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사 석탑의 사연
 


▲ 조용헌
국보 제86호인 경천사(敬天寺) 십층석탑이 오랜 방황을 끝내고 새로 지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안치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1348년(고려 충목왕 4년) 경기도 개풍군의 경천사에 세워졌던 이 탑은 왜정 때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탑이다.
 
 이 탑은 일찍부터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탑신에 새겨진 보살(菩薩), 인물(人物), 초화(草花), 용(龍)의 모습이 아주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전등사지(傳燈寺志)’에 의하면 1924년경 서양인들이 이 탑에 대하여 900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당시 900만원이라면 엄청난 거액이다. 그만큼 예술적 가치가 높았던 탑이었던 것이다.
 
눈독을 들이던 일본 궁내부 대신 다나카(田中光顯)가 서울에 왔을 때 일본군과 상인 등 50여명을 시켜 야밤에 이 탑을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경천사 탑은 도쿄의 우에노(上野) 공원에 세워져 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경천사는 원(元)나라의 승상인 탈탈(脫脫)의 원찰(願刹)이었고, 이 탑도 탈탈 승상을 위하여 세운 탑이라고 나온다.
 
경천사 탑을 건립할 때 공사를 진두지휘한 사람은 고려의 강융(姜融:?~ 1349)이었는데, 강융은 원나라에서 직접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공사를 하였다. 경천사가 원나라 승상의 원찰이었으므로 그 탑도 당시 최고급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강융이란 인물이 흥미롭다. 그는 할아버지가 진주의 관노였으며, 누이동생은 송악사(松岳祠)의 무당이었다. 고려 충렬왕과 충선왕을 둘러싼 파워게임이 치열할 때, 강융은 충선왕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공을 세웠다. 이후로 고속 승진을 하였고, 충숙왕 15년에는 만호를 거쳐서 좌정승이라는 높은 직위에 올랐다. 나중에는 진녕부원군(晉寧府院君)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이 같은 출세의 배경에는 강융의 딸이 탈탈 승상의 소실이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원나라의 정승인 탈탈이 뒤에서 강융을 지원하였을 것이고, 전후맥락을 감안하면 강융은 정치적 후원자인 탈탈에 대한 보답으로 경천사 석탑을 최대한 고급스럽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경천사 10층 석탑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12월, 몇 명의 일본인들이 경기도 개성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진 부소산 기슭의 옛 절터로 향했다. ‘경천사(敬天寺)’라고 이름만 전할 뿐 지키는 스님도 없고, 건물 한 채 남아 있지 않은 폐허였다. 그 자리에 고려 충목왕 때(1348년) 세웠다는 높이 13.5m의 대리석 탑 하나가 서 있었다. 10층의 탑신(塔身) 곳곳에 새겨진 부처와 꽃 등의 조각이 일품이었다. 일인들은 마을 주민과 지방관리들을 총칼로 위협하며 며칠에 걸쳐 탑을 해체했다.
 

▶이를 진두지휘한 이는 당시 일본의 궁내대신(장관)이었던 다나카(田中光顯)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울에 와 “고종 황제께서 석탑을 기념으로 하사했다”는 거짓말을 하고 무뢰배들을 불러모았다. 분해된 석탑은 수십대의 달구지에 실려 야밤에 개성역까지 운반됐다. 일제 통치기간 동안 전국 산간 벽지의 절과 무덤에서 도자기 석탑 불상 범종 등이 참혹한 수난을 당했지만 10m가 넘는 석탑을 해체해 약탈해 간다는 발상은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인들 사이에서조차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여론에 밀려 조선총독부가 반환을 요구하고 나서자 다나카는 1918년 할 수 없이 반환을 결정했다. 석탑은 도쿄에 있는 그의 집 정원에 포장도 풀지 않은 채 보관돼 있었다. 서울로 되돌아왔을 때는 졸속 해체와 운반의 후유증으로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그 상태로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또다시 내버려져 40년을 지냈다.

▶정부는 1960년 석탑을 임시 복원해 국보 86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시멘트 접합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산성비에 오염된 탑신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이런 아픈 사연을 간직한 경천사 10층 석탑이 99년의 ‘유랑(流浪)’을 끝내고 안식처를 찾게 됐다. 문화재청이 10년에 걸친 석탑 복원작업을 완료, 3월 초 서울 용산에 짓고 있는 새 중앙박물관으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박물관에 수많은 귀중 문화재들이 있겠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의 새 출발을 알리는 상징물로 경천사 10층 석탑만한 것이 있을까. 50년 넘게 덕수궁 석조전,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 등을 전전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번듯한 새 건물을 갖게 된 박물관이 걸어온 길과 경천사 석탑의 운명은 닮은꼴이다. 석탑이 서는 곳이 일제 무단 통치의 손발 노릇을 한 조선주둔군사령부가 있던 자리라는 사실이 감회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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