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와 유래

의미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백두산에서 비롯된 큰 산줄기’라는 뜻으로 백두산에서 시작해서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중심 산줄기입니다.
백두대간은 산줄기, 물줄기의 모양과 방향을 기초로 구분한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인식체계로, 지난 1000년 동안 사용해온 개념입니다. 나무의 뿌리와 가지, 줄기가 하나인 것처럼 백두대간은 1400km를 한번도 잘리지 않고 연속되어 국토의 등뼈를 이루며, 14개의 큰 산줄기와 수많은 작은 산줄기로 나뉩니다.
백두대간은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가르지 않는다’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를 따릅니다. 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강은 산에서 샘솟고 그 물은 결코 산허리를 자르지 않으며, 백두대간은 우리나라 모든 강의 발원지입니다.
다시 말해 백두대간은 국토를 남북으로 내닫는 대동맥이며, 동해를 흐르는 물과 서해로 흐르는 물을 갈라놓는 대분수령이며, 한반도의 인문 ․ 사회 ․ 문화 ․ 역사의 기반이며,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중심축을 이루는 대표 산줄기 입니다.

가장 좁은 의미의 백두대간 - 종주산행의 노선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지도상의 거리로 백두대간은 1625km에 달하며, 남한의 백두대간은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약 690km에 이르는 산줄기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백두대간의 개념은 ‘종주산행노선’의 의미로 가장 좁은 의미를 갖습니다. 이 의미의 백두대간은 종적(縱的
)인 개념만 가질 뿐, 횡적(橫的)인 개념을 내포하지 않고 있어 넓이나 규모로는 생각할 수 없어 산지의 지리적 범위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좁은 의미의 백두대간 - 중심 산줄기
백두산을 뿌리로 하여 원산~낭림산~두류산~분수령~금강산~오대산~태백산~속리산~장안산~지리산에 이르면서 한번도 물줄기에 의해 잘리지 않고 이어져 내리는 큰 산줄기를 의미합니다. 이때의 백두대간은 단일한 산줄기로서 ‘백두대간’이라는 고유 명사를 가지게 되는 ‘연속된 산지체계’입니다. 정간과 정맥, 작은 갈래는 제외한 중심산줄기의 대표성을 가지며 나무에서 모든 줄기와 곁가지를 잘라내고 남은 기둥줄기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 의미의 백두대간에서는 백두대간의 지리적 ․ 공간적 실체와 특성이 잘 드러납니다.

넓은 의미의 백두대간 - 중심산줄기와 부속 산지
넓은 의미의 백두대간은 중심산줄기와 이에 부속된 기맥 또는 지맥을 모두 포함합니다. 백두대간에서 정간과 정맥이 갈라져 나가듯 정간과 정맥에서도 수많은 갈래가 나뉘어 뻗으며, 백두대간에서도 수많은 갈래가 뻗어 나갑니다. 넓은 의미의 백두대간은 나무에서 굵은 줄기만을 잘라내고 기둥줄기에 붙은 곁줄기와 곁가지를 모두 남겨둔 모양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때는 정맥에 준하는 규모의 산줄기와 함께 수많은 작은 갈래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단일한 산줄기로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넓은 의미의 백두대간 - 전통적 국토지리 인식체계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이 땅을 산과 강이 어우러져 있는 유기체로 여겨 산의 흐름을 살아있는 나무에 비유, 기둥줄기와 큰 줄기, 그리고 작은 줄기와 곁가지로 나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 줄기와 줄기사이, 가지와 가지 사이에 강이 생성되어 흐르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국토’를 다르게 표현할 때는 산천(山川), 산수(山水), 산하(山河), 강산(江山) 등으로 산과 물을 함께 일컬어 나타내었습니다. 이때의 백두대간은 나무의 큰 기둥줄기, 작은 줄기, 곁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물줄기도 포함하여 국토전체를 의미합니다.



유래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큰 산줄기’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백두대간이라는 명칭에는 백두산을 국토 산천의 출발지로 보는 시각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비한 존재 백두산
백두산은 태백산(太白山), 장백산(長白山), 불함산(不咸山)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에 실린 단군신화의 배경인 태백산이 백두산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백두산을 신성시한 것은 고조선 시대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인들에게 하늘 높이 솟은 백두산은 신성한 존재였으며 숭앙의 대상이었다. 통치자는 국민을 설득하고 통합할 수 있는 상징적 존재로 백두산을 내세웠고, 관료(官僚)와 사가(史家)들은 나라를 세운 인물을 신성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통치자의 탄생을 백두산과 관련짓기도 했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세계」(高麗世系)에는, 고려 제18대 의종(毅宗) 때 학자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 전하지 않음)에서, 조사(祖師) 도선(道詵, 827~898)이 곡령(鵠嶺, 개성의 옛 이름)에 와서 이르기를 “이 땅의 지맥은 북방[壬方] 백두산으로부터 물[水]의 근원[根]이요 나무[木]의 줄기[幹]가 되어 내려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이 되었으며…… 명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에게 왕건(王建)이라고 이름을 지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왕건의 탄생 설화를 인용하고 있고,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는 같은 내용을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의 학자 김구용(金九容)의 『주관육익』(周官六翼)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우리나라의 지리를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로 나타낸 것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공민왕 6년(1357)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필흥(于必興)이 왕에게 상소한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옥룡기』(玉龍記, 도선의 비기, 전하지 않음)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는 물의 근원이요 나무의 줄기와 같은 땅이라……’ 하였습니다.”라고 하여, 직접 이름을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지세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난다고 한 내용은 ‘백두대간’과 같다. 이 내용은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도 인용되어 있다.
그리고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의 서문에는 “우리나라의 지세를 살펴보면 장백산(백두산)이 만리를 뻗어 기복(起伏)을 이루어 마천령, 마운령, 철령,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이 되고, 경상도 경계에 이르러 멈추어 태백산과 소백산이 되었다. 빙 돌아서 속리산, 지리산이 되었으나 바다가 곁에 있어 넘지를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백두대간"이란 용어가 나타나다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이익(李瀷, 1681~1763)이다. 그는 『성호사설』 권1 「천지문」(天地門) 편의 「백두정간」(白頭正幹)이라는 제목 아래 본문에서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곧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다. …… 철령으로부터 태백산 소백산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닿도록 높이 치솟았으니 이것이 곧 정간(正幹)이다. …… 그 왼쪽 줄기는 동해를 끼고서 뭉쳐 있는데, 하나의 큰 바다와 백두대간(白頭大幹)은 그 시종을 같이 하였다. …… 대개 한 줄기 곧은 대간(大幹)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서 중봉을 이루고 지리산에서 끝났으니, 당초 백두정간이라고 이름지은 것이 뜻이 있어서인 듯하다. ……”라고 하였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쓴 『택리지』(擇里志, 1751)의 「산수」(山水) 편에는 ‘백두대맥’(白頭大脈), ‘백두남맥’(白頭南脈), ‘대간’(大幹) 등의 표현이 보이고, 당시까지 부분적으로 논의되던 것과 달리 전국에 걸친 산줄기의 흐름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대동수경』(大東水經, 1814, 순조 14년)에서 백두산을 두고 “팔도의 모든 산이 다 이 산에서 일어났으니 이 산은 곧 우리나라 산악의 조종(祖宗)이다.”라고 하였고, ‘백산대간’(白山大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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