) 962-5353.


▲ 등산인들에게 편안한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세석대피소.
산행 중 묵을 만한 곳으로는 주능선 상의 연하천(063-625-1586), 벽소령(016-852-1426), 세석(011-1769-1601), 장터목(011-1767-1915) 등의 대피소가 있다.
연하천대피소는 5,000원, 다른 대피소는 7,000원씩 1일 숙박비를 받는다. 예약은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www.knps.or.kr)를 통해서만 받는다. 대피소에서는 햇반, 과자류, 음료수, 버너용 가스 등을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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