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석대 정상에서 잡목을 헤치고 직진하려다, 그냥 돌아서 우회길을 택한다[노고단에서 시작할 경우 진행 방향 왼쪽]. 길은 기억대로 아주 좋다. 조금만 가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은 우번암(종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건물)으로 가는 것 같고. 원사봉 능선은 좌측, 표지기가 덕지덕지 붙은 곳으로 내려서면 된다. 이때부터는 잡목이 제법 많다. 땀이 삐질삐질 흐르지만 차마 남방셔츠를 벗을 수가 없다. 아니 손목을 핥는 잡목 때문에 장갑까지 꼈으니까.
쓰러진 나무를 넘고 잡목을 헤치다 앞쪽에서 걸어오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남자 셋인데 등산객은 아니고. 손에 물통을 들고 있는 걸 보아선 고로쇠 채취 때문에 오신 것 같다. 길도 없는 곳을 아가씨 혼자 어떻게 갈 거냐며 걱정이 대단하시다. 후후... 그분들과 헤어지고 곧 1008봉 정상에 닿는다. 이곳은 지난 5월 산행 때도 우리 일행이 쉬었던 곳이다. 종석대에서 약 1시간... 노고단으로 향하는 능선이 뚜렷하게 보이고 발 아래 화엄사 계곡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덧입은 바지 중 하나와 양말을 벗고 노고단에서 떠온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인다. 저 멀리 연기암과 그 뒤쪽으로 밀려나 있는 화엄사 전경이 보인다.
1008봉에서 약 20분만 내려서면 연기암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표지기가 붙어 있다. 그때는 저쪽으로 하산했는데... 오늘은 시간도 많고... 초행지에 대한 기대도 있어, 직진이다. 길은 오히려 이제부터 좋아진다.
전날 화엄사 계곡으로 올라오며 보았던 푸른 봉우리의 신비 속으로 들어서는 셈이다. 아직은 3월 중순인데도 왜 저 봉우리만 유독 초록색인가에 대해... 소나무 탓이려니 생각은 했지만. 연기암 갈림길부터 이어진 능선길은 마치 소나무 숲의 오솔길처럼 오롯하다. 따스한 햇살에 소나무에서 뿜어져나오는 향긋한 내음까지... 중간중간 몇 개의 봉우리를 넘긴 하지만 큰 오르막은 없었다.
진행 방향 오른쪽으로 무덤을 지나고 몇 분 걷자, 갈림길을 만난다. 우측은 내리막이고 좌측은 오르막이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려다, 혹시나 하여 왼쪽으로 올라가본다. 그쪽으로 예의 오솔길이 잘 나있다. 정말 이상하군. 배낭을 내려놓고 지도를 본다. 오른쪽은 수한리로 빠지는 길 같다. 어디선가 윗길을 놓쳤다. 화엄사 방향으로 갈 것이기에 그쪽 길을 포기하고 좌측으로 붙지만 어느 지점에서 갈림길로 들어섰는지 알 수가 없다. 언젠가 C님의 산행기에서 길을 익히기 위해 두어 번 왕복했다는 글을 읽었는데... 어차피 기차 시간까지 여유도 있고 일행도 없어, 나도 그곳에 배낭을 내려두고 갈림길의 처음을 찾기 위해 거슬러 가본다. 얼마 안가 갈림길을 만난다. 화엄사 방향은 나무기둥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우측에 노란색 표지기가 붙어 있다. 표지기를 따라 걷느라 그쪽으로 내려선 모양이다. 배낭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오솔길을 따라 진행한다.
얼마전 신문 보도를 통해, 한 100년 쯤 뒤엔 우리나라에서 소나무가 사라질 거란 기사를 읽었는데, 그때 이 길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정말 그런 끔찍한 세상이 오는 걸까...
자신들의 어두운 미래에 대해 아랑곳 없이, 지금 지리산 원사봉 능선의 소나무는 푸르다. 중간중간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어 피어 있다. 아스라하게 차량의 소음과 엠프에서 쏟아지는 유행가 소리가 들려온다. 하산 지점부터는 특별한 길이 없지만 아래로 화엄사 상가단지와 도로가 가깝게 보이므로 아무 곳이나 내려서면 될 것 같다. 나는 식당가쪽으로 내려선다.
무덤이 보이고. 무덤을 시나 시멘트 길을 10여 미터 내려가면 도로 건너 곧바로 주차장이다. 종석대를 출발한지 3시간 10분... 화엄사부터 이어진 지루한 아스팔트를 걸을 일도 없이 산행은 정말 딱- 주차장 앞에서 끝을 맺는다.
우번암으로 들어서니 스님이 한 등산객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슬그머니 그 틈에 끼어서 점심을
먹는데 스님이 김치와 깻잎반찬을 내 오신다. 식후에는 스님께서 꿀단지와 매실원액을 병채로 들고 나오신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스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우번암을 몇차례 지나 다녔지만 스님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늘
빈암자의 대나무평상에 앉아 차도 달여 마시고 낮잠도 자곤 했었다. 이 암자에서 24년을 사셨다는 스님은 예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젊으시다.
스님, 법당에 좀 들어가도 될까요?
스님께서는 누추한 법당에는 무엇하러 들어가려고 하시더니,
법당은
공양간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일러주신다.
그렇게해서 토굴같은 법당에서 부처님을 뵈오니 그 감회가 특별하다.
알고보니
스님은 사진작가시란다. 오늘은 좋은 인연을 만났으니 그냥 보낼 수 있겠나며 법당으로 들어가시더니 금낭화를 찍은 작품사진을 꺼내 오신다. 스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종석대를 오른다. 종석대는 지리산 10대 중의 하나이다.
억새꽃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종석대에 오르니 시계가 막힘이 없어 조망이 무한하게 펼쳐진다. 노고운해요, 반야낙조라지만 종석대에서 바라보는 운해와 낙조도 지리10경이라는
그것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서 계셨다는 전설의 자리인 종석대 바위위에 앉아 금강경을 독송하니, 극락도
지옥도 다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일 뿐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선계라는 생각이 든다.
종석대에서는 조선시대의 학자인 눌재
양선지의 시 한수를 감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지리산 우뚝 솟아 하늘 높이 뻗었는데
천 골짝 폭포에서
물연기가 자욱인다.
어화 저 청학이 아마도 날 속인다.
어이한 종소리는 이곳까지 들려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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