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사
석탑의 사연
국보 제86호인 경천사(敬天寺) 십층석탑이 오랜 방황을 끝내고 새로 지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안치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1348년(고려 충목왕 4년) 경기도 개풍군의 경천사에 세워졌던 이 탑은 왜정 때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탑이다.
이 탑은 일찍부터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탑신에 새겨진 보살(菩薩),
인물(人物), 초화(草花), 용(龍)의 모습이 아주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전등사지(傳燈寺志)’에 의하면 1924년경 서양인들이 이
탑에 대하여 900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당시 900만원이라면 엄청난 거액이다. 그만큼 예술적 가치가 높았던 탑이었던 것이다.
눈독을 들이던 일본 궁내부 대신 다나카(田中光顯)가 서울에 왔을 때 일본군과 상인 등
50여명을 시켜 야밤에 이 탑을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경천사 탑은 도쿄의 우에노(上野) 공원에 세워져 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경천사는 원(元)나라의 승상인 탈탈(脫脫)의 원찰(願刹)이었고, 이 탑도 탈탈 승상을 위하여
세운 탑이라고 나온다.
경천사 탑을 건립할 때 공사를 진두지휘한 사람은 고려의 강융(姜融:?~
1349)이었는데, 강융은 원나라에서 직접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공사를 하였다. 경천사가 원나라 승상의 원찰이었으므로 그 탑도 당시 최고급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강융이란 인물이 흥미롭다. 그는 할아버지가 진주의 관노였으며, 누이동생은
송악사(松岳祠)의 무당이었다. 고려 충렬왕과 충선왕을 둘러싼 파워게임이 치열할 때, 강융은 충선왕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공을 세웠다. 이후로 고속
승진을 하였고, 충숙왕 15년에는 만호를 거쳐서 좌정승이라는 높은 직위에 올랐다. 나중에는 진녕부원군(晉寧府院君)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이 같은
출세의 배경에는 강융의 딸이 탈탈 승상의 소실이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원나라의 정승인 탈탈이 뒤에서 강융을 지원하였을 것이고, 전후맥락을 감안하면 강융은
정치적 후원자인 탈탈에 대한 보답으로 경천사 석탑을 최대한 고급스럽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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