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새우젓과 대하(충남 광천)    2. 해오름예술촌·공룡발자국·물건방조어부림(경남남해)    3.고흥 적대봉(전남)    4.강촌(춘천)    5.봉화의 삼사(三寺) 각화사, 축서사, 청량사(경북)    6.봉평 오일장(강원)    7.섬진강(전남곡성)    8.함평 龍泉寺(전남)    9.전북 무주 방재·벌한마을     10.지리산    11.변산반도 일주    12.전남 순창 둘러보기    13.남덕유산(전북무주)    14.화순 쌍봉사 철감선사부도     15.순창 강천산    16.청산도(완도)    17.완주 화암사    18.전남 완도    19.월출산    20.남원 주촌리에서 월경산 중재까지    21.서동왕자와 백제 미륵사지가 있는 익산    22.진도    23.낙안읍성 민속마을    24.진안 마이산    25.화순 운주사    26.남해 거문도    27.강진 다산초당    28.마을 따라서 떠나는 흑산도 여행    29.담양호    30.홍도    31.순천만 초구    32.선유도    33.순천 선암사    34.담양 금성산성    35.여수 사도    36.

1.광천의 토굴 새우젓과 남당리 대하 축제
삼삼한 새우젓이 토굴 속에서 숨을 쉬네
이달 초 계획해 두었던 강원도 여행은 현석이가 아파서 떠나지 못했고, 그 후 두 주는 주말마다 비가 내려 집을 나서지 못했다. 여행을 떠나지 못해 근질거리는 몸을 달래기 위해 찾은 곳이 ‘충남 광천’이다. 광천은 새우젓 장터 풍경과 토굴 새우젓, 그리고 대하와 전어 등 먹을거리가 풍부한 남당리가 있는 아름다운 곳이기도 했다.
글·사진 구동관(충청남도 농업기술원)
아이들에게 광천 여행 계획을 이야기 했다. “새우젓이 유명한 곳이네?” 현석이가 아는 체를 했다. “새우젓은 오월에 담근 오젓과 유월의 담근 육젓이 있고, 가을에 담은 추젓이 있어….” 다솜이가 한술 더 떴다. 아빠, 엄마의 기억에는 가물가물한 새우젓의 종류를 줄줄 꿰고 있었다. “현석이, 다솜이 대단한데…. 새우젓에 대해 엄마, 아빠보다 훨씬 더 많이 아는 구나?”
아이들은 새우젓에 대해 교과서에서 배웠다고 했다. 더욱이 초등학교 3학년인 다솜이는 배운지 보름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단다. 광천 여행은 아이들의 학습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 연휴 첫날인 일요일. 느긋한 일정으로 광천을 찾았다. 먼저 들린 곳이 새우젓 시장. 추석을 코 앞에 둔 시골 장터의 모습에는 활기가 넘쳤다. ‘있을 건 다 있고, 없는 것은 없는’ 시골장터 풍경은 마음이 넉넉해지는 풍경이기도 하다. 여기저기 손님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다양하게 들려왔다. 막 흥정을 끝내고 덤을 더 가져가려고 주워 담는 모습도 정겹고, 셈이 틀렸다며 다투는 소리까지도 시끌시끌한 시골장의 활기를 더했다. 광천장은 새우젓으로 유명한 곳답게 새우젓 상점이 많았다.
광천에 왔으니 맛있는 새우젓을 사가는 것이 당연했지만, 새우젓은 토굴 새우젓 마을에서 사기로 했다. 대신 아내는 바닷가와 가까운 곳이라 물이 좋아 보인다며 생선을 살 생각을 했다.
“가격 좀 알아볼까?”라며 갈치 값을 물어본 아내에게, 생선 가게 아주머니는 싸게 잘해 주겠다며 덜컥 갈치 목을 잘라버렸다. 그 아주머니 때문에 여러 집이 나눠 먹을 만큼 갈치를 사고 말았다. 아내는 도시에서보다 싸게 잘 샀다며 꽤 만족해했다.

장터에서 빠져나와 토굴 새우젓 마을을 찾았다. 국도변에 새우젓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그곳의 새우젓 가게들은 대부분 각자의 토굴을 가지고 있지만, 그 토굴들이 일반에게 개방되는 것은 아니었다. 몇 집을 소수문하여 인심 좋게 생긴 새우젓 집의 토굴을 구경할 수 있었다. 새우젓 토굴은 상점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뒷골목의 언덕배기에 있었다. 사람들이 사는 집과 접해 있는 곳에 토굴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토굴이 교과서에 나온 것 같아.” 주인의 안내로 토굴을 들어서던 다솜이가 이야기 한다. 안내하는 분께 여쭤보니 교과서에 나온 바로 그 집이란다. 다솜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토굴은 좁고, 어두웠다. 단단한 바위를 뚫어 만든 길들이 여러 갈래로 나눠지고, 다시 만나 이어져 있었다. 그 토굴은 사람들이 파서 만든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아이들은 신기해 했다.
토굴 속이 서늘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굴속의 온도는 늘 15°C 정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고 했다. 새우젓의 발효에 최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새우에 15% 정도의 천일염을 섞어 항아리에 켜켜이 쌓아 3개월 정도 숙성시키면 새우젓이 되는데, 토굴이 숙성에 좋은 온도를 유지해서 맛있는 새우젓이 된다고 했다. 토굴에서 나와 새우젓 중에 가장 맛이 좋지만, 양이 많지 않아 귀하다는 ‘육젓’을 샀다.
토굴 구경을 한 뒤 남당리로 차를 돌렸다. 남당리는 대하축제 때문에 간이식당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가격은 못 깎아줘도, 양을 푸짐하게 주겠다”며 우리 가족을 유혹했다. 식사는 조금 미뤄두고 포구를 먼저 찾았다. 가만 보니 간이 방조제에서 낚시꾼들이 망둥어를 낚고 있었다. 낚시꾼들의 가방마다 한 뼘쯤 되는 망둥어들이 여러 마리씩 잡혀 있었다. 몇 해 전 당진 여행때 망둥어를 잡았던 현석이는 그때를 그리워했다. 아이들에게도 여행은 언제나 진한 추억을 남긴다.
천수만을 사이에 두고, 안면도와 마주하고 있는 홍성군 서부면 남당리는 대하, 새조개, 쭈꾸미 등 해산물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산지에서 맛보는 해산물이 싱싱하여 맛이 좋은 것은 당연하지만, 더욱이 그런 해산물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닷가의 간이 천막들이어서 운치가 있다. 바다 위에 지어진 천막에 앉아 있으려니 바닷물이 빠지고 들어오며 철썩 철썩 파도소리를 들려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대하를 먹었다. 대하를 먹는 동안 전어구이가 서비스로 나왔다. 담백하고 구수한 맛. 가을 바다를 맛보는 느낌이었다.
대하를 먹고 남당리를 빠져 나오다가 마을 귀퉁이, 한적한 바다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그 도로는 비포장도로여서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잔잔한 물결이 밀려오고 있는 그 갯벌은 대하축제장의 혼란스런 분위기와 상반된, 고즈넉한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그곳에 배 한척이 누워있었다. 문득, 나도 그 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비스듬히 누워 한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그런 배가 되고 싶었다. 잔잔한 파도소리, 자유롭게 나는 새들의 소리를 한참동안 마음에 새겼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홍성군과 보령시의 경계지점에 자리한 홍성·보령 방조제 기념탑에 들렀다. 방조제 공사를 하기 전에는 섬이었을 그곳은 주변 전망을 둘러보기에 최적의 장소다. 조금 전 다녀왔던 홍성 남당리 모습과 굴 구이로 유명한 보령 천북 포구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천수만을 넘어 안면도가 아스라이 보인다.
해가 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가는 길
●자가용
(광천)서해안고속도로 광천 IC를 이용.
(남당리)서울 ☞ 천안 IC(경부고속도로) ☞ 홍성(국도21번) ☞ 갈산(국도29번) ☞ 군도614번 ☞ 남당항
●대중교통
(광천) 장항선 광천역 하차
(남당리) 장한선 홍성역 하차
버스 : 홍성터미널에서 남당리행 버스가 약 1시간마다 운행

2.해오름예술촌·공룡발자국·물건방조어부림…
아침부터 내리는 비와 잔뜩 찌푸린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태풍 속보를 들으며 이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과연 잘한 결정인가 하는 걱정도 든다. 그러나 한 달 전부터 준비해온 남해 여행이다. 아내와 아이의 기대가 무척 크다. 제발 태풍이 비켜가길 바라며 기나긴 여정에 올랐다.
글·사진 박우섭
우리 가족의 여행패턴은 휴양림 한곳을 숙박지로 정해 놓고 휴양림 반경 50km에 있는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다만 서로의 목적이 달라 매번 여행지를 정하는데 있어 약간의 실랑이가 있는데, 얼마전부터 사진에 취미를 붙인 나는 사진 찍기 좋은 곳을 선호하고, 아이의 경우는 어디든지 간에 무조건 뛰어놀기 좋은 곳을, 그리고 아내는 이곳저곳 되도록 많은 곳을 둘러보는데 목적이 있기에 다수결에 의해 여행지를 정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다. 항상 그렇듯 아내의 파워에 밀려 이번에도 역시 국토순례대장정을 방불케하는 빡빡한 일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쏟아지는 폭풍우를 뚫고 마침내 남해 편백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나니 벌써 시간은 5시를 훌쩍 넘겼다. 다행히 남해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 아내가 서둘러 간단한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8시간을 넘게 차를 타고 오느라 지친 아이에게 바람이라도 쐬어줄 겸 숲 속의 집 근처를 가볍게 산책했다. 아이는 일단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잔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즐거워한다. 오늘은 일찍 자야만 내일부터 시작되는 강행군에 낙오하지 않을 수 있다.
새벽녘이 되자 유리창이 날아갈까 걱정될 정도로 심한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내일 관광이 어찌될까하는 걱정보다 오늘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잠을 설쳤다.
안개 낀 보리암 짧은 산행
다음날 다행히도 비가 그쳤다. 아직도 하늘은 잔뜩 찌푸린 채 맑아질 기미도 안보이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첫번째 목적지인 보리암으로 향했다.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보리암에 오르는 길이 꽤 험하다고 했다. 입구에서 공익요원에게 걱정스레 물어보니 약올리듯 웃으며 잘만 하면 타이어 타는 냄새 안나고 다녀올 수 있다고 한다. 헉, 보리암 오르는 길은 정말 험했다. 뒷좌석에 앉은 아이는 차가 뒤집어지네 마네 하며 호들갑에 난리가 났다.
정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주차하고 대략 2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면 보리암이 나온다. 아이에게도 그다지 힘들지 않은 코스. 그런데 올라가면서 이미 보리암을 보고 내려오시는 분들께 물어보니 안개가 심해서 바다는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긴 산에 오르면서도 시야는 10m도 채 되지 않는 짙은 안개 속이다.
사진 촬영은 포기해야 하나보다며 한참을 투덜대며 올라갔는데, 다행히도 심한 안개는 걷혔다. 먹구름과 안개가 뒤섞여 감동을 줄 만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제법 바다와 인근 마을도 보인다. 날씨가 맑을 때 온다면 남해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런 곳일 듯 싶다. 누가 특별히 강요한 것도 아닌데도 아이는 절에 오면 항상 불상 앞에서 삼배를 드린다. 뭘 알아서 그러는 것은 아닌듯 싶고 아마도 예전에 할머니를 따라 몇 번 절에 다녀온 뒤부터 절에 오면 으레 그래야만 하는걸로 생각하는 듯 싶다.
자동차에서 타는 냄새 별로 안나고 무사히 보리암에서 내려왔다. 산행이라고 하기엔 걸어서 오른 거리가 좀 짧긴 했지만 어쨌거나 늘 산을 오를 때면 아이와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곤 한다. 힘들다, 내려가자, 업어줘(헉, 이녀석 자기가 얼마나 무거워졌는데?).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긴 하겠지만 내 경우엔 어릴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등산을 다녔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보이스카웃 활동을 하며 야영을 많이 해서인지 바다보다는 산을 더 좋아하는데 이 녀석은 나와는 정 반대다. 한두 번을 제외하곤 산에만 가면 머리가 아프네 졸리네 핑계를 대며 중도 하산하기 일쑤였다. 이번 가을 예정된 억새 산행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사진 찍기 참 좋은 곳인데….

그 때 그 시절이 생각나는 해오름예술촌
하룻밤을 더 보냈지만 역시 날씨는 흐리다. 아이는 아침부터 해수욕장을 다시 가자고 떼를 쓰지만 날씨도 흐린데다 비가 내린 후로는 기온도 뚝 떨어졌다. 오후에 날씨 봐서 가보자고 달래며 약간의 협박도 곁들여서야 겨우 오늘 일정에 올랐다. 첫번째 목적지는 해오름예술촌. 2층짜리 자그마한 폐교를 개조해서 1층에는 개인이 하나 둘 모아둔 골동품들(개인이 이렇게 많이 모아놓다니!!)을 전시해 놓고 2층에는 일정 기간마다 다른 예술품을 전시해 놓는 그런 곳이다.
1층엔 7~80년대의 교실풍경과 아이스께끼통, 조개탄 난로와 그 위에 올려진 양철도시락 등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물건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어 유년시절의 추억에 빠져든 아빠 엄마를 아이처럼 들뜨게 만들었다. 야호, 엄마 아빠 신났다!
“재경아 옛날엔 말야 저 통에다가 드라이아이스가 든 고무주머니를 넣어놓고 아이스크림 팔았다?” “옛날엔 저기에다가 석탄 넣고 불피웠거든. 난로란건데. 저 위에 올려놓은게 도시락이야 도시락~ 야, 저거 좋은 자리에 올려놓으려구 얼마나 치열했는데. 응? 아 저기 제일 밑에 도시락 놔두면 너무 뜨거워서 밥이 다 누룽지가 돼버렸거든!”
그랬다. 그때 그 시절엔 그렇게들 살았다. 지금처럼 쾌적하고 풍족한 그런 삶은 아니었지만, 지금보다 더 인간냄새 나는, 그래서 떠올려도 떠올려도 유쾌하기만 한 엄마아빠의 소중한 어릴적 이야기.
그런데, 흥분해서 한참을 떠들다보니 뭔가 좀 이상하다. 목적과는 달리 이 녀석은 그저 처음 보는 물건에 대해 신기해할 뿐. 겪어보지 못한 그 시절의 얘기가 그다지 와 닿지는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이녀석은 마당 한구석에서 키우는 송아지만한 말라뮤트에 더 관심이 많다. 엄마 아빠의 표현력 부족일까? 아니면 아직은 ‘향수’나 ‘추억’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엔 아이가 너무 어린 것일까?
음… 이번 스케줄은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뭐 아님 말고, 우리 가족은 여행에 뭐 아이의 교육이니 이런 거창한 목적을 두진 않는다. 비록 세 명뿐이긴 하지만 우리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라도 만족한다면 그걸로 다행인 게다.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 이건 꼭 영화 ‘삼총사’에만 나오는 대사는 아니다!
해오름예술촌에서 나온 후 이어진 강행군. 해일을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천연기념물 물건방조어부림, 아이가 좋아하리라 생각하며 찾아간 가인리 공룡발자국 등 꽤나 여러 군데를 다녀봤지만 아이의 만족도는 영 오를 줄을 모른다. 그래, 이런 게 바로 눈높이 교육의 필요성이구나 라는 것만 절실히 느끼고 하루 일정을 마쳤다.
역시 아이들에게는 맘껏 뛰어 노는 것 이상은 없는 듯하다.

3.넉넉한 바다의 인심을 닮은 산
고흥 적대봉
바다와 섬과 산, 그리고 넉넉한 인심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가을 산행을 맛보았다. 거금도 적대봉. 억새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누워있는 소같이 순한 산이다.
글·사진 한결가족
“꼭 그 산을 닮았네요.”
“으응, 어느 산?”
“있잖아요, 여기 능선처럼 생겨 꽃이 잔뜩 피었던 산이요.”
“아아, 영취산?”
산을 타는 기회가 늘다보니 한결이도 이젠 제법 보이나 보다. 정말 그랬다, 능선 따라 손짓하는 억새들의 모습은 여수 영취산의 진달래 군락지 모습과 참 많이 닮았다. 진달래만 억새들로 바꾸어 놓은 듯하다. 들꽃, 맹감, 억새, 저수지, 산, 바다 등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참으로 푸근한 산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길에 들어선 지 30분 정도 지나자 이내 발걸음이 여유로워진다. 그저 앞만 보고 숲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경사진 바윗길을 기어가는 것도 아닌, 몇 걸음 떼다 뒤를 돌아보고 바다에서 올라오는 바람에 얼굴을 맡기는, 그런 해찰을 부리건만 저 앞쪽엔 벌써 정상이 얼굴을 내밀고 우릴 부른다. 그것도 완만한 능선을 따라 온통 억새가 일렁거리는.
오늘 우리가족 셋을 품어준 산은 고흥에 있는 ‘적대봉’이다. 물론 섬에 있는 산이기 때문에 하룻밤은 섬에서 잤다. 어제 소중한 ‘인연’의 한 자락을 잡고 이 섬을 찾는 길은 어쩐지 친근하고 정겨웠다. 그저 둘러보기가 아닌 진짜 ‘사람내음’을 맡을 수 있을 거라는 설렘에 하늘까지도 쪽빛과 일렁이는 햇살을 더해준 길이었다. 광주에서 화순, 보성의 조성을 지나 고흥으로 향하는 길, 억새는 절정에 이르렀고 논은 마지막 알곡을 벗어놓느라 힘겨워하고 있었다. 가을은 여물대로 여물어 꺾이기 직전이었다.
적대봉을 안은 ‘거금도’, 고흥군 금산도로 불리는 섬. 우리는 ‘녹동항’에서 배에 승용차를 실었다. 배가 출발하는데도 승객들은 자리에 앉을 생각도 없이 갑판에서 서성이는 걸 보고 한달음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짐작했다.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저기”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정말 엎드리면 코 닿을 수 있을 만한 곳에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항구를 떠난 배는 채 20분도 못 되어 ‘신평선착장’에 도착했다. 30분 간격으로 ‘금전선착장’에 번갈아 배를 대는데 시골버스가 기다리고 있고 사람들은 서둘러 자기 갈 길을 갔다. 숙박업소보다 민박을 좋아하는 우리는 인연이 닿은 복으로, 9대째 토박이로 살고 있는 ‘오천 마을’의 김형남님 댁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분의 세세한 설명을 들으면서 섬 일주를 마치고, 그 집에서 특산물로 풍성한 저녁까지 잘 먹고 잠자리에 들었던 덕에 아침 산행이 상쾌할 밖에.
어제 오후 출발지를 미리 답사했기 때문에 성치마을로 곧장 들어서 산행의 출발점인 ‘파상재’에다 차를 주차시켰다. 그리고 여유로운 산행 시작. 산길은 잡목과 잡풀을 베어내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었다. 수고했을 사람들에게 절로 고마움이 우러난다. 적대봉 등산 계획은 지난 8월부터 세웠다. 면사무소에 부탁해 자료도 구하고 문의도 했더니. “지금은 산길에 가시덤불이 많으니 추석 쇠고 오면 다듬어져 고생이 덜 할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당연히 계획은 미뤄졌고, 약속은 지켜져 우리가족은 거금도 가을여행과 함께 이렇듯 편안한 적대봉을 찾게 된 것이다.
산길은 순했다. 경사는 제법 있지만, 그리 힘들어 할 일을 없을 듯하다. 지난 주 내내 단식을 했던 한결엄마가 조금 뒤처지기는 하지만, 아들 녀석은 다른 때보다 수월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섬 산의 가장 큰 매력인, 사방의 바다를 보는 재미 역시 똑 같다. 산등성이에 올라서지도 않았는데 고개만 돌리면 바로 바다가 펼쳐진다. 15분쯤 지나니 작은 샘터가 나온다. 아직 물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지만 플라스틱 병을 잘라 만들어 놓은 컵이 눈이 띈다. 정성을 들인 인정 많은 그 사람에게 또 고마움.
한결이는 넓은 바다를 보는 기념으로 폭죽 터트리자 한다. 각자 한방씩 쏘았다. 며칠 전 아내의 생일 때 선물 받은 케이크에 있었던 폭죽인데, 4개를 가지고 왔다. 정상에 오르면 나머지 두 개를 또 쏘기로 하고 다시 배낭을 맸다. 산에서는 ‘야호’조차 하지 않는 가족이지만, 한결이 기분을 맞추고 싶어 좀 무례한 짓을 했다. 기분은 더없이 상쾌하다.

샘터부터 경사는 약간 더 급해지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다. 빨갛게 익어 가는 길옆의 맹감을 따먹고 구절초 같은 가을 들꽃들이 앙증맞은 모습을 보일 때마다 다리를 구부리고 들여다보며 발길을 떼는데, 다시 15분도 못돼 억새가 한없이 펼쳐진 능선삼거리에 다다랐다. 가슴께까지 닿는 억새는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일렁였다. 그 너머로 펼쳐진 남해바다는 눈이 부실 정도이고 반대쪽 바다 건너에는 녹동항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있었다. 섬의 물을 책임질 거라는, 최근에 완공된 저수지가 산자락과 억새 사이로 이국적인 풍경마저 자아낸다. 오직 우리가족만이 정상으로 가는 길은 억새숲 사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당연히 ‘찰칵!’.
눈앞에 정상이 있는데 한결이가 어리광을 부릴 이유가 없다. 이제는 되레 누가 먼저 정상에 오를 수 있는지 내기를 하자 한다. “5학년쯤 되면 결이가 엄마 아빠보다 더 산을 잘 탈 것으로 생각했다”는 칭찬에 힘을 얻은 것인가, 내기를 신청하고는 앞장서서 달린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 갔다.
어린이들이 달리는 방법, 잘 알잖은가. 처음부터 온 힘을 다해 뛰다가 얼마 못가 지쳐버린다는 걸. 한결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처음엔 잘 달리더니 산길이라 그런지 얼마 가지 못해 헉헉거리는 숨을 견디지 못하고 멈춰 선다. 그래도 제법 달려서인지 뒤를 따라가던 우리도 숨은 찬다. 부러 앞장서려는 몸짓을 하니 소매를 잡고 매달린다. 그래도 정상은 자기가 먼저 밟아야 한다면서.
‘하하, 껄껄’ 웃으면서 행복이 이런 거지 싶은데, 그렇게 장난하다 보니 금방 거대한 봉수대가 있는 정상(592m). 이렇게 고생 없이 쉽게 올라온 산도 드물 것이다. 고흥군에서는 팔영산(608m) 다음으로 높은 산인지라 왜적의 침입 등 비상사태 때 신속하게 전달해 주는 봉수대가 들어섰던 것은 당연한 이치.
게다가 이곳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는 완도, 남쪽으로는 거문도, 동쪽으로는 여수 일원의 바다와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오니 이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을 터. 날씨만 좋으면 제주도까지 볼 수 있다는 이야기도 어제 들었다.
완도나 진도 바다와는 달리 바다들이 넓고 그래선지 양식장들의 크기도 대단하다. 날씨 덕인지 ‘청정바다’ 라는 말도 그대로다. 저 바다 덕에 거금도의 인심도 넉넉하기만 한 걸까?
봉수대는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것이라 한다. 둘레 약 34m, 직경 7m의 봉수대는 큰 돌들이 촘촘하게 쌓여 있어 웬만하면 허물어지지 않을 듯 싶었다. 돌탑을 쌓아 놓은 봉수대의 정상에 서니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라는 게 실감나고, 그 바다 사이사이의 섬들이 바로 잡힐 듯 가까이 자리 잡고 있다. 가지고 간 안내도를 앞에 놓고 눈앞의 산들을 맞춰보니 장흥의 천관산과 보성의 일림산도 지척이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약속대로 한결이와 폭죽을 한방씩 터뜨리며 자축했다.

가는길
●버스 : 강남고속터미널 - 고흥 녹동(항) - 거금도
●기차 : 전라호남선 - 순천(버스이용) - 고흥 녹동(항) - 거금도
●자동차 : 호남고속국도 - 남해고속국도 - 순천 - 벌교 - 고흥 녹동(항) - 거금도
배시간표 :
http://igoheung.go.kr

 

 

4.내 젊음의 사원 강촌
학창시절 지겹도록 찾아간 곳이 강촌이랍니다. 청량리에서 춘천행 통일호 열차에 몸을 싣고 무작정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80년대 암울한 시기. 몸과 마음이 지쳐 있을 때 마음의 안식처로 삼은 곳이 바로 강촌이었습니다.
글·사진 이종원 (객원기자)
강촌은 마음의 고향 같은 곳입니다. 젊은 날, 무슨 고민이 그리 많았고, 무엇에 그리 목말라 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단지 말없이 흘러가는 북한강을 바라보며 커다란 위안을 받은 것은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참 순수했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직장에 들어가서 또 한번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거침없이 앞만 보고 달렸는데 그만 승진시험에 떨어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일도 아닌데 제 자신이 그렇게 처량하고 초라해 보인 적도 없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저를 일으키며 아내가 데려간 곳 역시 강촌이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강가를 거닐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북한강은 제 옹졸함을 감싸주었습니다.
이번에 또 강촌을 가게 되었습니다. 북한강에 고민을 토로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찾아갔습니다. 건강하게 자란 우리 아이들에게 어머니 같은 북한강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강은 저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를 와락 안아 주었습니다. 아마 제 아이들도 힘겨울 때나 기쁠 때 강촌을 찾을 겁니다.
강촌은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리게 해주었답니다. 연애시절 저는 영어 학원에서 만난 아내와 함께 이곳 강촌을 찾았습니다. 저는 북한강을 바라보며 과감히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그 때의 설레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답니다. 춘천의 이름 모를 성당에 쳐들어가 신부님께 다짜고짜 ‘축복’을 해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신부님. 우린 6년 후에 결혼할 예정입니다. 아내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면 결혼 할 겁니다. 우리 둘을 위해 축복해주세요.”
신부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우리의 미래를 위해 기도해주셨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후 우린 “드디어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강촌은 아내를 주었고 자식을 둘씩이나 낳게 해준 저의 은인입니다.
사설이 좀 길었네요. 청량리에서 기차 타고 1시간여를 달리면 예쁘장한 강촌역이 나옵니다. 절벽아래 아스라이 걸쳐 있는 예쁜 역이 우리 가족을 맞이합니다. 역사 아래쪽은 예나 지금이나 북한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구곡폭포까지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지만 자전거 타고 올라가기를 권합니다. 워낙 자전거 대여하는 곳이 많아 잘만 얘기하면 싼값에 빌릴 수가 있지요. 주차도 무료로 해준답니다. 2인용 자전거를 타면 둘이 함께 페달을 밟으며 미래를 향해 내달릴 수 있답니다.
구곡폭포까지 가는 길은 아늑하고 아름답습니다. 누런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분홍빛 코스모스가 파란 하늘을 수놓고 있습니다. 빼곡한 잣나무 숲길은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습니다. 아홉 구비 물줄기가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고 해서 구곡폭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한여름에는 더위를 식히기 위한 인파로 가득하지만 요즈음은 한적하게 폭포를 감상할 수 있답니다. 한겨울에는 폭포가 꽁꽁 얼어 있어 얼음을 타고 오르는 빙벽의 모습은 장관이지요.
구곡폭포 위 문배마을까지 꼭 올라가십시오. 구곡폭포에서 30여분 정도 발품을 팔면 마을까지 갈 수 있지요. 등산로라기보다 한적한 트레킹 코스에 가깝습니다. 황톳길도 넓고 지그재그 소나무 숲길이 일품입니다. 둘째 성수도 엄마의 도움을 받지 않고 엉금엉금 올라갑니다. 아이가 부쩍 자랐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지요.
첫째 정수와 아빠는 먼저 ‘깔딱고개’에 도착하였습니다. 나무 의자에서 쉬면서 말했지요.
“정수야. 우린 토끼야. 저 거북이들 오기 전까지 여기서 낮잠이나 자자.”
“아빠. 난 똑똑한 토끼여서 잠이 없어.”
고개를 넘었더니 무진장 넓은 분지가 나오는 겁니다. 조그만 논도 있고 밭고랑도 보입니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많이 찾지만 한 때는 약초를 캐며 사는 오지였다고 합니다. 가을 내음 물씬 묻어나는 억새밭에 들어가서 사진 몇 컷 찍어 보세요.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겁니다. 마을엔 생태 연못도 있습니다. 구곡폭포에 물이 말라 버릴 경우 이곳에서 물을 내보낸다고 하더군요.
무엇보다 문배마을의 진수는 먹거리에 있습니다. 김가네, 신가네, 장씨네 등 친근감 있는 상호가 손짓을 합니다. 마을엔 10여 개의 식당이 있지요. 대부분 민박집과 겸하고 있습니다. 도토리묵과 토종닭, 순두부도 맛 볼 수 있지요.
시간이 여유롭다면 강촌역으로 다시 돌아와 삼악산 입구까지 걸어 보세요. 대략 20여분정도 걸릴 겁니다. 버스를 타고 가도 되지만 강을 따라 걷는 것도 운치 있습니다. 학창시절 제가 자주 거닐었던 길이랍니다. 북한강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다보면 어느덧 삼악산 입구에 도착해 있을 겁니다.
삼악산 정상까지 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산행하는데 만만치 않습니다. 등선폭포는 크지는 않지만 새악시처럼 예쁜 폭포랍니다. 한참 올라가면 작은 암자가 나오지요. 산사가 포근하게 느껴질 겁니다.
경강역은 아담한 역입니다. 영화 ‘편지’에서 박신양과 최진실이 처음 만났던 장소가 바로 경강역이지요. 역사에는 배우들의 손자국과 편지의 명장면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생각하며 철길을 거닐어보세요. 분명 영화 속 주인공이 될 겁니다.

가는 길
자가용 서울 ☞ 올림픽대로 ☞ 팔당대교를 지나 45번국도 ☞ 새터유원지에서 46번국도 이용 ☞ 청평 ☞ 가평 ☞ 강촌

대중교통
버스 : 상봉시외버스터미널 ☞ 강촌역 하차
기차 : 청량리 쮝 강촌역 하차(1시간 20분소요)

5.하늘 닿은 산에 물소리 흐르고
봉화의 삼사(三寺) 각화사, 축서사, 청량사
하늘은 푸르고 산은 하늘을 닮아 또한 푸르다. 더할 수 없는 가을의 청량함. 아쉬운 게 있다면 이 푸르름이 길지 않다는 것. 시작이다 싶으면 가을은 곧 겨울로 들어 낙엽을 떨구고 사라져 버린다.
글·사진 이현동(대구시 문화유산해설사)
각화사(覺華寺)는 태백산 능선의 해발 1천1백77m의 각화산 아래에 있는 절이다. 지금의 춘양고등학교 교정에 있던 ‘남화사’라는 절이 없어지고 그를 대신해 새로 지으면서 옛 절인 남화사를 생각한다는 의미로 각화사라고 했다. 절의 내력이 그러하다면 나는 무엇을 기억하며 절을 찾을까? 옛 애인…. 절에 오를수록 기억은 무거워지는데 걸음은 가볍다. 사랑보다 절이 더 좋은가!
각화사는 단촐하다. 종루인 월영루(月影樓)를 오르면 대웅전과 산령각 그리고 태백선원과 요사. 그래도 이 절에 보이는 것은 간단해도 숨어 흐르는 정신은 만만치 않다. 수행하기에 더없이 좋아 선승(禪僧)들이 즐겨 찾는 곳. 일반인들은 볼 게 없으면 찾지 않는다. 작년 여름 각화사의 스님들은 2시간만 자고 몇 개월을 참선만 했다. 선승의 진면목을 그때 보았지 않았던가! 다시 찾은 각화사는 그저 고요하기만 한데, 선은 고요한 가운데 물 흐르듯 안으로 흐른다. 하늘에 닿은 산사에 흐르는 물소리는 하늘에 닿을 듯 마음으로 흐른다.
돌아서 내려오는 길, 오를 적에 못 보았던 월영루 옆의 삼층석탑이 눈에 띤다. 시간을 두고 꼼꼼히 살피니 기단석 하층과 상층 사이에 판석 1매가 끼워져 있다. 드문 현상이다. 평범함 속에 특별함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 탑이 고맙다. 탑을 뒤로하고 각화사 귀부로 옮겨간다.
각화사 귀부(龜趺)는 고려시대 통진대사 비의 일부로 전하는데, 비석의 몸돌은 정작 ‘각화사기적비’라고 1984년에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었다. 귀부는 제 비신을 잃었다. 살짝 다가가 거북 등을 어루만져 주니 등의 전면에 새겨진 육각문마다 ‘왕(王)’자와 ‘만(卍)’자가 눈에 쏙 들어오는지라 손이 쉽게 닿질 못한다. ‘왕(王)’자는 무얼 의미할까?

각화사를 내려와 붉은색이 완연한 사과밭을 끼고 돌아 두내약수탕, 오전약수탕을 지나 축서사에 다다른다.
축서사(鷲棲寺).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시던 인도 ‘영축산’을 의미하는 ‘축(鷲)’과 ‘깃들어 있다’는 의미의 ‘서(棲)’이니 축서사는 부처님의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의 사찰이다. 축서사는 부근의 부석사와 더불어 산세와 산사가 멋진 어울림을 보여주는 곳이다.
“절이 곧 산이고, 산이 곧 절이다”라고 해야 하나, 절을 안은 산이, 산에 안긴 절이 서로 아늑하고 조화로우니 보기에도 거슬림이 없다. 저 멀리 소백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축서사의 기와 지붕선들은 서쪽 하늘 저녁노을에 부처님을 맞이하는 듯, 하늘에 오를 듯하다.
축서사에는 9세기경에 만들어진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삼층석탑, 석등이 있다. 대웅전의 비로자나불 좌상은 불상의 상호, 옷주름에서 보이는 양식적 특징도 시간을 두고두고 대면케 한다. 가느다란 눈, 일자로 다문 입은 고요한 분위기를 만든다. 얼굴에 비해 적당히 넓게 느껴지는 어깨와 가슴 그리고 벌린 무릎은 안정적인데, 옷주름 선이 평행선 같아 다만 좀 형식적인 느낌을 준다. 그래도 무릎 사이 옷주름이 부채꼴 형태의 물결 모양으로 표현된 것은 아주 특이한 점이었다. 다만 전신에 걸쳐 흰색칠을 해 놓은 것이 좀 못 마땅스럽지만 어디 이 불상을 조성하던 정성을 생각한다면 감히 대놓고 할 소리인가! 나무로 만든 불상의 광배 또한 진기하다. 후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의 석조 광배는 깨어져 상부만 남아 있다고 한다.
축서사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 삼층석탑은 언부스님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조성한 탑인데, 언부스님의 어머니는 신라 시중(현재 국무총리 격)인 김양종의 딸이었다. 탑 속의 사리함에서 나온 석탑 조성기록에 의하면 납이 만들어진 시기가 867년(경문왕 7)이라고 한다. 탑의 조성 시기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큰 의미가 된다.
불상을 뵙고 석탑을 대하고 다시 축서사 뜰에 서니 석등 너머 소백산 자락들이 어둑하다. 날씨가 흐리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서 제 빛을 뿌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지 싶었는데, 단단히 벼르고 찾을 때는 잘 맞지 않는다.

청량사(淸凉寺)로 오른다. 꽤나 가파른 길에 바람소리보다 오히려 숨소리 높은데, 잠시 발길 멈추고 거친 숨소리 한번 고를 때, 어디선가 목탁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청량산 36봉우리가 모두 부처님 안이 아니던가! 문수봉, 의상봉, 보살봉, 금탑봉, 연화봉…. 봉봉들이 솟아 하늘에 닿았다. 하늘에 닿은 봉우리들은 청량사를 안고, 이 봉우리들을 다시 부처님이 안았던가! 가을 햇살이 따스하게 청량사에 내린다.
청량사는 원효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천년을 훌쩍 넘긴 절이지만 지금 절의 모습은 오래되지 않았다. 새로 지은 건물들이 많다. 그렇다고 절의 고풍(古風)이 기대보다 못하다고 실망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절터의 절묘함으로 인해, 찾는 이들로 하여금 안으로 잠기는 여유마저 누리게 한다. 오층석탑, 삼각우총(三角牛塚) 노송, 유리보전(琉璃寶殿), 요사들이 포곡의 띠를 두르듯 청량산 봉우리 아래 따스하게 자리 잡은 모습이 마치 절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안을 듯하다. 절은 사람들을 안아야 한다.
청량사의 유리보전은 다른 절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이름의 전각이다. 약사여래불을 모신 전각이니 약사전과 같은 의미다. 약사여래불은 아픈 이를 낫게 해준다는 서원을 세운 부처님으로 동방 유리광 세계에 주재하신다. 유리광 세계에 계시는 부처님이므로 유리보전이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 마음의 깊은 상처까지도 다 청량함으로 비워주소서! 아, 마음의 기원은 다시 병이 되는가! 내가 씻어야 하거늘. 바람이 유리보전 약사여래불을 돌아 내 뺨을 어루만진다. 답도 없는 마음의 문제. 고개 드니 유리보전의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유리보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유리보전 앞에는 ‘삼각우총’이라는 노송이 유아독존(唯我獨尊)으로 서 있다. 삼각우총이라니 ‘세 개의 뿔이 달린 소의 무덤’이라는 뜻인데, 여기에 재미난 설화가 따른다.
옛날 산 아래 마을에 뿔이 셋 달린 소가 태어났는데 몇 달 만에 크기가 낙타만하게 자랐으며, 성질 또한 몸집만큼 사나워서 감당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 소를 연대사(蓮臺寺) 주지 스님이 거뒀는데 이상하게도 그 후로 소가 양순하고 부지런히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소가 죽게 되자 그 소를 묻으니, 그 자리에서 세 개의 뿔처럼 세 갈래의 가지가 뻗은 소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때 마침 바람이 노송에 부딪히며 큰소리가 나는 것이 소 울음과도 같았다.
청량사의 한낮, 바람소리에 머물다 가니 물소리가 잔잔하게 들린다. 바람소리에 마음을 열고 물소리에 마음을 씻는다. 하늘은 여전히 푸른데, 눈 감으면 금방이라도 밤하늘 별들이 쏟아질 듯하다. 내려서는 길, 청량사 전통찻집에 걸린 서각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바람이 소리를 만났을 때’.
서쪽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붉게 물든 서쪽에서 부처님이 오시길 기다렸는데, 산을 타고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산은 산사를 안고,
산사는 다시 사람들은 안는다.
이 비 그치면
하늘에 닿은 산사에
물소리 높아지겠다.

<시골 장 나들이>
6.메밀묵처럼 담백한 정이 넘치는 봉평 오일장
“있을 건 다 있어! 없는 것만 빼고”
가을 햇살이 내리는 한낮에 봉평장에 닿았다. 굽이굽이 산골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고향 봉평 땅이었다. 달빛에 푸르게 젖었을 메밀 꽃밭이 봉평 땅을 온통 도배 했으리라던 기대가 너무 컸나 보았다. 이미 계절이 깊어 정작 메밀꽃은 지고 장터 여기저기 메밀묵이며 메밀국수와 메밀전병이 꽃을 대신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글·사진 김선호(객원기자)
봉평장은 읍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 뒤쪽 골목과 그 다음 골목 이렇게 두 골목을 따라 펼쳐진다.
여기저기 ‘봉평’ 이란 상호가 많기도 하다. ‘봉평 꽃집’ ‘봉평 가스’ ‘봉평 메밀국수’‘봉평 세탁소’에 ‘봉평 영양탕’까지….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봉평재래시장’ 이라 쓰인 입간판이 흔들린다.
지나가는 길손을 붙들어 어서 오라 손짓이라도 하는 듯 하다. 하얀 운동복 차림의 아이들 한 무리가 우르르 몰려와 장 입구 쪽의 포장마차로 몰려들었다. “핫도그 주세요!” 아이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오늘이 운동회 날이니?” “예” 일제히 합창하듯 대답하는 아이들 얼굴에 생기가 가득하다. “달리기도 했겠구나?” “네, 저는 일등 했구요, 쟤는 삼등이요.” 당당하게 대답하는 여자아이들 뒤로 한 남자아이가 그냥 수줍게 웃는다.
개복숭아가 시장 구경을 나왔다. 벌레 먹고 못생긴 토종복숭아다. 포도 닮은 머루열매가 반갑다. 장을 한바퀴 돌고 나서 그걸 사야지 했는데 나중에 그 자리에 와 보니 그새 머루가 팔리고 하나도 안남아 있었다. 기관지 천식에 좋다는 산초열매도 포도를 닮았고, 포도와 머루가 사이좋게 합쳐진 머루포도가 둥글둥글, 가을햇살 닮은 얼굴을 내밀고 있다.
“냉이 좀 사가, 냉이.”
옆에 앉은 할머니가 앞에 놓인 바구니를 가리키며 손짓을 했다. 가을에 웬 냉이인가 싶었는데 배추밭에서 자란 냉이란다. 봄냉이 보다 더 맛있다고 자랑하는 할머니 옆에는 강냉이 (옥수수) 밭에서 난 고들빼기를 파는 할머니가 앉아있다.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 고들빼기김치 담는 법에 대한 긴 설명을 들었다.
한산한 시골장에 활기가 넘치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황학동 벼룩시장 한켠을 옮겨다 놓은 듯한 고물상이다. 옛날 물건들이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곳인데 사람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다리미, 인두, 화덕, 풍로에 손작두, 칼자루가 심상치 않은 오래된 칼에 옛날 동전과 엽전까지. 십년을 걸려 모은 고물(古物)속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놋쇠종에서 일제시대 화폐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다. 구경꾼 중에 중년부부가 눈에 띈다.
“아, 그래. 이런 게 있었지? 그때 말이야, 이걸루 다가….” 새삼스럽게 감회에 젖는 얼굴로 잃어버린 고향 풍경을 떠올려 보는 이들…. 누군가 기둥 한켠에 걸어둔 작은 망태기 같은 것을 만지작거린다. 지푸라기를 꼬아 만든 작은 그물 같았는데 물어보니 소를 끌고 쟁기질 할 때 밭둑에 있는 풀을 못 먹게 하려고 입에 씌우는 주둥망이란다. 가격을 물어봤더니 고물상 아저씨가 파는 물건이 아니란다. 그걸 만드는 이가 없어 구할 수조차 없으니 이제는 국보급 보물(?)이라는데, 그렇게 하나둘 없어지는 우리 것들을 한 십년쯤 흐른 후엔 글쎄 어디 가서 찾아야 할까 ?
다시 발길을 옮긴다. 백발의 할머니가 난뿌리를 소복이 올려놓고 손님을 부르고 있다. 난 옆에 요즘 한창 뜨는 ‘산세베리아’가 한 다발 놓여 있었다. 새집증후군을 제거하는데 효과가 좋다하여 아파트가 많은 도시 사람들 사이로 꾸준히 인기를 누린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이 작은 시골장도 예외가 아닌가 보았다. 시골 할머니가 장바닥에서, 그 이름도 어려운 서양식물을 팔고 있었다.
“할머니 , 이 식물 이름 아세요?” “글쎄, 산… 무슨 리아라고 하던데 자꾸 이름을 까먹어”라면서 옆에 있는 아저씨를 돌아본다. “할머니, 산세베리아요, 산세베리아” “내가 이래, 자꾸 잊어 먹는데 옆에서들 가르쳐 줘 알지. 또 잊어 묵것지만.”
할머니가 머쓱한 미소를 짓는다. 글쎄, 그 어려운 이름을 기억하는 게 용하겠다 싶다. 장이 열리는 포장도로엔 한낮의 열기가 뜨겁게 남아 있지만 도로 옆으로는 가을이 익어가는 농촌 풍경 그대로이다.
밭가로 콩포기를 두른 고추밭이 보이고 그 옆에 옥수수와 수수가 나란하게 서서 익어가는 모습이 정겹다. 고개가 꺾일 듯 잘 여문 수숫대가 사람을 대신하여 시장 안을 구경하듯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길 한켠에 시골민박집이 들어서 있었다. 장에 인접한 민박집이름도 소박하게 그냥 ‘시골 민박집’이다. 뻥튀기를 하다말고 어디를 가셨는지 뻥튀기 아저씨는 없고 기계만 저 홀로 가을햇살에 뒹굴고 있었다. 뻥이요~, 라고 소리를 치면 기꺼이 귀를 막고 구경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기다려도 뻥튀기 아저씨는 나타날 생각이 없나보다. 길가에 늘어선 수숫대 위로 오후 햇살이 비껴든다.
수수밭을 지나 나무로 만든 이쁜 그릇들을 파는 아저씨를 만났다. 물푸레나무를 여러 해 말린 다음 깎고 다듬어 만든 그릇들이 올망졸망 이쁘다. 가지를 물에 담그면 푸르게 물이 든다 하여 ‘물푸레나무’라 한다. 이 낭만적인 나무가 만들어 내는 그릇들이 다양하기도 하다. 찻통, 수저, 젓가락, 포크, 티스푼, 반기에 다기세트까지…. 물푸레 나무로 만든 티스푼으로 차를 타서 마시면 향기가 더욱 진하지 않을까 싶어 티스푼 몇 개를 사서 장을 돌아 나왔다.

봉평 오일장에 가면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설레임이 있었다.
하지만 재래시장의 쇠퇴는 봉평오일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봉평장은 이제 좀더 규모가 큰 할인마트에 그 자리를 내주고 한산한 풍경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봉평장을 지나 이효석문학관을 가기 위해 남안교를 건넜다. 남안교 안쪽으로 효석문화제 때 만들어 졌을 법한 섶다리가 놓여 있다. 봉평장에서 대화장으로 가기 위해 허생원이 조선달과 동이와 더불어 건너던 강이 저 강일까? 강을 건너던 장돌뱅이 위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을 것이고 달빛에 못 이긴 척 허생원은 또 같은 얘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달밤이었으니,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알수 없어.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 것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 평생인들 잊을 수 있겠나.”
평생을 잊을 수 없던 옛 여인을 만나러 제천으로 가야겠다던 허생원은 술이 곤드레가 되어 술병을 꿰차고 남안교를 바라보며 헤죽거리고 있고, 그 옆에 언제 봉평에 왔는지 충주댁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효석문화제가 끝난 남안교 주변은 마치 연극이 끝난 뒤 텅 빈 무대 같다. 하지만 이효석과 메밀꽃이 있는 한 봉평은 ‘소금을 뿌린 듯 달빛에 흐뭇하게 젖은 메밀꽃밭’ 속으로 우리들을 기꺼이 초대할 것이고, 메밀묵의 그 담백하고 쌉싸름한 맛이 있는 한 봉평장도 오래 오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주말가족 여행>
7.전남 곡성 둘러보기
칙칙~폭폭 미니열차 섬진강이 따라 온다
섬진강 36km, 보성강 18km. 54km 이어지는 강은 곡성의 자랑이다. 섬진강 따라서 9km 달리는 미니열차, 섬진강에 살포시 그늘을 내리는 함허정, 보성강 자락에 자리한 태안사. 곡성은 순박한 여행의 맛이 있다.
글·사진 김연미 기자 취재협조·곡성군청(gokseong.go.kr)
칙칙 폭폭 미니열차
토요일, 새벽 일찍 곡성으로 향했다. 시속 30km로 달리는 곡성 미니열차를 타러 가면서 시속 3백km를 자랑하는 고속철도를 탔다. 익산까지 가서 익산에서 곡성역으로 가는 무궁화열차로 갈아탔다. 소요시간 3시간 30여분, 곡성역에 내리니 9시가 조금 안됐다. 새벽에 떠나는 여행은 하루가 길다. 곡성군청 김현남 씨가 마중왔다. “먼 길 와 부렀네.” 그녀의 사투리에 웃음이 먼저 번진다.
곡성은 사투리가 구수하다. 남원, 담양, 순창 등 전라도의 잘 알려진 동네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덜 알려진 곡성은 제 색을 간직하고 있다. 섬진강처럼 맑고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가 그냥 좋다.
미니열차가 다니는 곡성역은 옛 곡성역이다. 전라선 직선화로 폐쇄된 철로를 이용해서 가정마을 간이역까지 운행한다. 시속 30km로 섬진강을 따라서 왕복 1시간 10여분. 속도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미니열차는 느릿느릿 거북 열차다. ‘시속 30km와 3백km의 차이는 삶과 죽음의 차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타보고 속도에 대한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미니열차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역도 아담하다. 입구에는 ‘미니기차 탑승권을 받아가세요’ 안내판이 붙어있다. 올 10월까지 운행되며 탑승권은 무료다. 효녀 심청이가 그려진 1량 21승. 귀엽다. 먼저 온 가족들이 기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기차 옆에는 빨간 2인용 철로자전거도 있다. 이 역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주인공 두 형제와 농아 어머니가 이별하는 장면을 촬영한 역이라고 한다.
기차를 타면 웃음이 나온다. ‘정말 달릴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아이들 장난감을 크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앞뒤로 설치된 기계는 마치 오락실에서 뽕뽕 누르는 작동장치 같다. 그러나 기차를 운전하는 아저씨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길게 기적소리를 울려주고 드디어 출발. 한쪽 의자에는 단체관람을 온 할머니들이 쭉 앉아있다. 근엄한 표정인지, 심심한 표정인지, 계란이라도 몇 개 삶아 와서 너스레라도 떨어볼 걸 후회가 든다. 섬진강이 바라보이는 자리는 꼬마들 차지다. 유리창에 고개를 내밀고 열심히 내다본다.
철로 밑에는 남원에서 구례로 가는 17번 국도가 함께 달린다. 주유소를 지날 때는 아저씨가 길게 기적을 울린다. 그럼 주유소 직원이 나와서 손을 흔든다. 아이들도 따라서 손을 흔든다. 봄에는 철쭉 길이요. 여름에는 백일홍 길이요. 가을에는 단풍 길이다. 단지 좀 짧다는 게 흠이다. 역에서 내려서 잠시 섬진강을 둘러 볼 수 있다. 빨간 다리 두가현수교에서 바라보면 섬진강에서 올갱이를 잡는 사람들이 있다. 열차가 길게 기적을 울리면 다시 기차에 올라야 한다. 출발역이자 도착역인 곡성역으로 간다.

고즈넉한 태안사
곡성 역에서 좌측방향으로 나와 구례방향 17번 국도를 탔다. 미니열차에서 내려다 본 길이다. 곡성은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데 그 합수점이 압록이다. 섬진강을 따라서 약 15km 정도 달리면 압록유원지. 자전거 하이킹도 할 수 있으며, 섬진강 참게, 은어구이, 민물매운탕을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많이 있다. 압록유원지에서 우회전을 해서 18번 국도를 타고 약 6km 정도 가면 태안교가 나온다. 건너서 다시 6km 정도 더 가면 태안사다.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742년) 때 세워진 절이다. 혜철선사가 선종 구산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열었다. 송광사, 선암사, 화엄사 등을 말사로 거느렸던 큰 사찰이었다. 조선시대 억불정책과 6.25를 거치면서 쇠락했다. 지금은 혜철스님의 부도와 광자선사 탑과 비가 이끼 낀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조태일 시문학기념관 앞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가면 30여분 정도 걸린다. 계곡 소리는 시원하고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산책하듯 걸어가면 된다.
몇 개의 다리를 건너면 계곡 위에 세워진 능파각을 만난다. 옛 나무다리 위에 세워졌다. 이 다리는 천년의 세월동안 사람들과 절을 이어준 다리다. 잠시 다리 위에서 쉬었다 가기를. 계곡 물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듯 계곡과 하나가 되는 착각에 빠진다.
능파각 바로 앞에 음료수자판기가 있다. 손을 위한 배려겠지만 눈에 거슬린다. 탄산음료보다 계곡 물이 더 시원할 듯 하다.
조금 올라가니 ‘동리산 태안사’ 현판을 단 일주문이다. 다듬지 않은 굵은 기둥과 겹처마의 화려한 단청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일주문이 과감하다. 일주문 뒤에 대단한 절이 있을 듯 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대숲에 쌓인 부도밭이다. 광자대사탑과 귀부(龜趺)와 이수만 남아있는 광자대사 부도비가 있다. 일주문에서 받았던 과감한 느낌과는 달리 절은 태안사(泰安寺) 이름 그대로 편안하고 고요하다. 김현남씨는 개인적으로 태안사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작아도 그 안에 들어가야 절 맛을 안당게, 아늑하제.”
새로 지어진 대웅전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오른다. 계단을 오르다 보니 스님이 기거하는 선방 담장에 능소화가 곱게 피었다.
혜철스님의 부도탑은 부도와 탑비가 함께 모셔진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이다. 탑은 특이하게 ‘배알문(拜’謁門)’ 안에 모셔져 있다. 절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일주문이 당당하게 사람들을 들여보낸다면 배알문은 누구든 고개를 들고 들어오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 혜철스님 부도탑을 보기위해서는 누구나 고개를 숙여야한다. 배알문을 들어가면 선승이 앉아있는 양 부도탑이 모셔져있다. 곡성을 간다면 꼭 들러 볼 곳이다.
부도탑을 내려오면서 일주문을 빠져나오지 않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인공 연못을 만날 수 있다. 산은 둥근 연못을 감싸고, 연못 중앙에는 삼층석탑이 놓여있다. 소원을 비는 사람보다 이 연못을 만든 사람은 속내가 궁금하다. 어떤 질긴 인연을 뒤로하고 이 연못을 만들었을까? 잠시 걸음을 멈추고 탑돌이를 한다.

섬진강에 그늘을 내리는 함허정
다시 27번 국도를 타고 곡성을 가로질러서 40여분 정도 달려서 도착한 곳이 군촌마을이다. 저만치 험허정이 나무 뒤로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섬진강을 굽어보고 있다. 함허정 오르는 입구에 군지촌정사가 있다. 군지촌정사는 함허정을 만든 심광형 선생이 후학을 기르던 강학소다. 심광형 선생은 조선 중종 때 광양, 곡성 등에서 훈도를 지냈던 당대의 문사다. 집 앞에는 하마석(下馬石)이 있다. 말에서 내릴 때 발돋음으로 썼던 노둣돌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는지 알 수 있다.
군지촌정사에서 함허정이 바로 보인다. 함허정은 마을 건너편에 호젓하게 있다. 정자는 세월을 말해주듯 커다란 상수리나무들에 쌓여있다. 섬진강이 나뭇가지 사이로 흐른다. 조선 중종(1543년) 때 지어졌으며 1980년에 중수하였다. 방 2칸, 마루 1칸. 작다. 그러나 사방으로 문이 나 있어서 작아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나무가, 섬진강이 안으로 들어와 그대로 녹아버린다. 안과 밖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잠시 마루에 앉아있으니, 다람쥐가 기웃거리다 달아난다. 이제 상수리가 여물고, 다람쥐가 쥐방울마냥 드나들겠다. 이곳에서 가을도 잠시 쉬었다 간다.

● 섬진강 자연학습원
1995년 57년 역사를 가진 옥수분교가 폐교되면서 만든 자연학습장이다. 강의실, 체험교실, 곤충사육장, 야생화전시장, 산책로 관찰장, 체험장 등 아이들 학습 위주로 관찰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부들, 미나리꽃, 옥잠화, 다양한 수생식물을 철렁거리는 나무다리에서 관찰할 수 있다. 도예, 야생화, 염색교실 등이 가장 인기 있는 체험프로그램이다. 주로 단체 학생들을 받는다. 한 프로그램 당 2천원. 4∼5가지를 체험할 수 있는 당일 프로그램 1만원. 1박2일 프로그램 (식사, 숙박, 체험비 포함)3만원. (자연학습원 061-363-2999)

● 섬진강변 자전거하이킹
섬진강을 따라서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강변을 따라서 자전거를 타도 좋을 듯 하다. 길이에 따라서 3코스가 있다. 1코스 20분 2.2km, 2코스 4시간 25km, 3코스 2시간 11.6km. 1인용 3천원, 2인용 4천원.(곡성청소년야영장 061-362-4186 www.ylcamp.com)

● 곡성심청축제
심청축제가 2004년 10월 7∼10일 (4일간) 곡성 섬진강 자연생태공원에서 열린다. 관음사 ‘사적기’에 실려 있는 원홍장 설화가 국내에서 심청전 원전과 가장 흡사하다고 한다. 그래서 곡성은 심청이 나고 자란 곳으로 불린다. 심청마당극, 대장간 체험, 방물전, 전통 떡치기 체험, 전통 민속놀이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뺑덕어미 주막에서 쉬었다 갈 수 있다.

●이것만은 알아두세요
미니열차 타기-10월까지 주말과 공휴일만 하루 (시간 09:30, 11:00, 14:00 16:00) 4회 운영.
약 1시간 10여분 소요. 문의 061-360-8754 (예약 필수)

●가는 길
기차 서울 쮝 곡성역 고속철도 3시간 20여분 정도. 새마을호 4시간 정도 (곡성역 061-362-7788), 버스는 서울에서 직접 곡성으로 가는 게 없다. 광주를 거쳐서 곡성으로 가야한다. 광주에서 곡성까지 1시간 정도 소요. (곡성터미널 061-363-3919)
자가용 중앙고속도로 쮝 호남고속도로 쮝 광주에서 순천방면으로 40여분 정도 가다가 구례, 석곡IC로 진입 ▷ 보성강 따라 국도 18번을 탄다.

●태안사 가는 길
자가용 구례방면 국도 17번 따라 16km 가다보면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류하는 압록유원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국도 18호선을 따라 죽곡방면으로 6km 가다 태안교가 있다. 다리를 건너 다시 원달 방향으로 6km를 가다보면, 태안사가 있다.
대중교통 곡성버스터미널(061-363-3919)에서 태안사행 버스를 탄다. 시간표 08:00, 10:00, 12:20, 14:10, 16:00, 17:20, 19:10. 소요시간 40여분 정도.

●함허정 가는 길
자가용 곡성읍에서 국도 17번을 타고 2km 정도 가면 사거리가 나온다. 지방도로 840번을 타고 9km 정도 가면 제월리 군촌마을이다. 함허정이 보인다.
대중교통 옥과버스터미널(061-362-6661)에서 제월리행 버스를 탄다. 시간표 07:50, 09:40, 10:30, 11:30, 13:30, 15:30, 17:20, 18:50, 20:10, 20:40. 소요시간 20여분 정도.

●맛집
·통나무집 061-362-3090
·새수궁가든 061-362-8352
·산채식당 061-363-5345

8.꽃무릇 사태났네
함평 龍泉寺
꽃무릇을 만나러 가는 길, 비가 먼저 반긴다. 재작년에도 모악산을 찾았다가 비를 만나 산행은 포기하고 빗속의 꽃을 제대로 만났다. 그 이전에도 용천사 주변을 몇 번 들렸지만 시기를 못 맞췄던지 재작년에야 꽃무릇이 사태가 질 정도란 걸 알게 되었다. 하늘이 도와준다면 이전에 부부만 올랐던 모악산을 이번엔 가족이 함께 가볍게 오르겠다는 야무진 꿈까지 안고 나선 길이다.
글·사진 한결가족




광주에서 용천사까지는 일백리 길. 50분 정도 걸린다. 나주 노안면을 거쳐가는 길도 있지만 우리는 송정리에서 영광으로 가는 22번 국도를 탄다. 황룡강 다리를 지나는데, 누런 강물이 강둑을 넘실댄다. 요즘 들어 내린 비의 양을 가늠케 한다. 무서운 기세다.
강을 건너자 흔한 꽃들 대신 메밀을 심은 길가 화단이 다가온다. ‘누가 이런 이쁜 생각을 했을까.’ 참 정겹고 색다르게 다가온다. 우리가족은 환호성을 지르며 메밀꽃에 고운 인사를 건네곤 영광방면으로 길을 잇는다.
얼마쯤 가자 ‘월야’ 소재지가 나온다. 파출소 벽면에 커다랗게 그려진 나비가 반기는 걸 보니 함평 땅에 들어섰나 보다. “나비는 함평에서만 사는가 봐” 우리가족도 이런 농담을 하다니…. ‘함평=나비’라는 이미지가 확 박혔나 보다. 나비축제로 ‘환경’군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이를 토대로 이곳에서 나는 농산물들은 모두 친환경적이라는 또다른 이미지를 생성시켜 지역농산물 판매량 증가로 이어지고 있으니, 지방자치사회의 지도자 한 사람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문장’에 이르니 곳곳에 네 번째 꽃무릇 큰잔치를 갖는다는 안내물들이 많다. ‘용천사’는 문장에서 살짝만 더 가서 손불 방면(838번 지방도로)으로 좌회전해야 한다. 산길로 접어드니 벌써 날개를 활짝 벌린 꽃무릇이 야산에 지천이다. 오종종하게 목을 밀어올리는 녀석들도 나름대로 귀엽고 싱그럽다. 우리는 길 양쪽으로 일부러 심은 듯한 꽃무릇이 앞으로 펼쳐질 꽃사태를 맛보기일 뿐이란 걸 안다.

꽃을 보다보면 어지러워요
‘용천사’일대는 온통 꽃바다가 되어 있다. 이럴 때면 언어의 한계를 절로 느낀다.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출발하면서 “엄마, 용천사엔 꽃무릇 보러 가요?” “으응.” “난 꽃무릇 싫은데” “왜애?” “그냥”이라고 말끝을 줄이던 한결이가 대뜸 나선다. “거 봐요, 내가 싫댔잖아요.” “왜 그러는데?” “음, 꽃무릇은 처음 보면 참 좋고 이쁜데 한꺼번에 많이 핀 꽃들을 보고 있으면 어지럽단 말이에요.” “어떻게 어지러운데?” “멍해지면서 꽃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아요.” 때론 아이의 언어가 얼마나 더 자연스럽고 생생한지….

비가 내려선지 지천인 꽃무릇은 온통 서러운 붉은 빛이다. 무려 20만평이나 되는 너른 야산과 계곡에 가느다란 허리를 곧추 세우고 꽃을 피웠다. 쉴새 없이 내리는 가랑비를 품고 더욱 붉은 모습으로 우릴 수줍게 맞는다.
이런 빗속에 누가 여기까지 찾아오겠느냐는 우리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축제를 치르려고 마련한 주차장엔 차량이 가득하다. 전국최대 규모의 꽃무릇 군락지로 이름을 알렸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노소가 어우러진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유난히 많다. 정겨운 풍경이다.
나들이객들은 비에 아랑곳 않고 산길 곳곳을 여유롭게 거닐고 있다. 발걸음은 가장 먼저 ‘용천사’로 향한다. 4세기경 마라난타 스님이 창건했고, 한때(조선중기까지) 서남해안 일대에서는 가장 큰 사찰이었다는데, 몇 번의 전란으로 폐허가 된 이후 최근 들어 복원작업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은 자그마하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에 새겨진 꿈틀거리는 용 조각과 한 켠에 비켜 나무 아래 언덕에 서 있는 3개의 작은 석불상이 잠시 눈길을 붙잡는다. 어디에나 꽃무릇이 올라오고 있다. 쑤욱쑥, 아찔한 속도감이 느껴질 정도다. 절 이름을 짓게 한 ‘용이 승천한 샘’이라는 용천에서 약수 한 모금 마시는 걸로 절 구경을 마친다.

전국 최대의 꽃무릇축제
절 앞엔 가족단위로 만든 돌탑들이 꽃무릇들과 어울려 다른 데서 보는 돌탑들과 달리 상승감이나 억지가 덜 느껴진다. 꽃무릇에 둘러싸인 모든 것들은 행복해 보인다. 절 주변을 빙 둘러 만들어진 2km 남짓한 산책로를 따라 걷는 발걸음도 여유롭다. 잘 가꿔진 산책로 양쪽으로 가득한 꽃무릇 바다를 눈에 가득 담으며 우산을 받쳐들고 느긋하게 걷는다. 나지막한 산중턱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 별천지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말끔하게 정돈된 길을 따라 쉬엄쉬엄 걷다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용천사 주변은 꽃무릇만 있는 게 아니다. 함평군에서 맘먹고 다듬어 꽃무릇으로 축제를 여는가 하면 절 주위를 따라 온갖 야생화와 자생식물로 생태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자연스레 발길이 그리로 옮겨진다. 산길을 따라 녹차나무와 각종 야생화를 심어 놓은 생태공원이 오밀조밀 자리잡고 눈길을 붙잡는다. 전에 왔을 땐 봉숭아물들이기 체험과 신문지로 만든 공예품을 보여줘 더 좋았던 기억이 있다.
항아리로 멋을 부린 입구를 지나 조롱박 수세미로 꾸며진 터널을 통과하면 마실 물이 있는 원두막 쉼터가 나타나 별로 아프지도 않는 걸음을 쉬게 한다. 자갈과 황토가 정겨운 오솔길을 걷다보면 송판에 고사성어를 잔뜩 새겨놓고 마음을 비우며 읽고 가라는 항아리들과 움집도 나온다. 절 입구 저수지엔 용으로 만든 분수대가 물을 뿜고 있는데,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것은 큰 바윗돌을 잘라 만든 듯한 징검다리다.
징검다리를 건너며 야생화와 옥잠을 보면서 우리가족의 지금과 미래를 짧게 생각한다.
이제 여정을 마무리할 시간. 깔끔하게 자리잡은 다원으로 들어갔다. 색깔을 넣어 예쁘게 만든 초에 불을 붙인 뒤 솔잎차와 오디차를 앞에 놓고 여유와 낭만을 즐긴다. 창밖으로는 초가집과 지붕 위의 조롱박이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비가 내린다. 처마에서 연신 떨어지는 빗소리, 참 좋다.

<오지마을을 찾아서>
9.전북 무주 방재·벌한마을
“그래도 우리 동네가 제일 부자 마을이야!”
전북 무주군 덕유산 자락에 살짝 숨어 있는 오지마을. 5백년 역사를 가진 방재마을, 몽땅 아홉 사람이 살고 있더이다.
글·사진 김연미 기자 도움을 준 사람들·오지코리아 (www.ozikorea.com)
강원도에는 빈집이 한집 건너 한집, 띄엄띄엄 있어서 그리 쓸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집들이 모여 있는 무주의 방재, 벌한 마을은 바로 옆집이 비어 있으니 허전하고 애잔합디다. 빈집에 홀로 핀 접시꽃이 붉디붉습니다. 꽃은 스스로 피고 지는 일에 게으르지 않습니다. 집 떠난 사람은 꽃이 눈부시군요. 무주는 덕유산, 무주구천동, 무주리조트 등 관광지로 유명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도 여전히 계곡은 맑고 숲은 매미 소리로 가득합니다.
무주 나제통문을 지나서 37번 국도 구천동 방향으로 10여분 정도 가다보면 ‘구산마을’이 나옵니다. 폐교된 두길초등학교를 지나서 구산마을 유래가 써있는 표석을 지나 다리를 건넙니다. 뒤돌아보면 알알이 매달린 포도송이 뒤로 구산마을이 살포시 지붕만 내보이고 있습니다.

방재마을 세 살 소정이
비포장 길입니다. 차 없이 다니는 저 같은 사람에게 비포장 길은 사람의 길 같아 기분이 좋지요. 산이 높으니, 길도 깊습니다.
계곡 옆 버려진 밭들에 개망초가 가득 피었습니다. 곧 마을이겠군요. 일구지 않은 밭들이 늘어납니다. 30여분 걸었을까요? 전봇대 밑에 80년대쯤 유행했을 시계며 라디오가 버려져 있습니다. 이제 버려지는 것들이 점점 많아지겠죠. 빈집, 풀만 무성한 밭, 낡은 물건들.
흙담에 접시꽃이 수줍어하는 구석도 없이 당당하게 피었네요. 대추나무에 대추가 주렁주렁 열려 허물어지는 집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빈집의 구멍사이로 이웃집이 보인다는 것, 시원한 마루에서 앞집을 내다보는 것과 사뭇 다르죠.
마을 입구 정자나무에는 털이 빠져나온 낡은 소파가 놓여있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찾아가자 마을 분들이 다 나와 보네요. 그래봤자 전부 9명입니다.
“꽃 피는 언덕이라 해서 방재마을이여. 5백여 년 전부터 우리 엄씨들이 살았지. 예전에는 70여명 정도 살았는데 지금은 여자 3명, 남자 6명이 전부지. 우리 딸 소정이가 이 마을 마지막 아이지. 쟤도 크면 학교는 도회로 가야지.”
양봉을 하는 엄제술 씨가 담담히 마을 이야기를 해 줍니다.
아낙들은 봄철 내내 덕유산 자락에서 산나물, 더덕, 고사리를 뜯어서 팔고, 여름에는 땡볕 나무 그늘을 찾아듭니다. 아직도 멀쩡한 건조대 건물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큰 마을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마을의 귀염둥이 소정이를 만났습니다. “몇 살?” 물으니 손가락 세 개를 꼽고는 ‘바람돌이’처럼 쏜살같이 골목으로 숨어버립니다. 머리를 질끈 묶고 접시꽃처럼 활짝 웃지요.
소정이 친구는 털 부숭이 백구가 다입니다. 백구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소정이가 털을 잡아당겨도 순하게 웃습니다. ‘바람돌이’ 소정이가 어디를 가든 지가 엄마인양 졸졸 따라다닙니다. 바람돌이는 제가 지어준 별명입니다. 저 어렸을 때 TV 만화프로에 나왔던 주인공이 생각나더군요.
소정이네 마당에는 벌통이 있습니다. 돌아보니 집 근처에 벌통이 많이 있더군요. 벌들이 꿀들을 열심히 나르고 있으니 가을 끝에 꿀을 맛볼 수 있겠지요. 소정이 아빠 엄제술 씨는 양봉 전문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국을 다니며 양봉 기술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무주 야생화 꿀맛을 못 봐 좀 섭섭했습니다.
그 사이 친해졌다고 일행과 떨어진 제 걱정을 합니다. “언제 쫓아가나? 한참은 갔을긴데!” 할머니 한 분은 사람들이 간 길을 내다보며 “벌한마을은 부자마을이야. 차가 많아!”합니다.
간혹 계곡물 소리가 들립니다. 예전에는 물고기가 참 많았는데 몇 년 전 장마가 심해서 고기들을 싹 쓸어버렸다고 하더군요. 그래 요즘은 고기가 없다고 합니다. 몇 년이 지나야 물고기가 바글바글 할까요! 다들 떠나네요.

벌한마을 할머니의 준태찜
길이 참 좋습니다. 언덕 길이 높지가 않아서 힘들지 않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40여분 숲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니, 구천동 지류 벌한천 끄트머리에 있는 벌한마을입니다.
거칠봉(천백78m)일곱 봉우리에 싸여있다고 하는 무주의 오지마을입니다. 봉우리가 여러 개 있는데 일곱 봉우리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네요. 그냥 일곱봉우리라고 하니 그렇구나 합니다.
벌한마을은 성산 배씨 집성촌입니다. 해발 5백50m, 방재마을 보다 5명 더 살고 있군요.
이 마을에도 집 근처에 벌통이 참 많습니다. 빈집 기둥마다 벌통이 놓여있습니다. 벌통 입구까지 가까이 들어가서 사진을 찍어도 공격하지 않네요. 여섯 살 무렵에 밤나무 산에서 벌에게 쏘인 기억이 있어 벌이랑 친하지 않아서 좀 긴장했습니다. 사람과 가까이 있으니, 녀석들도 순하군요.
으름 넝쿨이 나무를 휘감고 올라갑니다. 따 먹어보니 맛이 들었네요.
마을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 물 한 그릇 얻어먹자고 따라들어 갔는데 밥까지 얻어먹었습니다. 민물 생선 준태를 고추장 넣고 졸여 주셨는데 거참! 맛나데요. 할머니 텃밭에서 깻잎이며 상추를 뽑아다 쌈도 싸 먹었습니다. 마을은 텅텅 비어도 사람 마음은 따뜻한 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일곱 봉우리에 싸여있어도 겨울이 얼마나 추웠었는지 방 문 앞을 비닐로 다 막았네요. 무주 참 눈이 많이 오는 곳이지요.
돌담길, 흙담길, 그리고 농기구들, 버려진 집 찬장 안 차곡차곡 쌓여있는 그릇들. 무주이며 무주가 아닌 곳, 그래 가장 무주다운 곳. 방재, 벌한마을입니다. 두 개의 마을을 지나는데 삶이 길 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립스틱을 칠합니다. 접시꽃 보다 붉게…. 왜 떠나는 자는 늘 화장을 하는지, 두껍게 칠해도 서러움을 감추지 못 합니다.

10.<백두대간 종주기>지리산
수많은 전설을 담고 있는 민족의 영산
천왕봉에서 만난 전설
유구한 세월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산. 어머니의 품속 같은 산, 민족의 한이 서린 산, 그리움이 사무친 산이라고 말하는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왔습니다.
글·사진 박상대 기자 동행·솔터산악회 (011-380-3182) 취재협조·M&R (031-976-1644)
지리산에는 전설이 많습니다. 사람들 탓이지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정치적 충돌이 있었고, 이념적 갈등과 투쟁이 있었고, 그때마다 입에 담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산 속에 묻혔습니다.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신선이 살았다는 민족의 영산 지리산. 이 반도를 지탱하는 중추 골격인 지리산은 경남의 함양 하동 산청,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까지 3개 도 5개 군 남도 8백 리에 뻗쳐 있답니다. 산자락마다 사람들이 터전을 이루고 있고, 계곡 능선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고개마다 전설이 있고, 역사가 숨어 있지요.
지리산은 ‘지혜로운 이인(異人)이 많은’ 산이라고 하지만,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도 많은’ 산입니다. 지리산 쪽으로 오줌도 안 눈다는 사람이 있고, 지리산 이야기만 하면 가슴이 콩닥거린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리산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영혼을 찾아 틈만 나면 산에 오르는 사람이 있고, 지리산이 마음의 안식처라며 산에 올랐다가 영원히 잠든 사람도 있지요. 술을 마시다가 지리산이 그립다며 눈물을 훔친 사람도 있습니다.
지리산은 큰 덩치만큼이나 봉우리가 많습니다. 천왕봉, 벽소령,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등등. 그들을 모두 오르지 않고도 사람들은 지리산을 올랐다하고, 지리산 이야기가 나오면 아는 체하며 끼어 듭니다. 이 글을 쓰는 기자도 지리산을 겨우 몇 봉우리 다녀왔을 뿐이라 낯이 뜨겁답니다.

천왕봉 오르는 숲길에서 마주한 전설
전설은 오래된 것도 있지만 최근에 생성된 것도 있습니다. 신라 때 천왕봉에 경주산 옥돌로 성모상을 만들어 지리산의 수호신으로 삼았답니다. 키가 1m 좀 넘고, 어깨 넓이가 50cm가 좀 더 되는 석상이지요. 조선시대 이성계가 전주군영에 근무할 때 남원의 여원재에서 왜군을 물리쳐서 천왕봉 너머로 쫓아버렸지요. 그때 도망치던 왜군들이 천왕봉에 있던 수호신인 여신상을 두 동강 내버렸답니다.
그 여신상은 그 후 몇 차례 천왕봉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때 또 수난을 당했고, 해방 후에는 기독교인에게 수난을 당해 몸을 많이 다친 뒤 한 스님에 의해 지금 천왕봉 아래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네요.
다른 전설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국 명산을 돌며 기도를 올리는데 지리산에서만 응답을 얻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반역산, 불복산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답니다.
지리산을 무대로 삼은 최초 문학작품은 제목만 전하는 ‘지리산가’ 랍니다.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이 노래는 백제 여인의 정절과 관련한 전설입니다. 백제 때 미모가 출중했던 여인을 왕이 불렀는데 ‘지리산가’를 지어 부르고는 산 속에 들어가 죽음으로 항거하며 부녀자의 도리를 지켰다는 슬픈 이야깁니다. 백제시대 노래 ‘정읍사’를 통해 백제여인들의 정조관념과 지아비를 생각하는 마음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동행한 백제의 후예 여인들에게 곁들여 이야기해 주었지요.
다음 전설은 근래에 만들어진 겁니다. 저 유명한 한국 전쟁 후 산사람이라 불리던 빨치산 청년과 산아래 동네 처녀의 러브스토리입니다. 밤마다 한 청년이 처녀 집에 드나들었는데 어느 날 처녀가 산으로 따라 들어갔고, 몇 달 뒤 산에서 내려온 여인이 아들을 낳아 놓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답니다. 지리산 자락 여인들의 목숨을 건 사랑과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지요.

장터목과 제석봉을 거쳐 천왕봉까지
백무동 계곡을 거쳐 장터목을 오르는 길에 참샘이 있습니다. 참샘에서 맛있는 샘물을 마시고, 숲길을 계속 오르자 망바위가 버티고 서 있습니다. 망바위 너머로 짙은 안개가 깊은 강을 이루고 있네요. 소설가 정도상은 장편소설 <길 없는 산>에서 “지리산은 바다였다”고 했습니다. 고생대를 거쳐 중생대에 이르기까지 변성작용을 일으킨 생태적 이야기만은 아니었겠지요. 지리산을 덮고 있는 짙은 안개가 거대한 바다처럼 보였습니다. 안개가 바람에 날리면 저 멀리 산봉우리들은 섬이 되는군요.
고개를 30분 쯤 더 오르자 장터목산장이 시야에 들어오네요. 산 위에서나 산 아래서나 쉼터는 반갑고, 몸에 생기를 채워 줍니다. 목조건물로 지어진 장터목산장. 옛날 함양군 마천과 산청군 시천 사람들이 물물교역을 했던 곳인데 이제는 등산객들의 쉼터가 되었지요. 산장에 배낭을 부려 두고, 중산리쪽으로 50m를 내려가 식수를 한 병 담아 들고 제석봉을 올랐습니다.
제석봉 오르는 길에는 암봉이 여럿 있고, 고사목들이 앙상한 가지를 떨고 있네요. 제석봉의 고사목과 목초지대를 보며 걷는데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습니다. 고사목들이 천수를 다하고 등산객에게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눈 먼 사람들이 억지로 고사시킨 것이니까요. 원래 제석봉에는 아름드리 전나무와 잣나무, 구상나무 등 침엽수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대요. 그런데 자유당 정권의 한 장관 친척이 지리산에 제재소를 만들어 놓고 불법 벌목을 했답니다. 온갖 나무에 구멍을 내거나 톱질을 해서 나무들을 죽게 만들고, 시들어가는 나무들을 자연사한 것처럼 도벌하자 산악인들과 기자들이 고발을 했지요. 그러자 도벌업자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산에다 불을 질렀고, 수목들이 불에 타서 더러는 앙상한 가지만 남고, 더러는 이미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래서 채 키도 다 키우지 못한 어린 나무들이 비명횡사하였고, 벌거숭이가 되어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저간의 사정을 알지 못한 등산객들은 가련한 고사목 앞에서 폼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더이다.
제석봉에 오르자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제모습을 드러냅니다. 다시 몇 개의 암봉을 넘어서자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이 나타났습니다. 허리를 구부리지 않으면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게 되는 좁다란 바위통로. 철재 사다리를 타고 통천문으로 올라갑니다. 하늘로 통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겠지요.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며 통천문을 통과하자 다시 경사가 심한 암봉이 앞을 가로 막습니다. 정상은 아직도 모든 것을 보여 주지 않네요. 지리산은 자연의 위대함을 통해 인간에게 겸손과 인내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이치를 깨닫게 한 뒤 비로소 천왕봉에 발을 올리게 하는군요.
천왕봉은 사방 팔방으로 얼굴을 내밀고
천왕봉의 얼굴은 어디인가? 제석봉이건 중산리 법계사 능선이건, 더 멀리 연하봉 앞에서나 웅석봉 능선에서나 천왕봉은 얼굴을 보여 줍니다.
그 얼굴이 참 잘 생겼습니다. 이땅에 있는 산치고 아름답지 않은 산이 없다는데, 천왕봉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참 잘 생겼다는 느낌을 줍니다.
백두대간의 끝이며 되돌아 시작이 되는 봉우리 천왕봉.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 천왕봉 정상에 ‘한국인의 기상이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씌어진 정상석이 서 있군요. 정상에서 두 눈을 휘두르는데 사방 팔방이 시야에 가득 들어옵니다.
하늘은 맑고 부드러워 보입니다. 그 북쪽 하늘 아래 백두산이 있겠지요. 남쪽으로 중산리 계곡이 보이고, 동쪽으로 웅석봉이 기다랗게 앉아 있고, 서쪽으로 촛대봉이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왕시루봉은 바다 속의 섬처럼 우뚝 솟아 있고, 그 앞쪽으로 수많은 능선들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산들은 태초에 하나였다는 사실을 믿고 있지만 산들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처음입니다. 서로 자웅을 겨루는 것인지,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는 것인지, 능선과 골짜기가 서로 몸을 섞으며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수히 많은 산봉우리와 능선들이 겹겹이 천왕봉을 에워싸고 있네요.
천왕봉 정상에서 발길을 돌립니다. 정상은 잠시 맛보고 느끼는 곳이지 오래 머무르는 곳이 아니지요. 언제 폭풍우가 몰아칠지 모르는 곳이 정상이잖아요. 정상에서 내려가면 다시 연하봉과 촛대봉과 벽소령과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를 이어 오를 겁니다.

11.변산반도 일주
99km 해안선 따라 흐르는 잔잔한 은빛바다와의 대화
예전부터 변산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인적이 드문 내변산에 올라가 산세에 휩싸인 변산 팔경의 신비도 파헤쳐 보고 싶었고 바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보고도 싶었다. 그러다 마주친 조용한 포구 마을에 앉아 달달한 소주 한 잔과 싱싱한 회 한 점을 먹으며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는 서해의 낙조를 보고 싶었다.
글·사진 김정민 기자 취재협조·류종남 (향도사학가)

부안에서 변산 반도로 진입하는 코스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부안 IC에서 진입하여 30번 국도를 타고 새만금방조제가 있는 길로 들어서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곰소항과 가까운 줄포 IC로 들어와 30번 국도를 타는 방법이다.
이 해안 도로를 달리다보면 삶의 희노애락이 드러난다. 아름다운 바다풍경, 연이어 나타나는 가난한 포구 마을, 물 빠진 갯벌 위에 애처롭게 주인을 기다리는 갯배, 해수욕장에서 가족들과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들. 위도 원자력발전소 폐기물 매설에 반대하며 붙여놓은 분노의 노란 깃발과 플래카드. 변산반도 30번 국도 99km길에는 삶이 있어 즐겁고 슬프고 기쁘다.

맨 처음으로 들른 곳이 개암사. 개암사는 내소사와 함께 백제 시대 때 창건된 절이지만 잘 알려진 절은 아니다. 예전 건물은 허물어지고 새로 지었는데 편의에 의해서 축대와 건물을 세웠기 때문에 아름다운 건축미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나마 개암사 들어가는 길에 조성된 호박돌 깔린 길이 가장 정겹게 느껴진다. 이 길을 포장하겠다고 나섰을 때 변산의 유지들은 승려들을 열심히 뜯어말렸다고 하는데 천만다행이다.
사찰 대웅보전에는 도깨비가 산다. 그것도 처마 밑에 2마리나 있다. 잡귀를 쫓으려고 대웅보전 처마 아래에 2개의 귀면을 새겼는데 이 도깨비 얼굴을 가리지 않게 하느라고 대웅보전의 현판을 작게 제작했다. 추녀 끝에는 각기 다른 동물의 머리가 새겨져 있는데 좌측에는 용이 우측에는 호랑이가 새겨져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용을 뜻하는 것이라 했다.
개암사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내려왔다가 30번 국도로 들어오면 석포 삼거리가 나타난다. 그 곳에서 우회전해서 들어가면 유명한 내소사가 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6백m길에 1백50살 정도 먹은 멋진 전나무들이 양 옆으로 늘어서 있다. 내 키보다도 몇 배는 더 큰 전나무숲 산책길은 마음을 경건하게 만든다.
내소사에 들어서면 스님들의 염주를 만드는 보리수나무 뒤로 대웅보전이 있다. 워낙 오래되서 화려한 단청도 세월과 함께 모두 벗겨졌지만 8짝 문살에 새겨진 연꽃, 국화, 모란 같은 꽃문양만큼은 선명하다. 단청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면 참 예뻤을텐데 속절없는 세월이 아쉬움만 남긴다.
내소사에 가면 꼭 마셔볼 것이 있다. 내소사 일지스님이 개발했다는 일명 ‘솔바람차’다. 사천왕문 왼편에 있는 상점에서 파는데 한 잔에 3천원. 솔잎향을 어떻게 우려냈는지 시원한 차 한 잔을 마시면 잎에서 솔바람이 부는 것 같다.

이렇게 천천히 사찰을 둘러보다보면 배꼽시계가 사정없이 울린다. 곰소항에 가면 젓갈시장 내에 횟집과 젓갈집이 많다. 바다가 보이는 난전 식당에 앉아 싱싱한 횟감을 먹을 수 있다. 기왕이면 곰소의 향을 느낄 수 있는 젓갈백반을 선택하기를. 백반을 시키면 9가지 젓갈이 나올 정도로 푸짐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맛있는 식사와 쇼핑을 즐기고 난 후 또다시 떠나야 할 곳은 왕포포구다. 바다낚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포구이다. 물이 빠지는 날이면 갯벌체험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물때를 잘 맞춰서 들어가야 한다. 이곳에서 5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노송이 병풍처럼 둘러진 모항 해수욕장이 있다.
해수욕장 뒤로는 기암괴석과 갯바위 낚시터로 유명한 조그만 포구가 있다. 너무 평범해서 튀는 포구.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가끔씩 문인들의 글에도 심심찮게 등장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언제고 다시 한 번 가봐야지.
모항은 낙조도 유명해서 관광사진에 자주 등장한다. 이렇다 보니 부안군에서는 모항을 개발하겠다고 나섰는데 조그만 포구의 맛이 사라질까하는 걱정도 앞선다.

변산은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 강화 석모도에 이어 서해안의 3대 낙조로 불릴 만큼 저녁 무렵이면 아름다운 그림이 펼쳐진다. 모항을 비롯하여 전북학생해양수련원 앞에 있는 솔섬, 해넘이 채화대가 있는 격포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낙조가 그야말로 일품이다.
모항을 벗어나 새만금 방조제 방면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이제부터는 해수욕장이 펼쳐진다. 상록해수욕장, 격포해수욕장, 고사포송림해수욕장, 변산비키니해수욕장이 차례로 나타난다. 상록해수욕장 옆에는 거대한 오토캠핑장 시설이 있어 텐트를 치고 지낼 수 있는 공간도 있다. 해수욕장에 들어갈 때는 입장료 관계가 조금 복잡하다. 국립공원, 공무원 관리공단 등 요금받는 기관이 다르기 때문에 이중으로 요금을 내는 것은 아닌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해수욕장 근처에도 볼거리가 있다. 요즘 부안에서는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촬영이 한창이다. 운이 좋으면 해안가에서 이들의 촬영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데 세트장이라도 확실하게 구경하고 싶다면 부안영상테마파크에 가면된다. 격포근처에서 테마파크로 빠지는 도로가 있다. 촬영이 본격화 되면 입장료도 받을 예정이다.
격포항 근처에는 그 유명한 채석강이 있다. 채석강은 세월이 흐르면서 단층과 습곡이 유난히 발달한 기암절벽이다. 절벽의 모양새도 중요하지만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20여개의 해식동굴을 구경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해식동굴을 통해서 바다를 바라보면 또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묘해진다. 그러나 이 동굴 안에 들어가 보려면 물이 빠지는 썰물시점에 들어가야 한다. 밀물 때면 1~2m 높이로 물이 올라와 있어서 닭이봉이라는 유명한 절벽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채석강에서 격포해넘이 해수욕장을 넘으면 적벽강이 보인다. 적벽강은 중국 북송 때 시인 소동파가 놀았다던 중국의 적벽강과 모양이 흡사해서 그 이름을 따서 불렀다. 검붉은 색 바위와 채석강과 비슷한 모양의 지층바위들이 병풍을 두른 듯 펼쳐져 있다.
격포지역을 지나 변산 해수욕장을 지나면 그 유명한 새만금 방조제가 보인다. 길이 33km의 세계 최장의 방조제가 될 거라는데 벌써부터 우려 반 기대 반의 목소리가 높다. 자연파괴의 현장이 될 것인가 역사의 한 자락을 장식할 이로운 사업이 될것인가는 좀 더 두고봐야 할 것같다. 이것 뿐이 아니다. 아직도 앙금이 가시지 않는 핵폐기장 시설을 놓고 격포리 주민들은 농성을 멈추지 않고 있다. 노란 깃발과 선착장에 노란색으로 그려 넣은 표식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과연 자연을 살리면서 발전을 모색할 수는 없는 건지….
이런 생각을 하며 달리는 사이 99km의 변산 해안일주는 끝이 난다. 만약 해안일주를 결심했다면 급하게 서두르지 말 것을 권한다. 느림의 미학이랄까? 가는 걸음을 한걸음 늦추고 마음을 열면 풍경이 보인다. 가는 길에 은빛 바다와 대화도 나누어 보고 갓 잡아올린 바다생선으로 회도 한 점 먹어보고, 시원한 바다에서는 멋진 절경과 어우러진 레포츠도 즐기고…. 급하게 서둘러 봐야 제대로 즐기지 못한 서운한 마음과 주머니 속에 어지럽게 쑤셔 박힌 입장료 영수증만 남을 뿐이다.

12.전남 순창 두루 둘러보기
옛 돌들과 이야기 나누며 가는 길
이 길은 한결같다. 단 한 번도 싫은 적이 없었다. ‘나무’의 힘을 알려주는 길이다. 아니 자연을 이야기하는 길이다. 마음 답답하거나 우울할 때면 자주 달려오고픈 곳이지만 공연히 어여쁜 풍경에 티 묻힐까 봐 아끼고 아끼다 달려보곤 하는 길이다. 그렇게 아끼다 이 길로 시작하는 것이니 이번 우리가족 나들이는 더 없이 좋으리라.
글·사진 한결가족
‘동광주’를 벗어나 ‘담양’가는 길은 이제 더 시원스레 뚫린 덕에 국도인데도 고속도로 같다. 망월동의 5.18 묘지도, 광주댐 근처의 소쇄원과 식영정 가는 길도, 담양 초입의 면앙정과 송강정, 명옥헌 그리고 한국대나무박물관도 여전히 우릴 유혹하지만 오늘은 그냥 고개 돌리고 지난다. 며칠 전부터 이번 나들이는 오로지 정해진 지역에만 충실해 보기로 마음먹은 터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돌 것이다.
초입에 말한 ‘담양-순창’간의 ‘메타세콰이어’길. 오늘 우리 나들이를 더 푸르게 만들어주는 이 길은 지금은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길이 됐지만,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걸 담양군민들이 악착같이 지켜낸 길이다. 이 길을 달릴 때면 꼭 오대산 월정사 들어가는 전나무 길도 함께 떠오르곤 한다. 우리 땅에 이런 나무들이 듬직하게 서 있는 길이 있다는 게 얼마나 뿌듯하고 오진지….
그 멋진 길 따라 24번 국도를 타고 순창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순창 고추장 마을’이 있다. 수랏상에 진상하던 고추장이었고 상품으로도 나와 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겠고, ‘문옥례여사 할머니 고추장·장아찌집’이 첫손에 꼽힌다고 하는데, 한옥 모양으로 만든 마을과 집집마다 처마에 매단 갖가지 메주들과 집안 가득 들어찬 항아리 풍경만으로도 온 가족이 한 번 나들이 할만한 곳이다.
고추장 마을을 뒤로하고 조금만 가면 왼쪽으로 ‘강천사’가는 793번 국도를 만나게 된다. 강천사는 절 자체보다는 들어가는 길의 경치와 ‘강천산’이 더 멋들어져 지인들에게 산행지로 자주 권하기도 하는 곳이다. 근처의 추월산, 병풍산, 산성산 등 어느 산을 올라도 어우러지는 곳. 휴일이라선지 오늘은 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지만 너무도 이쁘고 소리까지 맑은 내가 있기에 손으로 물결을 움켜쥐어 보고 발도 담그면서 천천히 음미하며 걷기에 참 좋은 길이다. 우리 가족은 5월과 10월에 가장 멋들어진 길이 된다는 데 동의한다.
대웅전과 요사 너덧 채의 당우가 늘어선 ‘강천사’는 아주 작은 절이다. 신라 진성여왕(887년)때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며 한 때 열두 개의 암자를 거느려 천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기도 했단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 선조(1604년)때 소요대사가 재건했으나 또 한국전쟁 때 모조리 재가 되었다. 지금 건물은 근래에 지은 것들이고 옛 맛은 오층석탑에서만 느낄 수 있다. 나들이객들도 절내를 두루 둘러보기보다는 절 앞의 샘에서 긴 길 걸어온 목을 축이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듯해 우리도 한 모금 머금어 보지만 너무 이쁜 계곡만 바라보고 와서인지 물맛도 그 효용이 덜하다.

준비하면서 보니 순창은 남근석과 돌장승, 입석이 많아 ‘돌 지역’이라 할 만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그 곳으로 향한다. 강천사에서 오던 길을 밟아 ‘팔덕면’ 소재지의 팔덕초등학교 건너편의 시멘트 길로 들어선다. 2년 전만 해도 표지들이 없어 헤매다가 지나가는 아주머니께 여쭈어 겨우 찾았던 ‘산동리 남근석’ 이젠 안내판이 잘 되어 있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당산나무와 모정이 있고, 한 켠에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4호’인 남근석이 서 있는데 표면에 가장자리가 말린 연잎과 연꽃 봉오리, 그리고 줄기가 세심하게 돋을 새김되어 있다. 그 동안 우리 땅 여러 곳의 남근석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 본다.
5백여년 전에 한 여장부가 남근석을 두 개 깎아서 치마에 싸 가지고 오다가 무거워서 하나는 창덕리에 놓고 하나는 산동리까지 가지고 와서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지만 누가 세웠건, 만든 목적이 무엇이건, 남사스런 물건을 조금도 남사스럽지 않게 온 정성을 다해 새겼을 석공의 마음을 잠시나마 더듬어 본다. 커다란 나무 아래, 그것도 철책에 둘러싸여 있어 남근석이 조금도 힘을 못 쓸 것 같은 게 안쓰러울 뿐이다.
짝을 이룬다는 ‘창덕리 남근석’으로 향한다. 산동리보다는 찾기가 어렵다. 묘지나 정자가 있으면 좋을 듯한, 지금은 계단까지 세운 둔덕 위에 점잖게 서 있다. 산동리의 설명과는 달리 태촌마을에 살던 거지가 신분상 결혼이나 성생활을 할 수 없는 설움을 달래느라 남근을 깎아 세웠다고 써 있는데, 산동리의 것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약간 작은 듯하고 역시 아래 부분에 연꽃을 새긴 점이 독특하다. 옥동자를 낳을 수 있다는 믿음 덕에 매년 대보름이면 많은 부녀자들에게 공을 받았을 남근석은 양이 벌건 들판에 세워져 있어선지 더 당당하고 씩씩해 보인다.

강천사에서 나오는 길, 팔덕면 소재지를 조금 지나면 오른쪽에 구룡리 입석마을 표지석이 서 있다. 시선을 돌려보면 마을 앞 논가운데 서있는 당산나무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돌무더기에 선돌이 세워져 있다. ‘구룡리 입석·당산나무’는 나무에 비해 선돌이 왜소해 보이는데 나무도 아주 큰 편은 아니지만 논 가운데 한 그루만 우뚝 서 있어 당차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대보름이면 입석과 당산나무 아래서 제를 지내고 풍물을 잡기 시작하여 동네 구석구석을 지신밟기하던 어린 시절의 우리 동네 모습이 여기에도 있었으리라. 이런 곳을 볼 때면 자연을 사랑하고 때론 숭배하기도 했던, 그리하여 삶의 터전을 보호받고 싶어 하던 우리 선조들의 여린 마음이 아련히 느껴지곤 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들녘에서 일하던 시절 같으면 새참 먹을 시간도 한참 지났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날이 갑자기 더 더워진다. 쏟아지는 햇살을 잠시 피하고자 돗자리를 꺼냈다. 다행히 들녘엔 일하시는 분이 없다. 나무 아래 돗자리에 드러누워 종알거리다가 들판을 바라보니 엊그제 심은 듯 어린 모가 참으로 앙증맞다.
“자, 자아아~~ 어이~” 소리를 맞받으며 못줄을 잡던 시절이 그리워져 시선 돌리는데, 어찌나 무성한지 햇살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나무의 이파리들이 소란스럽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들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우리 몸이 출렁인다. 마치 물 위에 배를 띄우고 드러누워 위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참 좋다. 정말 좋다.

다시 24번 국도와 만나 순창읍으로 들어간다. 나무 아래서 흐뭇한 게으름을 피운 덕에 늦은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눈에 띄는 건물이 있어 멈춘다. 순창초등학교 내에 있는 ‘순창 객사’다. 지금은 아이들 놀이터가 된 이곳은 조선시대 순창에 내려온 관리나 사신이 머무르던 곳으로 영조35년(1759)에 지었다 한다.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이 일본군에게 붙잡힌 아픈 곳이기도 한데 지금도 큰기둥과 건물이 예전의 세를 짐작하게 한다. 저런 건물을 지금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 객사에서 나오는데 군청 옆에 ‘한해오 효자비’가 현대의 물결 속에 외롭게 서 있다. 그래도 이 학교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마음가짐이 다르지 않을까….
‘이야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렇게 어여쁜 돌장승이 있다니.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남계리 돌장승’. 이제까지 보아온 장승은 대부분 부라린 눈에 툭 튀어나온 이목구비, 무서운 모습이었는데 이젠 그 생각을 바꾸어야 할 듯하다. ‘중요민속자료 제 102’호인 이 장승은 돌옷을 입은 사내아이와 새색시의 얼굴을 합쳐 놓은 듯 장난기 어린 웃음이 일품이다. 정말로 기분 좋은 천진난만함이 절로 묻어난다. “도리 도리 짝짝! 오메, 이쁜 거!” 순창읍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남원쪽으로 가다가 ‘은행교’ 바로 앞에서 왼쪽 둑길로 3백m 가량 가면 강쪽이 아닌 들판쪽 둑 아래 왼쪽에 홀로 서 있다. 북쪽의 허한 지세를 보완하도록 세웠다는데 제주도의 돌하르방과 닮은 것도 같고, 양식은 미륵을 닮은 듯도 하다. 지금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것으로 끝없이 복을 짓고 있는 어여쁜 돌장승이다. 다시 순창터미널을 찾아 그 옆으로 난 임실·전주쪽의 27번 국도를 따라 2백m 쯤 가다보면 읍내 벗어나기 직전 왼쪽에 ‘충신리 돌장승’이 있다. 보통의 돌장승처럼 대강 다듬은 모습인데 사각의 돌기둥에 눈은 작고 눈썹은 아주 길고 크다. 언뜻 보면 조용하신 할아버지 모습인데 턱아래 작은 젖가슴이 볼록하게 새겨있어 여장승이라 본단다. ‘중요민속자료 제 101호’로 순창지방의 액운과 질병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고 정월초면 당제와 함께 장승제를 올리는 풍속도 있었다 한다.
이제 27번 국도를 따라 내일 둘러 볼 임실로 향한다. 자연휴양림이 있는 ‘회문산’은 우리 가족이 자주 가는 곳이라 그냥 지난다. 회문산 자락엔 백제 무왕 때 창건,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자 만일 동안 기도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기록을 담은 비석이 있는 ‘만일사’도 있지만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차를 돌리지 않고 지나친다. 자꾸만 ‘남계리 돌장승’의 웃음이 떠오른다. 장성, 담양, 곡성, 정읍, 임실과 접한 땅. 용골산, 회문산, 강천산이 있고 물이 맑은 고장. 남근석과 입석, 장승들의 마을공동체 문화 유적이 두드러진 것은 이 땅이 산과 구릉이 많고 농사지을 들이 적어 풍성한 농산물에 대한 염원이 더 간절했던 까닭 아닐까?

13.<백두대간 종주기④ 남덕유산>
전라도와 경상도가 등을 맞대고 있는 산
산이 깊으면 평화가 넘실거린다
덕유산은 전북 무주와 장수, 경남 함양과 거창에 걸쳐 30km를 이루고 있다. 덕유산을 종주하며 산세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산길의 평화로움에 반했다. 그리고 장중한 힘에 머리를 조아렸다.
글·사진 박상대 기자

여름이 깊어간다. 주말마다 산을 타야하니 목요일부터 일기예보를 살핀다. 산에 오를 준비를 하는 금요일부터 마음이 설렌다. 어렸을 적 소풍날을 앞둔 기분이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려 산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생각이 달라진다. 하늘이 맑으면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고, 안개가 짙으면 입술을 깨문다. 비가 오면 혀를 차며 허허 웃고 만다.
육십령에서 산길을 오르는데 하늘이 맑다. 덕유산, 그 이름 탓이리다. 작은 봉우리를 타고 오르자 멀리 할미봉이 보인다. 거대한 암봉이 할머니의 곱사등이처럼 산마루에 엎드려 있다. 바위덩이 하나에 구멍이 뚫려 있어 시선을 당긴다.
소나무 숲이 이어지고, 다시 참나무 숲이다. 직사광선에 수풀은 숨을 죽이고, 등산객들만 씩씩하게 능선을 오른다.
능선 왼쪽은 전북 장수군 장계면, 오른쪽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 전라도와 경상도가 등을 맞대고 서로 의지한 채 서 있다. 그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발걸음이 상쾌하다.
▲할미봉 정상에 있는 바위 봉우리 셋.
할미봉 오르는 길에 엉겅퀴가 분홍색 꽃을 피우고 있다. 청년시절 나란히 밭둑길을 걷다가 엉겅퀴 꽃을 보고 탄성을 지르던 처녀가 있었다.
“이게 엉겅퀴예요? 책에서 보고 실물로는 첨이네요. 진짜 예쁘다. 어쩌면 핑크색이 이렇게 곱지요? 사람한테 이런 색을 만들어 내라면 못하겠죠? 근데 왜 엉겅퀴 꽃에만 나비들이 서너 마리씩 붙어 있죠?”
그녀의 질문에 나는 답해 주지 못했다. 다른 꽃들을 버려 두고 나비들이 왜 엉겅퀴에만 고개를 박고 있는지? 20년이 지난 지금 산을 오르면서도 나는 그 까닭을 모른다. 굳이 답하라면 ‘나비들도 예쁜 것은 알아 가지고…’ 하리다.
엉겅퀴와 호랑나비. 내리 쏟아지는 직사광선, 그리고 상큼한 풀내음. 산 아래서는 이라크 전쟁과 파병문제로 시끄럽지만 여름 산에는 평화만 넘실댄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가깝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이마에서 눈속으로 스며드는 땀을 씻어내며 능선을 오른다. 산들바람이 분다. 등산객에게 바람은 고마운 길동무다. 금방 왔다가 금방 달아나는 존재지만 바람은 반갑고 고마운 친구다.
바위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며 내가 올라온 뒤를 돌아본다. 산행은 앞만 보고 가면 손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뒤를 돌아보며 올라야 한다. 여지껏 걸어온 길이 얼마나 장대한 공간인지,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이었는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산행은 인생행로와 같은 것이다.

▲남덕유산 정상에 오른 솔터산악회원들. 정상은 덕유산에서 두 번째 높은 봉우리다. ▶장수 덕유산을 오르는 능선에는 암봉들이 많다.
할미봉에서 장수덕유산까지 2시간 30분이 걸릴 거라고 나무 판자 이정표에 적혀 있다. 산행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세 가지 질문을 많이 받는다. 힘들지 않은가? 낭만(혹은 재미)이 있는가? 도대체 왜 산에 다니는가? 그리고 체력이 좋아졌겠다고 미루어 짐작한다.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여유로운 마음이 생겼어요’이다.
몇 시간, 몇 킬로미터라는 이정표를 볼 때마다 다리에 기운을 몰아 넣는다. ‘겨우 몇 킬로미터를 왔구나’‘이제 얼마 남았구나’ 이런 덧셈 뺄셈을 하며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들에서 일을 하다가 “사람 몸에서 젤로 게으른 게 뭔지 아냐?” 물었다. 그리고 멀뚱거리는 내게 “눈이란다” 하셨다. 처음 논밭에 들어섰을 때 ‘도대체 언제 일을 다 한단 말인가?’ 하고 겁에 질린 내게 ‘해질 무렵이면 다 끝낼 수 있다’며 들려준 가르침이었다. 이즈음 산에 오르면서 할머니 말씀을 떠올린다. 시간이 흐르면 해결되는 것을, 열심히 움직이면 극복할 수 있는 것을 왜 한사코 눈은 게으름을 피우려하는 건지….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길섶에 피어 있는 꽃들이 예사롭지 않다. 철쭉이 끝물이다. 화무십일홍 따위는 말하지 말자. 바위 밑에 현호색이 피고, 때늦은 산조팝도 하얗게 피어 있다. 분홍색 앵초와 노란 솜방망이와 양지꽃도 능선을 평화롭게 장식하고 있다.

아슬아슬한 바위구간을 거쳐 장수덕유산 정상에 다다랐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하나씩 올려놓고 간 돌멩이들이 돌탑을 이루고 있다. 돌탑 아래로 3분여를 내려가니 바위샘이 있다. 바위틈에서 졸졸졸 물이 흐른다. 바위틈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이 경이롭다. 신이 아니면 누가 이런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 물을 한 바가지 떠서 한 모금 삼키는데 목구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이가 시릴 정도로 물이 시원하다. 물을 한 바가지 더 마시고, 빈 물병을 채워 들고 다시 산을 오른다.
▲항적봉 가는 길목에는 살아서 천년, 뿌리로 천년을 산다는 주목나무 군릭지가 있다.
건너다 보이는 산이 남덕유산이다. 장수덕유산과 더불어 해발 1천5백 미터가 넘는 높은 산이다. 남쪽으로 함양군 서상면 골짜기가 길다랗게 뻗어 있고, 북쪽으로 삿갓봉과 향적봉을 잇는 대간 마루금이 굵은 근육을 꿈틀대고 있다.
장수덕유산에서 철계단을 내려가는데 시야가 확 열린다. 능선마다 계곡마다 이름이 있을 텐데 다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줄 수 없음이 아쉽다.
산속에서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 뻐꾸기가 울고, 산새가 운다. 얼굴을 안 보여주니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노래를 한다. 드문 드물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 소리는 지친 등산객에게 위로가 된다.

남덕유산 정상. 사방 팔방이 다 시야에 들어온다. 온천지가 발 아래다. 무엇이 더 부러우랴. 사람들은 바위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넉넉한 부자가 된다. 손가락으로 구획을 그리며 “저 산에서 이쪽 산까지는 내껍니다” 한다. “그러세요. 그 다음 산에서 저쪽까지는 제겁니다” 하고 웃는다. 이것은 욕심이 아니다. 여유다. 서로 다툴 필요가 없고 욕심부릴 필요도 없다. 아무도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산에는 평화가 넘치는 법이다.
이제 삿갓골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삿갓골재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나머지 구간을 가야 한다. 얼마 만인가. 산에서 밤을 샌 것이 몇 년은 된 듯하다.
산에는 땅거미가 일찍 깔린다. 어둠이 산골짜기를 거쳐 삿갓골재 산장으로 밀려온다. 일몰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동엽령 가는 언덕으로 올라가는데 그토록 맑던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해는 찾지 못하고 바위에 걸터앉아 땀에 젖은 옷을 말린다.
덕유산이 깊어진다.
▲삿갓재 산장지기 황인대.안도홍님과 솔터산악회 정남회 회장과 우연희 대장(오른쪽부터) 산장에서 숙박하려면 꼭 15일전에 예약해야 한다. ▲덕유산 주봉인 항적봉. 뒤쪽으로 무주리조트와 구천동이 있다.
▲덕유산에는 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울타리를 많이 쳐놓았다. ▲일출을 보여주지 않는 대신 햇빛을 보여준 덕유산 하늘
멀리서부터 어둠 속으로 천천히 빨려든다. 산마루에 앉아 어둠 속으로 빨려드는 까마득한 산마루를 바라본다. 어느 시인은 그 산마루의 산 그림자들을 누이의 눈썹 같다고 말했지만, 글쎄다. 오랜 옛날부터 시인들은 산 그리메(그림자)를 붙들고 노래하고 울었다. 홀로 바위에 앉아 산 그리메를 감상하는데 문득 ‘혼자’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그립다. 산아래에 있을 그리운 사람들이 떠오른다. 캔맥주 한 잔이 같이 그립다.

산장의 밤은 실망 투성이였다. 별들은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없고, 날짜를 잘못 선택한 탓으로 달도 없다. 멀리 보이는 마을의 전깃불만 여행객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한다. 이런 밤에 맥주가 없다는 사실이, 준비성 부족한 내가 정말 싫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이른 새벽에 다시 산을 오른다. 헤드랜턴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여명이 밝아온다. 푸른 숲길에서 산죽과 풀잎들이 몸을 비벼댄다. 산들바람이 깊은 잠에 빠진 풀들을 흔들어 깨우는 모양이다. 동녘 하늘은 어둡고, 바람이 차다. 몸을 움츠리며 걸음을 재촉한다. 전망이 좋은 곳에서 일출을 감상하기 위함이다.
참으로 고요한 아침이다. 이토록 고요한 산속에서 왜 사람들은 편을 갈라 총질을 하고 서로 원수라며 죽이려 했을까. 방정맞게도 이른 아침 숲속에서 저 지난 날 난리 때가 떠올랐다. 그러나 세월의 더께에 묻힌 건지 바람에 날려간 건지 ‘원수들’의 아우성은 들리지 않고 풀이파리들의 잠깨는 소리, 기지개 켜는 소리만 들린다.
한 시간 쯤 걷자 무룡산 정상이다. 동쪽 하늘에 구름이 잔뜩 깔려 있다. 아침이 열리는데 왜 해는 보이지 않는가. 해넘이를 못보고 해돋이도 못보고…기도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아쉬움을 달래는데 구름 사이로 하늘이 열린다. 그리고 천지창조의 현장처럼 햇빛이 쏟아진다. 아직 정상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달려 오르라는 사인을 보냈다.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다. 이른 아침 서둘러 산에 오른 보람을 만끽한다.
동엽령을 지나 백암봉까지 오르는 길에는 밧줄 울타리가 자주 눈에 띈다. 입산 금지. 산도 안식이 필요하다. 상처 입은 산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울타리 너머로 수풀이 제법 우거졌다. 풀잎들이 바람과 함께 춤을 춘다. 블루스를 추다가 탱고를 춘다. 그 수풀 사이에서 수많은 들꽃들이 하하 웃는다. 풀향기가 코끝을 파고든다. 하얀 나비들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에덴 동산이 따로 없다. 잠시라도 앉아서 지친 몸과 영혼을 쉬고 싶다.
▲임봉에 앉아 지친 몸을 쉬고 있는 사람들.
백암봉에 오르니 중봉과 향적봉이 늠름한 봉우리를 곧추 세우고 있다. 계속 직진하면 향적봉이고 대간길은 오른쪽으로 뻗은 지봉 능선을 타야 한다. 향적봉을 다녀오는데 한 시간이 좀 더 걸린다. 그러나 덕유산에서 가장 높은 향적봉을 모른 체하고 지나칠 수는 없다. 대부분 향적봉을 다녀온다.
중봉에서 향적봉까지 가는 길목에는 구상나무와 주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푸른 잎보다 앙상한 가지만 남았을 때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다. 앙상한 가지에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이파리만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구상나무. 그래도 살아야 한다며, 그래도 품위를 지켜야 한다며 꿋꿋이 서 있는 그들에게서 강한 생명력과 절개를 배운다.
이틀동안 덕유산에서 살았다. 굵은 능선을 타고, 깊은 산 그림자들을 보았다. 벌과 나비가 춤을 추고, 새들이 노래하고, 풀과 바람이 춤을 추는 산마루를 걸었다.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평화로운 풍경에 취해 살았다.

무주일성콘도 / 여름산 매미소리가 가득한 곳
무주로 가는 길은 기분이 좋다. 등산객, 관광객이 많이 찾아도 계곡은 여전히 깨끗하고 산은 푸르다. 덕유산은 사계절이 다 아름답지만 매미가 숲을 온통 울리는 여름산이 그만이다. 그 싱싱한 산에 푹 안겨있는 무주일성콘도는 그래서 하룻밤 지내기에 좋다.
개관한지 2년, 건물이 깨끗하다. 거실 창안으로 맞은편 산이 가득 들어온다. 테이블 의자에 앉아 산을 마주보고 커피를 마셔도 좋을 듯. 맥반석사우나, 황토방, 쑥탕, 오락실, 노래방, 아이들이 물놀이 할 수 있는 야외수영장 등 휴식공간이 잘 마련되어 있다.
무주일성콘도에는 가까운 관광지가 많이 있다. 덕유산, 나제통문에서 백련사까지 이르는 30km 구천동 계곡 등. 특히 일성콘도와 30여분 거리에 있는 안국사는 입구까지 길이 포장되어 있어서 드라이브를 할 수 있다. 올라가는 길에 산 정상에 있는 산정호수를 볼 수 있다.
객실수 23평 31실-정상가 21만원, 27평 71실 정상가 25만원, 35평 18실 정상가 31만5천원 (성수기 때는 정상가 요금을 받으나 객실수가 남을 때 30∼40% 할인됨) 문의 063-324-3939

●가는 길
옥천IC ☞ 영동IC ☞ 학산 ☞ 무주삼거리 ☞ 덕유산(구천동) ☞ 나제통문 ☞ 무주일성콘도

14.화순 쌍봉사 철감선사부도
깊고 그리고 넓게 보는 심미안
철감선사부도를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이다. 어느 날 남도에서 나를 애타게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하고 며칠동안 열병에 시달리다 쌍봉사를 찾았다.
글·사진 이종원 (객원기자)
아무 준비 없이 그저 몸만 차에 실었다. 곡성 태안사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쌍봉사에 도착한 때는 애석하게도 깜깜한 밤이었다. 부도를 꼭 봐야 하는데 걱정이 앞섰다. 해가 지면 도굴의 우려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때문이다. 때마침 스님이 경내를 거닐고 있었다.
“스님. 쌍봉사 부도를 보려고 천리 길을 달려 왔습니다. 꼭 올라가게 해 주십시오” “보고 싶으면 봐야지요” 잔잔한 미소를 던지며 선뜻 허락하신다. ‘쏴쏴’거리며 대나무끼리 몸비비는 소리가 섬뜩했지만 부도를 만나하려는 나의 의지를 꺽지 못했다. 비탈길로 조금 올라가니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부도의 윤곽이 잡힌다.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천년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돌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레 손을 댔다. ‘아! 이 곳이 가릉빈가 부분이구나. 다리를 물고 있는 사자상이구나. 사천왕상의 갑옷 좀 봐라. 배홀림기둥에 서까래도 있네’ 도록의 사진을 상상하며 손끝으로 철감선사 부도를 느껴본다. 혼자 주절거리다 보니 어느덧 신라 석공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 일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만남인 것이다. 그 감동을 한아름 짊어지고 산을 내려 왔다. 한밤중에 산을 오르는 내가 걱정이되는지 그때까지 스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깜깜한데 보이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도 안 보여서 손끝으로 느끼고 왔습니다” “마음으로 느꼈으면 두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 한마디 남기고 승복을 휘날리며 휑하니 방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댓돌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하얀 고무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스님은 들어갔지만 내게 주신 마지막 말씀은 내 귓가를 떠나지 않고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잡았다. 그 후 나는 그 화두를 마음속에 품고 우리 유물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깊게 그리고 넓게 보는 심미안’이것이 내가 쌍봉사에서 느꼈던 교훈이다.

오늘 다시 쌍봉사를 찾았다. 절 입구에 도착했을 때부터 야릇한 흥분에 휩싸였다. 몇 년 동안 외국에 나가 있던 애인을 다시 만나는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지난번엔 손끝으로 감동 받았다면 이번엔 눈으로 느껴볼 차례다. 절 주차장에 차가 서자 일행 중 가장 먼저 부도를 향해 뛰어 올라갔다. 마음이 조급했던 모양이다. “쏴쏴” 소리를 내며 나를 무섭게 했던 대숲소리도 한 낮에는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세속의 때가 씻겨나가는 느낌이 든다. 비탈길을 한달음에 올라갔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부도 철감선사부도(국보 57호)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우리 나라 부도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부도가 3개 있다. 지리산 연곡사 동부도와 여주 고달사지 부도, 그리고 이 철감선사부도다. 연곡사 동부도는 섬세한 여성미를 가졌고 고달사지 부도는 웅장한 남성미가 넘쳐흐른다. 반면 철감선사부도는 두 가지의 장점을 모두 지니고 있다. 3기의 부도를 모두 사랑하지만 그래도 애착이 더 가는 부도가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철감선사부도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우리네 화강암은 단단하여 정을 조금이라도 잘못 내리치면 그 돌은 상처 입은 돌이지 작품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석공은 오로지 한 번의 망치질밖에 허용하지 않는다. 철감선사부도는 그런 완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긴박감이 느껴진다.
자세히 보면 용, 사자, 가릉빈가 등 여러 생명체가 새겨져 있다. 하나같이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이것이야말로 통일신라 미술의 결정체가 아닐까? 하대석에서는 구름 문양에 꿈틀거리는 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면에 보면 용머리가 마주보고 있으며 가운데 발로 여의주를 받치고 있다. 그 위에는 사자가 새겨져 있는데 연잎 기둥이 넝쿨처럼 풍성하고 자연스럽다. 팔각기둥 사이에 사자가 한 마리씩 새겨져 있는데 그 꿈틀거리는 모습이 볼만하다. 고개를 젖힌 모습, 웅크린 모습, 갈기를 세운 모습 등 매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대석에는 게 문양이 새겨져 있다. 불교의 남방전례설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닌지? 상대석에는 연꽃이 활짝 피어 있다. 꽃이 중첩되어 있고 내부에도 꽃을 가득 심어 놓았다. 연꽃 위에는 팔각에 기둥을 세워 놓았고 그 사이에 안상을 새겨 놓았다. 그 안에 천상의 새인 가릉빈가가 천상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가릉빈가는 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이며 극락정토에 살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머리와 팔을 가졌고, 새의 몸을 하고 있다.
몸돌에 새겨진 비천상과 사천왕상은 이 부도의 하이라이트다. 비천상은 비파를 연주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두 손을 모으고 천상에서 방금 내려온 모습을 하고 있다. 꿈틀거리는 옷자락이 하늘을 수놓고 있다. 사천왕상의 갑옷과 무기는 사실감 있게 표현하고 있고 옷주름까지 섬세하게 그려 넣었다.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문양과 고개를 살며시 돌린 머리는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들은 이곳에서 천상 세계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지붕돌 밑의 서까래와 부연을 바라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유유히 흘러내리는 기와를 보라. 본드로 붙인 플라스틱이지,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수막새와 암막새까지 새겼으며 막새마다 8엽의 연꽃 문양까지 새겨 넣었다. 이런 예술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 아닐까? 도굴로 인해 지붕돌 여러 곳이 깨져 가슴이 아프다. 인간의 탐욕은 늘 이런 결과를 초래한다. 대한민국의 최고의 미인에게 칼부림을 한 것을 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워낙 부도가 뛰어나다 보니 그 옆에 있는 철감선사부도비(보물 170호)는 별로 눈에 차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 역시 놓칠 수 없는 명작임이 분명하다. 여의주를 물고 희죽희죽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거북의 모습엔 힘이 서려있다. 왼발은 땅을 힘차게 누르고 오른발을 세우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은 가히 역동적이다. 비문은 온데간데 없고 이수만이 거북등에 올려져 있다. 구름 문양의 천상사계에는 용의 문양이 그려져 있으며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다.
쌍봉사 극락전은 세월의 무게 탓인지 단청이 지워져 나무결이 훤히 드러나 있어 화순의 새색시 마냥 정결함이 묻어난다. 다포식이지만 맛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단아한 느낌이 전해진다. 극락전 앞에 세워진 화환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부처님 오신날을 축하합니다. 화순천주교회 교우 일동”이라는 리본이 잔잔한 미소를 번지게 만들었다. 다른 종교를 존중하려는 따사로운 심성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쌍봉사 스님도 그걸 화답하듯 절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화환을 세워놓았다. 왠지 성탄절이 기다려진다. 화순성당 입구에 세워졌을 쌍봉사 신도들의 화환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쌍봉사 대웅전만큼이나 특이한 건물이 있을까? 정면 1칸에 측면 1칸에 3층 목탑 모양을 하고 있다. 원래 건물은 1984년 화재가 나서 모두 불타 버려 1986년 다시 복원했고 다시 균열이 보여 해체 수리하여 얼마 전 건물을 다시 올린 것이다. 불이 났을 때 다행스럽게도 석가삼존불과 대웅전 현판만은 간신히 꺼냈다고 한다. 화염속에서 살아남은 삼존불중 가섭존자의 미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감동이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으면서도 가섭존자는 초생달 같은 눈매와 천진난만한 미소는 지우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 백만불짜리 미소를 보고 있는 것이다.

몇 년 동안 마음속으로만 새겼던 부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차다. 도굴이라는 시련을 겪고 화재로 잿더미속에 아픔을 겪었기에 측은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행중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랐다. 자꾸만 뒤를 흘끔흘끔 쳐다본다. 마무래도 내 마음은 절을 떠나기 싫은 모양이다. 차안에서 오늘 만난 미인들을 몇 번이나 되새김질 했는지 모른다.

15.순창 강천산
강천산은 산책하기 좋은 산이다. 고도도 낮고 능선도 완만해서 오랜만에 나들이 나온 여행객들에게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하다.
글·사진 김정민 기자
사시사철이 아름다운 강천산
아침이슬이 나뭇잎에 살포시 걸쳤다. 찬바람이 산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팔을 한 번씩 쓸고 지나간다. 철쭉이나 진달래를 기대했건만 초입에 열심히 가꾼 철쭉 단지 외에는 푸른 나무들만 즐비하다. 바람은 서늘해도 공기가 맑아 코 속까지 시원하다.
산이라면 좁은 임도를 따라 숨을 헉헉대며 걷기 일쑤지만 이곳은 잘 닦여진 넓은 도로를 유유자적 걸어 올라갈 수 있다. 성형 수술을 많이 한 탓에 진정한 산으로서의 맛은 덜하다. 토속적인 흙길 대신 콘크리트 바닥에 정갈하게 놓인 다리와 인공 구조물들을 보면. 위대한 자연한테 감히 인간이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산사람들에게 강천산을 멋진 산이라고 소개하기에는 조금 심심한 감이 든다. 대신 노인과 이이들이 유람하듯 거닐면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강천산은 사계절이 아름다운 곳이다. 풍성한 나무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나날이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이곳은 예로부터 깊은 계곡과 맑은 물, 기암절벽이 병풍 치듯 늘어서 있어 ‘호남의 금강’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산세라 하여 용천산이라고 불렀지만 유명한 강천사라는 절이 생기고 부터 자연스럽게 ‘강천산’이 됐다.
1981년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되는 영광을 안았지만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한적하고 고요한 멋이 있다.
이 산에는 벚꽃나무와 단풍나무가 많다.
봄이 되면 강천호 주변과 등산로 곳곳에서 벚꽃의 향취를 느낄 수 있고, 가을이 되면 백양사, 내장산 못지않은 단풍이 유명하다.
진짜 멋을 아는 이들은 사람구경만 하고 마는 유명장소보다 한적한 강천산을 찾는다고.
여름에는 계곡물이 풍성해 본격적인 행락 시즌은 여름부터 시작된다. 산 아래 몇 개 없는 숙박시설에서는 7월부터 가격을 조금 올려 받는다.
강천산에 있는 여러 가지 명소들
강천산에는 폭포도 여럿 있는데 이 폭포에는 비밀이 있다. 바로 인공폭포라는 사실. 등산로 초입부터 거대한 장관을 펼치는 병풍바위와 구장군 폭포가 그것이다. 그 웅장함이 꽤 좋은 눈요깃감이다.
국립공원 내에는 강천호수와 강천 제 2호수가 있다. 이들 모두 인공호수다.
강천산 초입에 있는 강천 호수는 호남에서 제일 오래된 농업용수 저수지다. 강천 제 2호수는 1986년에 축조한 농업 및 관광용수 저수지로 계곡의 수위도 조절하고 강천계곡에 항상 물을 흐르게 한다.
등산로 초입에는 아래를 지나가면 지은 죄가 깨끗이 씻긴다는 병풍바위가 있다. 몇 개의 구름다리를 건너면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고찰 강천사를 만난다. 강천사는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한다.
고려 충숙왕 때에는 열두 개의 암자를 거느릴 만큼 큰 절이었으며 이곳에 묵고 있는 승려만 해도 오백여 명이 넘었을 정도라고. 그러나 그 부귀영화도 뒤로 한 채 그 때의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다가, 재건되고 다시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지금의 건물만 남았다. 현재는 그 터에 작은 사찰을 복원했는데 스님들이 수도에 정진중이다.
강천사 경내에는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질 때에도 남아있던 오층석탑이 있다. 고려 충숙왕 때 덕현스님이 강천사를 다시 지을 때 세운 것이다.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만들어 다보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탑은 신라 양식과 백제 양식이 섞여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강천사 앞에는 정면1칸 측면 1칸의 비각이 있다. 이것이 바로 삼인대다. 1506년 연산군을 폐위시키는 중종반정이 성공한 후 반정공신들은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신수근을 숙청했다. 반정공신들은 당시 왕비였던 신수근의 딸 신씨를 폐비시키고 새로운 중전을 맞았다. 그러나 새 중전은 10년 만에 사망했고 이 소식을 들은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은 비밀리에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했다. 후에 사람들은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라 하여 이 곳을 삼인대라 불렀다.
삼인대를 지나면 5분 거리 안에 아름다운 구름다리, 현수교가 있다. 지상에서 50m 높이에 있는 다리다. 이 다리로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강천사 위에서 바로 산을 타는 방법과 현수교 아래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방법이다.

강천산을 등산할 때
강천산의 등산로는 여러 갈래로 나뉜다. 산책만 즐기려면 입구에서 이어진 도로를 따라 현수교까지 걸어도 되지만 등산도 즐기겠다 싶으면 다양한 경로를 연구해야 한다. 구름다리까지는 도보로 30분, 구름다리에서 제 2호수까지 걷는다면 30분이 더 소요된다. 구름다리에서 제 2호수로 가는 길은 비포장 길도 걷고 개울도 건너야 하는데 아름다운 호수 풍경을 보는 값으로는 만족할만한 수준이다.
등산코스는 총 5가지가 있는데 도보로 구름다리까지 걸어갔다가 그 곳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보통 제일 많이 오르는 코스는 현수교를 지나 광덕산을 거쳐 금성 산성까지 이르는 코스다. 현수교를 거쳐 제 1봉을 오르는 코스는 등반코스 중 가파른 코스다. 신선봉이라고 부르는 봉우리에는 정자가 있어 강천산이 한눈에 보인다. 바위산이 가파르므로 주의해야 한다.
신선봉을 넘어가면 광덕산으로 이르는 길이 나온다. 꼭 산책코스 같다. 소나무가 우거지고 폭신폭신한 숲길이 이어진다. 광덕산을 정복하고 3km정도 더 걸어가면 산성산이 이어진다. 이 산성산에는 운대봉이라 부르는 산정상이 있다.
능선 중간에는 강천 최고의 명물이라 일컫는 북바위가 있다. 북처럼 원통으로 생겼다 해서 북바위라 부르는데 이 곳에서 담양호가 보인다. 산성산을 정복하면 철마봉, 노적봉, 시루봉, 운대봉, 연대봉 등 봉우리를 따라 산성이 나타난다. 이 산성이 바로 금성 산성이다. 삼한시대에 마한이 쌓은 성곽으로 추정하는데 국내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지만 대부분 파손되어 현재는 복원 중에 있다.

사시사철이 아름다운 강천산
아침이슬이 나뭇잎에 살포시 걸쳤다. 찬바람이 산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팔을 한 번씩 쓸고 지나간다. 철쭉이나 진달래를 기대했건만 초입에 열심히 가꾼 철쭉 단지 외에는 푸른 나무들만 즐비하다. 바람은 서늘해도 공기가 맑아 코 속까지 시원하다.
산이라면 좁은 임도를 따라 숨을 헉헉대며 걷기 일쑤지만 이곳은 잘 닦여진 넓은 도로를 유유자적 걸어 올라갈 수 있다. 성형 수술을 많이 한 탓에 진정한 산으로서의 맛은 덜하다. 토속적인 흙길 대신 콘크리트 바닥에 정갈하게 놓인 다리와 인공 구조물들을 보면. 위대한 자연한테 감히 인간이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산사람들에게 강천산을 멋진 산이라고 소개하기에는 조금 심심한 감이 든다. 대신 노인과 이이들이 유람하듯 거닐면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강천산은 사계절이 아름다운 곳이다. 풍성한 나무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나날이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이곳은 예로부터 깊은 계곡과 맑은 물, 기암절벽이 병풍 치듯 늘어서 있어 ‘호남의 금강’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산세라 하여 용천산이라고 불렀지만 유명한 강천사라는 절이 생기고 부터 자연스럽게 ‘강천산’이 됐다.
1981년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되는 영광을 안았지만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한적하고 고요한 멋이 있다.
이 산에는 벚꽃나무와 단풍나무가 많다.
봄이 되면 강천호 주변과 등산로 곳곳에서 벚꽃의 향취를 느낄 수 있고, 가을이 되면 백양사, 내장산 못지않은 단풍이 유명하다.
진짜 멋을 아는 이들은 사람구경만 하고 마는 유명장소보다 한적한 강천산을 찾는다고.
여름에는 계곡물이 풍성해 본격적인 행락 시즌은 여름부터 시작된다. 산 아래 몇 개 없는 숙박시설에서는 7월부터 가격을 조금 올려 받는다.
강천산에 있는 여러 가지 명소들
강천산에는 폭포도 여럿 있는데 이 폭포에는 비밀이 있다. 바로 인공폭포라는 사실. 등산로 초입부터 거대한 장관을 펼치는 병풍바위와 구장군 폭포가 그것이다. 그 웅장함이 꽤 좋은 눈요깃감이다.
국립공원 내에는 강천호수와 강천 제 2호수가 있다. 이들 모두 인공호수다.
강천산 초입에 있는 강천 호수는 호남에서 제일 오래된 농업용수 저수지다. 강천 제 2호수는 1986년에 축조한 농업 및 관광용수 저수지로 계곡의 수위도 조절하고 강천계곡에 항상 물을 흐르게 한다.
등산로 초입에는 아래를 지나가면 지은 죄가 깨끗이 씻긴다는 병풍바위가 있다. 몇 개의 구름다리를 건너면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고찰 강천사를 만난다. 강천사는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한다.
고려 충숙왕 때에는 열두 개의 암자를 거느릴 만큼 큰 절이었으며 이곳에 묵고 있는 승려만 해도 오백여 명이 넘었을 정도라고. 그러나 그 부귀영화도 뒤로 한 채 그 때의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다가, 재건되고 다시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지금의 건물만 남았다. 현재는 그 터에 작은 사찰을 복원했는데 스님들이 수도에 정진중이다.
강천사 경내에는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질 때에도 남아있던 오층석탑이 있다. 고려 충숙왕 때 덕현스님이 강천사를 다시 지을 때 세운 것이다.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만들어 다보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탑은 신라 양식과 백제 양식이 섞여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강천사 앞에는 정면1칸 측면 1칸의 비각이 있다. 이것이 바로 삼인대다. 1506년 연산군을 폐위시키는 중종반정이 성공한 후 반정공신들은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신수근을 숙청했다. 반정공신들은 당시 왕비였던 신수근의 딸 신씨를 폐비시키고 새로운 중전을 맞았다. 그러나 새 중전은 10년 만에 사망했고 이 소식을 들은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은 비밀리에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했다. 후에 사람들은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라 하여 이 곳을 삼인대라 불렀다.
삼인대를 지나면 5분 거리 안에 아름다운 구름다리, 현수교가 있다. 지상에서 50m 높이에 있는 다리다. 이 다리로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강천사 위에서 바로 산을 타는 방법과 현수교 아래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방법이다.

강천산을 등산할 때
강천산의 등산로는 여러 갈래로 나뉜다. 산책만 즐기려면 입구에서 이어진 도로를 따라 현수교까지 걸어도 되지만 등산도 즐기겠다 싶으면 다양한 경로를 연구해야 한다. 구름다리까지는 도보로 30분, 구름다리에서 제 2호수까지 걷는다면 30분이 더 소요된다. 구름다리에서 제 2호수로 가는 길은 비포장 길도 걷고 개울도 건너야 하는데 아름다운 호수 풍경을 보는 값으로는 만족할만한 수준이다.
등산코스는 총 5가지가 있는데 도보로 구름다리까지 걸어갔다가 그 곳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보통 제일 많이 오르는 코스는 현수교를 지나 광덕산을 거쳐 금성 산성까지 이르는 코스다. 현수교를 거쳐 제 1봉을 오르는 코스는 등반코스 중 가파른 코스다. 신선봉이라고 부르는 봉우리에는 정자가 있어 강천산이 한눈에 보인다. 바위산이 가파르므로 주의해야 한다.
신선봉을 넘어가면 광덕산으로 이르는 길이 나온다. 꼭 산책코스 같다. 소나무가 우거지고 폭신폭신한 숲길이 이어진다. 광덕산을 정복하고 3km정도 더 걸어가면 산성산이 이어진다. 이 산성산에는 운대봉이라 부르는 산정상이 있다.
능선 중간에는 강천 최고의 명물이라 일컫는 북바위가 있다. 북처럼 원통으로 생겼다 해서 북바위라 부르는데 이 곳에서 담양호가 보인다. 산성산을 정복하면 철마봉, 노적봉, 시루봉, 운대봉, 연대봉 등 봉우리를 따라 산성이 나타난다. 이 산성이 바로 금성 산성이다. 삼한시대에 마한이 쌓은 성곽으로 추정하는데 국내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지만 대부분 파손되어 현재는 복원 중에 있다.

순창에 가면 꼭 둘러보세요!

●●●태양의 맛, 순창고추장을 만들기
(취재협조 : 한국관광공사 국내진흥팀/(주)다음레저)
한국의 고추장은 순창을 빼놓고 지나갈 수 없다. 순창 고추장은 일반 고추장보다 때깔 좋은 붉은 빛을 띠고 알싸한 맛이 일품이란다. 순창에 가면 지난 1997년 순창군에서 조성한 전통고추장 민속마을이 있다. 현재 54개 농가에서 전통고추장을 생산하여 전국 곳곳에 판매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고추장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
된장을 띄울 예쁜 메주 만들기, 고추장 버물리는 과정이 있다.

●●●메주 만들기 체험
메주콩을 4시간 동안 가마솥에서 삶아낸 후 절구통에서 메주콩을 알맹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밀하게 찧는다. 단, 메주콩이 식기 전에 빨리 찧어야 한다. 이 찧은 메주를 도마에 올려 메주를 만든다. 너무 작거나 너무 크지 않게 예쁘게 빚어낸다. 메주를 만들 때는 직사각형이든 정사각형이든 모양은 상관없다. 짚에 묶어 서로 엮어놓았을 때 서로 부딪히며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한다. 모서리가 모나지 않고 둥글게 빚어야 한다. 메주는 찰흙을 빚듯 모양만 만들어서는 안 되고 바닥에 탁탁 치면서 차지게 만들어야 한다. 잘 만든 메주는 내리치는 강도와 점성에 달려 있으므로 바닥에 힘 있게 쳐대야 한다.

●●●고추장 만들기 체험
원래 고추장 만들기 체험을 하자면 재료를 선별하는 것에서 장을 담는 과정까지 2박 3일이 걸린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체험에서는 시간관계상 고추장 버무리기만 한다.

●●●고추장 장인에게 듣는 상식
·고추 고르는 법
보통 검고 두꺼운 고추를 고르는 데 이것은 좋은 고추가 아니다. 얇고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것이 좋은 고추다. 머리를 따서 고추를 갈랐을 때 안이 황톳빛을 띠는 것이 좋은 고추다.
·고추장 만들 때 오래먹을 수 있게 하는 방법
고추장에 물엿을 넣지 말것. 고추장이 달지 않다고 물엿을 넣는 사람들이 많은데 물엿을 넣으면 산화작용 때문에 금방 시커멓게 변하고 만다. 고추장이 달지 않다면 먹을 때마다 설탕을 쳐서 먹는 것이 오래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고추장 만들기 체험
·체험비 - 초등학생 이상 1인당 만원
(단체로 구성하는데 보통 20-40명 내외)
·문의 - 순창고추장마을 김은우 총무 011-9642-6450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태인IC에서 빠져 칠보방향 입간판을 보고 우회전 30번 국도를 탄후 옥정호를 거쳐 강진에서 순창 방향 27번 국도로 갈아타면 된다.

<이달의섬>
16.길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바다는 나를 부른다
청산도
담은 집을 감싸고 있다. “오늘은 일하지 마시고 우리 집으로 오시오” 스피커소리가 들린다. 잔치가 있나. ‘우리 집’이 어디일까?
글·사진 김연미 기자
그를 만난 것은 비슷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있는 술자리였다.
나는 그 때 섬을 찾고 있었다. 쓴 소주가 때때로 달게 느껴지는, 잔 위에 뜨는 그리운 사람 같은 섬을 찾고 있었다. 그는 많은 섬들을 알고 있었다. 줄줄이 붙어 나오는 비엔나 소시지처럼 섬들이 엮어져 나왔다. 나도 몇 개의 섬을 짚어보다가 소시지를 뚝 잘라 술안주 삼았다. 그에게 묘한 질투심이 솟았다.
“왜, 청산도니?” “문화가 있으니까!” 그는 짧게 대답했다. ‘문화? 니가 말하는 문화가 뭐니?’ 되묻고 싶었지만, 내심 그가 말하는 섬에 가고 싶었다. 섬이 아지랑이처럼 아득하게 피어올랐다. 그렇게 그와 여행을 시작했다.

완도항 바다주유소
완도항에서 청산도행 첫 배는 8시 20분. 시간이 많이 남아서 차를 끌고 완도항을 돌아보았다. 항 근처 바다 위에 LG정유소가 있다. 배에 기름을 대주는 바다 주유소. 신기해서 사진을 몇 장 찍었더니 아침 햇살이 카메라 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지나가는 노인이 한 소리한다. “사진이 까맣게 나올텐데…” 가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프로라는 생각이 든다. 카메라가 무겁다.
선어공판장에는 경매준비가 한창이다. 낯선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얼쩡거려도 쳐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바닷물이 담긴 바구니에 번호표가 둥둥 떠 있다. 아침에 막 건져 올린 생선을 집어넣는다. 조개가 대야에 철렁거리게 담겨진다. 한쪽에서 아주머니 몇 분이 생선을 갈라 물에 박박 닦는다. 다들 삶이 허리로 간 것일까 엉덩이를 쑥 빼고 허리가 ‘ㄱ’자로 굽어 일을 하고 있다. 내 어머니 허리도 저리하고 나도 곧 저리하리라. 삶은 허리를 굽게 한다. 배 시간 때문에 경매를 보지 못 했다. 바닷가 아침 햇살만큼 짭짤하고 달콤한 것은 없다.

오늘은 일하지 마시고 우리 집에 오이소
바다 하늘 산이 다 푸르다 하여 청산도. 옛부터 청산여수(靑山麗水)라 불렀다고 한다. 청산도는 완도항에서 19.2km 떨어진 다도해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여서도, 불근도, 소모도, 장도 등 14개의 섬들 사이에 우뚝 자리하고 있는 푸른 섬.
섬 여행에서 늘 느끼는 거지만 바라보는 섬은 가깝다. ‘다 왔어!’ 금방이라도 소리치려하면 섬은 아직도 저 만치다. 그렇게 섬과 거리감을 느끼지 못한채 달려서 50여 분만에 청산항에 도착했다.
황사인지 안개인지가 끼어서 섬이 자욱하다. 날씨 탓에 바다도 하늘도 푸르지 않다.
청산항 가게 앞에서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뽑아 마신다. “커피도 섬 문화인가?” 그에게 딴지 걸 듯 툭 던진다. “시골에서 커피를 마신게 언제부터인지 아니?”그가 물었다. “할머니가 대접에 미숫가루 타주듯 커피를 주던 생각이 나? 무지 달았지!” 그와 여행을 떠나와서 처음으로 웃었다. 밥을 먹고 난 후 커피를 마시는 게 일상처럼 되어가듯 청산도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영화 ‘서편제’에 나오는 황톳길이 있고 소로 논갈이를 하는 논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엔 최신 농기구가 있고 잘 포장된 길도 있다.
청산도 만큼 알뜰한 곳도 없다. 언덕배기 한 곳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산을 통째로 논과 밭으로 만들었다. 청산도는 돌이 많다. 논두렁, 밭두렁, 담도 다 돌로 만들어졌다. “온돌방에 까는 널찍한 돌을 구들장이라하지. 청산도는 구들장논이야! 돌이 많으니 물이 잘 빠져나가잖아. 넓적한 돌을 깔아서 물이 잘 빠지지 않게 논을 만들었지. 무논 좀 봐 기름져 보이지 오줌보가 터질 때까지 참고 일해야 저렇게 기름진 논이 되겠지. 우리 아버지 세대니까 그 일이 가능했겠지.”
한 차례 흐드러지게 피었던 유채꽃은 지기 시작했다. 마늘쫑은 쑥쑥 자라고 맥주 보리는 노랗게 익어간다. 청산도는 벌써 여름이 오고 있다.
당리마을에 ‘서편제’에 나온 초가집이 남아있다. 좁은 골목을 걷다보니 바닷바람이 쉬이 들어오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이 집을 감싸고 있다. “오늘은 일하지 마시고 우리 집으로 오시오” 스피커소리가 들린다. 잔치가 있나. ‘우리 집’이 어디일까? 새삼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63빌딩에 서서 ‘우리 집에 놀러와!’하면 미친 년 소리를 들을 것이다. 시골이 도시와 다른 것은 ‘우리 집’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 동네에 놀러와!
마을을 기웃기웃 거리다 드디어 ‘우리 집’을 찾았다. 마당에 노래방 시설이 되어있고 돗자리에 어르신이 앉아있다. 마당 한켠 솥에서 곰국이 끓고 있다. 본격적인 농번기를 앞두고 50대 어르신들이 70대 어르신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었다. 염치불구하고 할머니 옆에 앉아서 음식을 얻어먹었다.
마요네즈를 넣은 과일 샐러드, 잡채, 오징어무침, 떡, 삶은 돼지고기, 맥주 등. “할머니 연세가 어찌되세요?” “그런건 뭐하러 물어봐 이 떡이나 먹어! 이 돼지는 완도에서 온 거야 많이 먹어” 할머니께 이것저것 물어도 뭐든 “그려그려”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옆에 할머니가 건성으로 대답한다고 핀잔을 주어도 여전히 웃으며 그려그려다.
쟁반을 이고 골목을 나오는 할머니를 만났다. 움직이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위해 음식을 나르고 오는 길이다. 쟁반 위에 빈 그릇이 덜거덕거린다. 사랑이 무엇인가! 햄버거를 덥썩덥썩 먹어대듯 사랑도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 나에게 우리 어머니들이 살아온 사랑법이 버겁다. 구들장논을 만들어가듯 사랑도 악착같이 살 수 있을까. 음식을 한 숟가락씩 넣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나?

차를 타고 달리다 그가 차를 세운다. 성큼성큼 산으로 오른다. 보리밭 위로 지푸라기무더기가 보인다.
“초분이야! 섬지방에 있는 독특한 장례문화지. 장남이 고기잡이를 떠났을 때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가묘를 써두었다가 돌아온 후 장례를 치르지.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이엉으로 이었다가 2∼3년 뒤 씻골하여 땅에 묻어. 섬에서는 초분을 하는 게 조상에 대한 큰 예의지. 장례를 두 번 치르는 거니 부를 상징할 수 있고. 지금은 네 기의 초분이 남아있어.”
새끼줄이 매듭 공예를 해 놓은 듯 예쁘게 묶여있다. 그 새끼줄 사이에 마른 소나무 잎이 끼워져 있다.
“상주가 이 무덤에 찾아올 때 마다 솔잎을 꽂아두고 가는 거야. 효자네….”
초분이 바라보는 정경은 시원하다. 수풀 사이로 고사리가 어린 손가락을 펴고 있다.
구들장 논이 있고, 초분이 있고 그리고 보리를 심는 사람들이 있다.
해풍에 일렁거리는 보리밭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우리 집’ 마늘밭에 들어가서 마늘쫑이라도 뽑고 싶다. 섬은 간지럼 피듯 따뜻하다.

청산도에서 눈여겨보세요!

청산항에서 1km 언덕길을 따라가면 영화 <서편제> 촬영지 당리마을. 영화 5분 20초의 롱테이크 장면인 유봉일가가 ‘진도아리랑’을 부르면서 내려왔던 3백m의 흙길과 밭 돌담을 구경할 수 있다. 길 아래 바다가 보이는 언덕을 유심히 보면 재현해 놓은 초분을 볼 수 있다. 청산항에서 서쪽으로 가면 1.2km 고운 모래밭이 나오는 지리해수욕장. 수령 2백년이 넘은 8백여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서 여름에 해수욕하기에 좋다. 섬 동쪽에는 검은 몽돌해변이 있다. 파도에 씻긴 몽돌이 빛에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난다. 청산도는 어디가나 보리밭이다. 보리밭 따라 걷는 봄 길이 가장 정겹다.

그를 만난 것은 비슷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있는 술자리였다.
나는 그 때 섬을 찾고 있었다. 쓴 소주가 때때로 달게 느껴지는, 잔 위에 뜨는 그리운 사람 같은 섬을 찾고 있었다. 그는 많은 섬들을 알고 있었다. 줄줄이 붙어 나오는 비엔나 소시지처럼 섬들이 엮어져 나왔다. 나도 몇 개의 섬을 짚어보다가 소시지를 뚝 잘라 술안주 삼았다. 그에게 묘한 질투심이 솟았다.
“왜, 청산도니?” “문화가 있으니까!” 그는 짧게 대답했다. ‘문화? 니가 말하는 문화가 뭐니?’ 되묻고 싶었지만, 내심 그가 말하는 섬에 가고 싶었다. 섬이 아지랑이처럼 아득하게 피어올랐다. 그렇게 그와 여행을 시작했다.

완도항 바다주유소
완도항에서 청산도행 첫 배는 8시 20분. 시간이 많이 남아서 차를 끌고 완도항을 돌아보았다. 항 근처 바다 위에 LG정유소가 있다. 배에 기름을 대주는 바다 주유소. 신기해서 사진을 몇 장 찍었더니 아침 햇살이 카메라 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지나가는 노인이 한 소리한다. “사진이 까맣게 나올텐데…” 가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프로라는 생각이 든다. 카메라가 무겁다.
선어공판장에는 경매준비가 한창이다. 낯선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얼쩡거려도 쳐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바닷물이 담긴 바구니에 번호표가 둥둥 떠 있다. 아침에 막 건져 올린 생선을 집어넣는다. 조개가 대야에 철렁거리게 담겨진다. 한쪽에서 아주머니 몇 분이 생선을 갈라 물에 박박 닦는다. 다들 삶이 허리로 간 것일까 엉덩이를 쑥 빼고 허리가 ‘ㄱ’자로 굽어 일을 하고 있다. 내 어머니 허리도 저리하고 나도 곧 저리하리라. 삶은 허리를 굽게 한다. 배 시간 때문에 경매를 보지 못 했다. 바닷가 아침 햇살만큼 짭짤하고 달콤한 것은 없다.

오늘은 일하지 마시고 우리 집에 오이소
바다 하늘 산이 다 푸르다 하여 청산도. 옛부터 청산여수(靑山麗水)라 불렀다고 한다. 청산도는 완도항에서 19.2km 떨어진 다도해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여서도, 불근도, 소모도, 장도 등 14개의 섬들 사이에 우뚝 자리하고 있는 푸른 섬.
섬 여행에서 늘 느끼는 거지만 바라보는 섬은 가깝다. ‘다 왔어!’ 금방이라도 소리치려하면 섬은 아직도 저 만치다. 그렇게 섬과 거리감을 느끼지 못한채 달려서 50여 분만에 청산항에 도착했다.
황사인지 안개인지가 끼어서 섬이 자욱하다. 날씨 탓에 바다도 하늘도 푸르지 않다.
청산항 가게 앞에서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뽑아 마신다. “커피도 섬 문화인가?” 그에게 딴지 걸 듯 툭 던진다. “시골에서 커피를 마신게 언제부터인지 아니?”그가 물었다. “할머니가 대접에 미숫가루 타주듯 커피를 주던 생각이 나? 무지 달았지!” 그와 여행을 떠나와서 처음으로 웃었다. 밥을 먹고 난 후 커피를 마시는 게 일상처럼 되어가듯 청산도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영화 ‘서편제’에 나오는 황톳길이 있고 소로 논갈이를 하는 논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엔 최신 농기구가 있고 잘 포장된 길도 있다.
청산도 만큼 알뜰한 곳도 없다. 언덕배기 한 곳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산을 통째로 논과 밭으로 만들었다. 청산도는 돌이 많다. 논두렁, 밭두렁, 담도 다 돌로 만들어졌다. “온돌방에 까는 널찍한 돌을 구들장이라하지. 청산도는 구들장논이야! 돌이 많으니 물이 잘 빠져나가잖아. 넓적한 돌을 깔아서 물이 잘 빠지지 않게 논을 만들었지. 무논 좀 봐 기름져 보이지 오줌보가 터질 때까지 참고 일해야 저렇게 기름진 논이 되겠지. 우리 아버지 세대니까 그 일이 가능했겠지.”
한 차례 흐드러지게 피었던 유채꽃은 지기 시작했다. 마늘쫑은 쑥쑥 자라고 맥주 보리는 노랗게 익어간다. 청산도는 벌써 여름이 오고 있다.
당리마을에 ‘서편제’에 나온 초가집이 남아있다. 좁은 골목을 걷다보니 바닷바람이 쉬이 들어오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이 집을 감싸고 있다. “오늘은 일하지 마시고 우리 집으로 오시오” 스피커소리가 들린다. 잔치가 있나. ‘우리 집’이 어디일까? 새삼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63빌딩에 서서 ‘우리 집에 놀러와!’하면 미친 년 소리를 들을 것이다. 시골이 도시와 다른 것은 ‘우리 집’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 동네에 놀러와!
마을을 기웃기웃 거리다 드디어 ‘우리 집’을 찾았다. 마당에 노래방 시설이 되어있고 돗자리에 어르신이 앉아있다. 마당 한켠 솥에서 곰국이 끓고 있다. 본격적인 농번기를 앞두고 50대 어르신들이 70대 어르신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었다. 염치불구하고 할머니 옆에 앉아서 음식을 얻어먹었다.
마요네즈를 넣은 과일 샐러드, 잡채, 오징어무침, 떡, 삶은 돼지고기, 맥주 등. “할머니 연세가 어찌되세요?” “그런건 뭐하러 물어봐 이 떡이나 먹어! 이 돼지는 완도에서 온 거야 많이 먹어” 할머니께 이것저것 물어도 뭐든 “그려그려”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옆에 할머니가 건성으로 대답한다고 핀잔을 주어도 여전히 웃으며 그려그려다.
쟁반을 이고 골목을 나오는 할머니를 만났다. 움직이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위해 음식을 나르고 오는 길이다. 쟁반 위에 빈 그릇이 덜거덕거린다. 사랑이 무엇인가! 햄버거를 덥썩덥썩 먹어대듯 사랑도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 나에게 우리 어머니들이 살아온 사랑법이 버겁다. 구들장논을 만들어가듯 사랑도 악착같이 살 수 있을까. 음식을 한 숟가락씩 넣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나?

차를 타고 달리다 그가 차를 세운다. 성큼성큼 산으로 오른다. 보리밭 위로 지푸라기무더기가 보인다.
“초분이야! 섬지방에 있는 독특한 장례문화지. 장남이 고기잡이를 떠났을 때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가묘를 써두었다가 돌아온 후 장례를 치르지.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이엉으로 이었다가 2∼3년 뒤 씻골하여 땅에 묻어. 섬에서는 초분을 하는 게 조상에 대한 큰 예의지. 장례를 두 번 치르는 거니 부를 상징할 수 있고. 지금은 네 기의 초분이 남아있어.”
새끼줄이 매듭 공예를 해 놓은 듯 예쁘게 묶여있다. 그 새끼줄 사이에 마른 소나무 잎이 끼워져 있다.
“상주가 이 무덤에 찾아올 때 마다 솔잎을 꽂아두고 가는 거야. 효자네….”
초분이 바라보는 정경은 시원하다. 수풀 사이로 고사리가 어린 손가락을 펴고 있다.
구들장 논이 있고, 초분이 있고 그리고 보리를 심는 사람들이 있다.
해풍에 일렁거리는 보리밭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우리 집’ 마늘밭에 들어가서 마늘쫑이라도 뽑고 싶다. 섬은 간지럼 피듯 따뜻하다.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목포IC → 강진 방향 2번 국도 → 해남 방향 13번 국도를 타고 완도 방향 77번 국도를 따라서 가면 완도 → 완도 연안여객선터미널
●완도항 쮝 청산항 08:20, 11:20, 14:30, 17:40 하루 4회 운행 45분 소요. 요금 5천8백원, 자가용 4만2천원) 청산항 → 완도 06:30, 09:50, 13:00, 16:10 하루 4회 운행. 5천3백원)
●문의 : 청산농협 061-552-9388~9 (여름 피서철은 배가 증편됨.)
현지교통 | 청산여객 061-552-8546
| 청산택시 061-552-8519

알아두세요
맛집 자연식당 061-552-8863 / 부두횟집 061-552-8547 / 경일식당 061-552-8517
잠잘 곳 청산항 등대모텔 061-552-8558 / 칠성장 061-552-8507 / 지리민박 061-552-8801

17.정녕 마음의 때를 씻고 싶은 사람
완주 화암사에 가보라
여행에 관한 글을 쓰니까 자주 이런 질문을 받는다. “어느 절이 제일 맘에 들어요?” 우리나라 절집이야 거의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니 어느 한 곳을 추천하기가 곤욕스럽다. 그런데 완주 화암사를 다녀오고 생각이 바뀌었다. 다시 그런 질문을 받으면 감히 완주 화암사라 말하리라.
글·사진 이종원 (객원기자)
화암사는 큰 사찰도 아니다. 화려한 문화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뭔가가 숨겨져있다. 절집을 거니는 것만으로 순수한 예술영화 한편을 본 것 같은 감동을 받는다. ‘정녕 마음의 때를 씻고 싶은 사람은 화암사를 가보라.’

논산에서 대둔산쪽으로 향하다보면 ‘양촌’이라는 시골마을이 나온다. 이 곳에서 작은 고개 하나 넘어야 전라도 땅 운주를 만난다. 작은 고개건만 행정구역이 이렇게 갈라놓은 것이다. 하긴 논산땅이나 완주땅 모두 백제땅이 아닌가? 그걸 말해주듯 전라도 운주장터에는 충청도 양촌에서 시장 보러오는 사람이 참 많다.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민들에게 행정구역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할머니는 산에서 캐온 풋풋한 봄나물을 장터에 가져왔다. 팔리든 안 팔리든 상관이 없다. 아는 사람 만나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 행복한 표정이다. 강아지를 가져온 아저씨, 겨우내 말린 곶감을 가져온 아줌마도 보인다. 벌써 막걸리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한 할아버지의 빠알간 얼굴에도 삶의 향기가 묻어난다.
운주에서 17번국도를 타고 전주쪽으로 달리다보면 ‘경천’이란 마을이 나온다. 초입에서 화암사까지는 좁은 길이 이어져 버스로 올라가기엔 무리다. 산 속 깊은 속내로 들어간다. 문명과 멀어질수록 산은 맑아지는가 보다. 사람의 손을 덜 타서 그런지 차창의 풍경은 생동감이 넘친다.

10여 분정도 차로 올라가면 화암사 입구에 닿는다. 이제부터 누구나 20여 분의 오솔길을 걸어야 한다. 스님이라고 예외는 없다. 그래서 절집으로 향하는 이 작은 길이야말로 신분을 따지지 않는 평등한 길이다. 땅의 촉감을 느끼며 걷다보면 나무터널이 길게 이어지고 예쁜 시냇물을 만나게 된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봄의 대지를 깨우고 있다. 거기엔 큰돌이 세워져 있어 일주문을 대신 하고 있다. 시멘트 전봇대 2개를 뉘여 다리를 건너게 만들었다. 시멘트 전봇대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문명의 인공물도 자연에 동화된 것이다.
작은 협곡이 나온다. 아기자기한 바위에서 떨어지는 맑은 물이 세파의 때를 씻어준다. 세례자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푼다면 이렇게 맑은 물을 사용했을 거야. 절집을 향하면서 종교가 왔다갔다한다. 아무렴 어떤가? 좋으면 그만이지.
이 작은 길에서 누군가 만나면 와락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쉽게도 절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산은 고독을 만끽하라고 홀로 가게 했나보다. 그런데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쭉쭉 내뻗은 나무가 있었고, 개울의 수다 소리도 있었다. 기암괴석의 넋두리도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이 나의 도반인 셈이다. 산사로 향하는 이 길이야말로 발로 걷는 1백8배일지 모른다.
좁은 협곡에서 갑자기 너른 협곡이 나온다. 시원스런 폭포가 나타났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나태함도 폭포 속에 던져버렸다. 지금이야 편안한 철계단이 있었지만 예전엔 벼랑에 몸을 붙이고 절벽길로 오르내렸을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뒤를 바라보는 여유도 챙겨본다. 산이 겹겹이 쌓여 있다. ‘참 깊은 곳이구먼….’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이 약수다. 물을 가두고 찔끔찔금 내보내는 것이 아니다. 폭포처럼 시원스레 떨어진다. 발품을 팔며 땀을 쏟았으니 물맛이 좋지 않을 수 없다.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고서야 산세가 눈에 들어왔다. 불명산(佛明山) 자락이 너울너울 춤추고 있다. ‘부처님이 밝게 빛나고 있는 산’에 내가 오른 것이다.

화암사에는 일주문도 없다. 오로지 우화루 옆의 대문이 절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다. 대체로 누각아래를 통해 주 건물로 들어가는데 이곳을 성벽처럼 돌로 단단히 막아놓았다. 위층도 널벽으로 막혀 있어 일체의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나무로 만든 창문이 달려 있지만 그마저 작아 보인다. 문을 꼭 잠근 성채라고 할까? ‘절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지, 숨기려고 하는 것인지.’
막돌로 쌓여진 계단을 오르면 문간채가 나온다. 대갓집의 대문과 다를바 없다. 문턱은 아래쪽으로 휘어져 있고 문미는 위쪽으로 휘어져 있다. 마치 요술거울 안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하긴 문화유산을 찾는 자체가 과거로의 여행이 아닌가? 큼직한 진돗개만이 목을 빼꼼히 내밀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탐승객을 맞이한다. 대문에는 시주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인두로 지져 쓴 한글 이름이 삐뚤삐뚤 적혀있다. 하긴 동종에 새겨진 금빛 찬란한 이름보다 훨씬 정감있다. 가난한 신도들이 푼돈을 모아 만든 정성이 갸륵하다. 이 대문이 세워졌을 때 얼마나 뿌듯했을까?
문턱을 넘으면 공간이 있는 오른쪽으로 동선이 형성된다. 화암사의 마당만 보면 매우 좁다. 그러나 우화루의 마루면이 안마당의 지면과 같은 높이에 있어 마당은 좁아 보이지 않는다. 즉 우화루의 마루는 마당의 연장선상이다. 그런 시각적 효과는 적묵당이나 불명당에도 적용된다. 화암사의 전각들간에 수직적 위계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공간이 수평적으로 만나고 있다. 백제의 평지가람의 모습이 주로 이렇다. 바깥에서 본 폐쇄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건물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화루(보물 662호)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1611년에 중창을 했으니 거의 4백여 년이 넘은 건물이다. 붕괴의 위험 때문에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줄이 쳐 있다. 화암사는 임란의 참화를 뼈저리게 겪었을 것이다. 자기방어의 모습이 폐쇄적인 건물형태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 있는 목어가 우화루 들보에 걸려있다. 화려한 장식도 없고 색깔마저 바랬지만 이웃집 아저씨처럼 정겹게 보인다. 마치 퇴역장군이 지난날을 회상하며 서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극락전 안에는 동종이 모셔져 있다. 높이는 1백7cm이고 용모양의 고리가 있다. 연꽃문양과 꽃잎 띠가 새겨져 있다. 평범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 동종은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니고 있다. 원래의 종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광해군 때 다시 종을 만들었다. 전쟁의 아픔을 직접 겪어서인지 수많은 이적을 보여주고 있다. 밤이면 종이 저절로 울려 스님과 신도를 깨웠고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헌병이 무기로 쓸 쇠붙이를 얻기 위해 화암사로 몰려오자 종 스스로 울려 스님들에게 미리 알렸단다. 다급한 스님은 종을 땅에 묻어버렸다는데, 해방이 된 후에야 다시 꺼내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극락전(보물663호)의 기단은 퍽 자연스럽다. 잡석을 3개 층으로 쌓아놓았다. 그 위에 덤범주초를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다포양식의 맞배지붕형식이다. 소박한 외형만큼이나 내부도 단아하다. 1714년에 단청을 했다고 하니 지금 보고 있는 색깔은 3백년 전에 우리 선조가 그렸던 색감인 것이다. 극락전은 큰 건물은 아니지만 산세와 잘 어우러진 건물이다. 따사로운 봄볕을 받으며 강아지가 낮잠을 자고 있다. 세상 모르고 잠자는 강아지가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봄날은 온다.’
또한 극락전은 1976년 우리 건축사에 길이 남을 발견을 하나 했다. 국내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하앙’을 가진 건물이 화암사에서 발견된 것이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직수입되었다고 주장한 일본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된 것이다.
공포 위에는 덧서까래와 같은 이른바 하앙(下昻)이 내부에서 부터 길게 뻗어 나와 있다. 이러한 하앙구조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로서는 단 하나뿐이다. 이 구조는 하앙부재를 지렛대와 같이 이용하여 외부 처마를 일반 구조보다 훨씬 길게 내밀 수 있어 삼국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알려졌고,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와 비슷한 구조의 실례가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하앙구조는 주로 백제에서 유행된 양식이다. 강수량이 많은 평야지대에 깊은 처마구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선진기법은 백제장인을 통해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전해진다. 호류우지 금당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다. 정면에 보이는 하앙은 용머리 모양으로 투각하여 장식하였고 뒷면의 하앙은 펜촉처럼 뾰족하게 다듬어 놓았다.
적묵당 뒷켠 마당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큼직한 바위가 솟아 있으며 그 위에 장독대를 만들어 놓았다. 오밀조밀한 항아리가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바로 옆에는 산신각이 놓여 있다. 숫기와를 일렬로 놓아서 경계를 지었다. 기둥 4개를 세워놓고 지붕만 얹힌 산신각은 마치 참외밭 원두막처럼 생겼다.

화암사는 소박한 절집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잘 순응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백제는 비록 멸망했어도 핏줄로 이어진 예술혼은 어쩔 수 없나보다. 산지 가람임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평지가람의 건축 방식을 곳곳에서 보게 된다. 그들은 수 천년동안 이 땅을 터전으로 살아왔고, 수많은 전쟁의 참화를 견디어 왔다. 극락보전의 빛 바랜 기둥을 어루만져 본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나무 결이 세월에 짓눌린 주름만큼이나 깊이 패어 있다. 그곳에서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온다.

화암사 가는 길
■ 자가용
01 호남고속도로 → 익산IC → 전주 → 17번 국도(옥천/대전방면) → 경천면 가천리 화암사 입구
02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추부IC → 운주 → 경천면 가천리 화암사 입구
■ 대중교통 전주역 앞에서 화암사행 시내버스 이용 (3-4회 운행). 40분 정도 소요. 온천입구에서 하차 화암사행 군내버스 이용 (20분 간격 운행) 25분 소요.

<이달의 섬>
18.갯돌과 장보고의 숨결이 있는 푸른 섬 - 전남 완도
바다를 실컷 보리라고 나선 완도 여행의 첫 장면은 어스름이 내려앉은 저녁 무렵이었다. 생각보다 짧아서 실망스럽던 완도대교를 지나 고즈넉한 마을을 끼고 해안선을 달렸다. 밤으로 가는 해안가엔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고 간간이 지나치는 차량 행렬을 빼고는 섬은 고요했다.
글·김선호 (객원기자) 사진· 이민학 기자 (2003년 11월 촬영) 김선호 (2004년 3월 촬영)
밤바다가 실어다주는 해풍에 갯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달리자 ‘전망 좋은 곳’이란 팻말이 보여 잠시 차를 멈췄다. 사위는 어두워 가는데 그 깊이를 감춰둔 바다는 매끄럽게 일렁이고 점점이 박힌 섬들의 실루엣이 바다 위 집채처럼 보였다.
하룻밤을 묵을 정도리 해변가 민박집에 짐을 풀고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과 해초들로 싱싱한 식탁위에선 해물탕이 보글거렸고, 바람결에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간간히 방문을 넘나들고 있는 저녁이었다. 저녁을 먹고 바닷가를 한바퀴 돌고 잠을 잘 생각이었는데 때 아닌 비가 내렸다. 밤바다를 산책 하겠다는 계획은 접어야 했다. 다만 완도를 돌아보아야 할 다음날이 문제였다.
비 때문에 걱정이 되어 잠을 설쳤는데 다행히 아침은 환한 햇살로 시작되었다. 동쪽으로 난 창문을 빨갛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아침 해가 그처럼 반가울 줄이야.
정도리 바닷가. 그 사이 점점이 떠있는 섬이 아니라면 하늘과 바다를 분간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정도리는 파도에 씻긴 몽글몽글한 갯돌로 이루어진 해변이다. 공룡알 화석 같은 갯돌들이 빼곡히 들어찬 바닷가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와, 이쁜 돌 되게 많다’
‘엄마, 이거 하나만 가져가면 안 될까?’ 하지만 이곳의 갯돌은 밀반출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준다.
바닷가 한가운데는 ‘갯돌 밀반출엄금’이라는 빨간 글씨가 선명했고 군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엄한(?) 감시의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아저씨들을 보고는 아이들은 금방 들었던 돌을 내려놓고 만다.

아침햇살에 에너지를 충전한 듯 파도가 힘차게 밀려왔다, 사라지는 양을 한없이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을 정도리 갯돌 해변. 동글동글한 갯돌을 쓸고 지나가는 파도소리가 신비로웠다. 파도에 밀려 표면에 나타난 자갈밭이 아홉 개의 계단을 이룬다 하여 ‘구계등’이라 불린다는데 물때가 맞지 않았는지 그 아홉 개의 계단모양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정도리 해변가에는 방풍림으로 조성된 상록수림이 있다. 따뜻한 해양성 기후를 가진 완도는 이렇듯 곳곳에 상록수림을 간직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보길도의 예송리상록수림과 완도항 맞은편의 주도상록수림이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한다.
태산목, 생달나무, 새우나무, 감탕나무 등 생소한 나무이름들이 갯바람을 맞으며 의연하게 서있는 산책로를 걷는 동안 여기저기서 산새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숲 탐방로 곳곳엔 숲에 관한 지식을 알기 쉽게 쓴 팻말이 서있어 아이들과 함께 팻말을 읽으며 걷는 맛도 유익하다. 완도의 다른 것들도 보아야 하는데 그 숲에서 오래 머물고 싶었다. 모든 인공의 것들이 배제된 때문이었을까, 여행자의 마음을 가장 편안한 손길로 보듬어 주는 그 느낌이 좋아서 한동안 그렇게 숲에 있고 싶었다.
끝내 딸아인 주머니에 갯돌하나 넣어 왔다. 볼록한 아이의 주머니에서 나온 사탕만한 갯돌 한개는 아이가 정도리 해변에서 가져온 바다의 마음이다. 아이가 가져온 바다의 마음에 곱게 눈 한번 흘기는 수밖에….
다시 완도의 완만한 해안선을 따라 이번엔 ‘청해진유적지’가 있는 장도를 향했다. 늦은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완도항 근처에 차를 세우고 ‘주도’가 바라다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주인은 바다가 잘 보이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바로 앞에 잡힐 듯 주도가 보이고 주도 건너 신지도가 보인다. 두 섬은 머잖아 다리로 연결될 것이라 했다. 다리를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주도(珠島)는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그 모양이 둥근 구슬 같다하여 구슬 섬이라 불린다 했다. 과연 푸르른 상록수로 치장한 주도는 손가락으로 튕기면 그대로 굴러갈듯 동그랗다.

완도를 간다고 했을 때부터 ‘장보고’의 청해진을 보게 되었다고 좋아하던 아들 녀석의 바람대로 이번엔 장도(장군섬)을 향해 길을 나선다. 이순신 다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장보고란다.
완도는 장보고의 고향이라 알려졌고, 그가 이끈 청해진 군사들의 근거지가 완도군 장좌리 장도다. 장도는 장좌리에서 1백80여m 떨어진 작은 섬이다. 이곳에서 청해진유적지가 발굴되었고 지금은 통일신라시대에 있었던 청해진의 모습 그대로를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청해진 앞바다가 보이는 곳에 도착하니 물이 아직 빠지지 않았다. 썰물 때가 되면 장좌리 앞바다의 바닷길이 열리고 장도까지 걸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오후 2시경 바닷길이 열릴 거라고 해서 잠시 차를 돌려 ‘완도수목원’으로 향했다.
1993년도에 조성이 되었다는 완도수목원은 1천50ha면적의 ‘국내 최대의 난대식물 집단 자생지’라고 소개되어 있다. ‘완도수목원’이라는 입간판을 발견하고 길가 양옆으로 보리이삭이 푸르른 길을 이십 여분 달리니 짙푸른 녹음을 한 색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아직은 초봄이건만, 이곳은 녹음이 우거져 있어 마치 이국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완도를 보는 내내 따라왔던 오래된 동백나무들의 행렬이 이곳에서 절정을 맞는 느낌이다. 동백꽃이 반은 피어 있고 반은 떨어져 누렇게 퇴색한 잔디를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동백이 아름다운 것은 꽃 때문만은 아닌 것을 완도의 숲에서 보았다. 햇살을 받고 반짝이는 동백 잎을 들여다보았는지. 차창 밖으로 따라오는 동백 잎의 반짝임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완도수목원은 난대성 희귀식물뿐만 아니라 체험학습장및 산림환경교육관 그리고 산림전시실등을 갖춘 규모가 큰 수목원이다. 국내최대규모의 동백나무군락지가 인상 깊었고, 향기를 내는 식물들이 모여 있는 방향식물원이 특이했다. 수생식물원등 아직도 수목원의 규모를 넓히고 다양한 식물들을 보여줄 야심 찬 계획이 진행 중이다.
2시부터 썰물 때라고 일러준 대로 시간에 맞춰 장좌리에 도착했다. 바닷물에 잠겨있던 장도와 장좌리 사이에 물길이 열려 있었다. 모세의 기적, 운운하며 아이들이 물이 빠진 바닷길을 조심스레 걸었다. 의외로 단단한 것에 놀랐다. 아주머니 몇 분이서 조개를 캐고 있었다. 바지락을 캔다고 했다. 아이들이 저희들도 해보겠다고 하자 아주머니가 호미를 빌려주셨다. 하지만 개펄을 뒤적이기만 할뿐 조개와 돌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다 못해 아주머니가 손수 캐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씩씩하게 바닷길을 따라 장도에 닿았다. 먼저 바닷가를 따라 장도를 한바퀴 돌기로 했다. 오른쪽으로 50여km를 가자 해안선 방비를 목적으로 설치했다는 목책의 흔적이 나타났다. 세월의 흔적이 할퀴고 간 부서진 목책 사이로 따개비가 집을 삼고 있었다. 청해진유적지 복원계획에 보니 목책도 다시 설치할 것이라 한다.
토성이 섬 둘레를 따라 세워지고 그것들을 에워싸듯 동백나무들이 섬을 따라 빙 둘러 서 있다. 그 길에서 장좌리가 고향이라는 고둥을 잡고 있는 아저씨를 만났다. 고둥을 잡아 볼까 하고 바위를 뒤지다 홍합을 발견했다. 처음엔 장난삼아 주웠던 홍합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자 마치 보물이라도 찾는 기분이 되었다. 한바구니 차고도 넘을 만큼의 홍합을 들고 개선장군이 되어 토성을 보러 갔다. 지금은 한창 공사 중이다. 입장금지란다. 그래서 토성을 쌓아놓은 한쪽 등성을 넘어 보았다. 섬 가운데 상록수림이 무성하다. 그곳엔 장보고대사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이곳 장좌리 사람들이 매년 정월 대보름에 당제를 지낸다 한다.
완도는 벌써 봄빛이 완연했다. 푸른 보리싹을 키우는 황토빛 들녘위로 고루 쏟아지던 햇살이 눈부셨다. 파랗게 일렁이던 봄 바다를 배경으로 서있는 동백꽃이 붉던 섬. 따뜻한 해양성 기후를 가진 완도의 곳곳에 펼쳐진 난대성 상록수림으로 일년 내내 초록인 섬. 완도의 자연은 한편의 아름다운 자연다큐멘타리 그 자체였다.

완도 수목원을 들러 보세요
완도 대교를 지나 군외면 원동을 2km로 정도 가다보면 수목원 입간판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다시 2.4km 떨어진 곳에 완도 수목원이 있지요. 난대성 희귀식물 7백50여종이 집단 자생한다고 하구요. 30개 전문수목원 조성을 통한 산림전시장 역할을 수행한다는 취지에서 조성한 수목원이라 하는 군요.
아이들과 산림전시실을 둘러보세요. 숲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과 나무로 만들어진 생활도구 및 나무로 만든 악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가장 신기해하는 것 중 백 원짜리 동전 두개를 넣으면 향이 나는 향기자판기가 있는데요, 정신을 맑게 해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약리 작용까지 한다니 아이들이 호기심을 보일만도 하겠지요?
아직은 공사 중인 곳도 있지만 야생화를 포함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난대성 희귀식물을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어 줄 것입니다.

<남도 문화 따라잡기>
19.월출산 벚꽃 보리밭이 한 폭의 수채화 [영암]
신령스런 바위가 있는 곳이라 하여 영암이라 한다. 영암은 백리 벚꽃길, 월출산, 도갑사, 왕인박사, 구림마을, 영보마을 등 남도문화에서도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 곳이다
글·사진 김연미 기자촬영협조·영암군청, 디스관광정보연구원
영암은 벚꽃이 한창이다. 영암읍에서 삼호읍 용당리까지 1백리,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비처럼 내린다. 쑥쑥 자란 보리는 월출산을 등지고 바람이 나부끼는 대로 눕는다. 논갈이를 하지 않은 논은 자운영 꽃밭이다.
영암은 월출산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들녘 한가운데 우뚝 솟은 월출산은 눈을 뜨면서부터 늘 저 만치 있는, 영암 사람에게 어머니 같은 산이다. 마을은 월출산을 등지거나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월출산은 말 그대로 ‘달을 낳는 산’, ‘달이 뜨는 산’이다. 달은 여성을 상징하곤 한다. 달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아이는 대단한 사람이 된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런가 월출산 달밤은 신령스럽고 아름답다. 보름에는 화강암에 쏟아지는 달빛이 낮처럼 밝아 손전등을 끄고 다닐 수 있을 정도란다. 그러나 만만한 산이 아니다.
경사가 평균 30∼40도, 계곡이나 능선은 20∼25도의 급경사다. 특히 산 전체를 이루고 있는 화강암 바위는 등산 내내 호흡을 가쁘게 한다.

전남의 설악산 월출산 천황봉 오르기
햇살이 보리밭에서 기분 좋게 조는 토요일. 월출산 타잔 전판성 씨, 제니 박선희 씨와 함께 산에 올랐다. 두 사람은 영암군청 산악동우회 선후배다.
월출산은 구정봉 기준으로 동쪽은 설악산을 서쪽은 지리산을 많이 닮았다. 그래서 동쪽은 바위 길이고, 서쪽 도갑사로 가는 길은 흙 길이다.
시간이 넉넉하면 천황사지∼바람폭포∼천황봉∼구정봉∼억새밭∼도갑사(약 6시간 소요)를 잇는 종주능선을 타면 좋았겠지만 체력이 약한 나를 배려해서 3시간(거리 5.9km)정도 걸리는 코스 천황사지∼구름다리∼천황봉∼바람폭포∼천황사지로 올랐다.
천황사지 주차장에서 등산화 끈을 단단히 맸다. 산은 사람을 긴장시킨다. 쉬이 정상에 가는 것도, 요령 피는 것도 원치 않는다. 세상 모든 일에 요령이 있다해도 산은 우직한 사람들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에 간다.
천황사지를 오르는 돌계단 주위로 키 큰 조릿대가 시원한 터널을 만든다. 조릿대 사이로 동백이 붉게 피었다. 동백꽃이 통째로 뚝뚝 떨어진다. 사랑, 이별, 열정… 무슨 속내를 붙여야 동백이 지는 모습을 담아낼 수 있을까. 삶의 굴곡이 짧아서 그런지, 동백꽃 지는 모습을 담아낼 길이 없다. 전판성 씨가 동백꽃을 하나 따서 뒤쪽을 빨아보라며 준다. 달다. 꽃이 달다.
30여분 오르니 천황사지다. 절은 불에 타 없어지고 천막 안에 부처님을 모셨다. 깨진 동종이 처량하게 천막밖에 있다. 처음으로 가난한 절을 보았다.
바위 길이 가파르다. 잡아주는 손이 따뜻하다. 박선희 씨가 뒤에서 따라오다가 경사가 급해 먼저 올라서 손을 잡아준다. 빠르지 않은 나를 이끌어주느라 월출산 제니가 힘들었을 것이다. 돌이 많고 물이 적어서 생물이 살기 어려운 조건이라지만 고추나무, 붉가시나무, 신갈나무 등 7백 여종 다양한 식물이 살고 있다. 나무마다 이름표가 붙어있다.
그렇게 앞뒤를 돌아보며 1시간 정도 산에 올랐다. 너럭바위에 앉아 돌아보면 영암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인 중에 영암이 고향인 분이 있다. 아무리 등산이 힘들어도 구름다리까지는 꼭 가라하더니, 그 구름다리다. 전국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다리. 지상높이 1백20m, 길이 52m, 폭 60m. 바람이 다르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아찔하다. 다리 중간에서 저절로 멈추게 되는 게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천왕봉, 사자봉, 장군봉 등 제각기 다른 얼굴의 장엄한 바위 때문에 1백20m 높이를 흐르는 바람 아래서 저절로 서게 된다. 대둔산의 다리가 고속도로라면 월출산 구름다리는 국도란다. 대둔산의 다리 높이가 80m, 월출산 다리가 40m 더 높으니 그 말이 맞기도 한다.
천황봉은 월출산 최고봉이다. 해발 8백9m지만 사실은 8백13m라고 한다. 높이가 잘못 보도돼서 더 낮게 알려졌단다. 몇 미터 차이라고 하지만 나 같은 신참내기에는 왜 그리 정상이 높기만 한지.
월출산 타잔은 먼저 오르다 우리가 보이지 않으면 “의아”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는 오랜만에 등산코스로 올랐다. 타잔에게는 길 아닌 곳이 길이다. 매달 14일이면 야간 산행을 한다. 일행이 오든 안 오든 시간이 되면 묵묵하게 산에 오른다. 그가 등산로에 있는 계단 오르는 방법을 알려준다. 계단을 밟지 않은 다리는 힘을 빼서 발까지 쭉 폈다가 계단을 밟고 다른 쪽 다리를 쭉 폈다가 밟기를 반복하다보면 다리에 무리가 덜 간다고 한다.
박선희 씨는 내 무거운 다리에 최면을 걸어주었다. ‘다리가 새처럼 가볍다’ 이렇게 생각하면 진짜 가벼워진다고 한다. 산을 오르는 내내 ‘나는 가볍다’라고 주문을 걸었다. 그러나 어느새 ‘나는 새처럼 가볍고 싶다’라고 중얼거렸다.
사방 탁 트여서 영암 개신리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맛에 산에 오른다. 멀리 바라볼 수 있다는 게,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게, 산다는 게 좋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
월출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도갑사는 풍수지리로 유명한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국보로 지정된 해탈문 주위로 동백꽃이 곱게 피었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절은 황량하다. 조선시대에는 9백66칸의 전각과 당우가 있었다고 하던데 임진왜란과 6.25를 거치면서 황량한 절이 되었다. 도선국사가 “내가 떠난 후 철모 쓴 자들이 와서 절에 불을 지르리라” 예견했다고 한다. 이왕 예견할 것 막는 방법도 좀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도갑사는 옛 모습 찾고자 발굴중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커다란 석조에는 맑은 물이 흐린다. 예전에 도갑사가 얼마나 큰 절인지 이 석조가 말해주는 듯 해 세월의 무상함을 담담하게 느끼게 한다. 절 마당 뒤 왼쪽으로 오르면 월출산 등산로가 나온다. 정자를 지나서 미륵전으로 향한다. 미륵전에는 2.2m의 무표정한 석가여래좌상이 있다.
미륵전에서 나와서 쭉 올라가면 도선국사의 업적을 기록한 도선수미비가 있다. 4.8m의 커다란 비가 사람을 압도한다. 특히 거북상의 섬세한 조각이 묘미이다.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발톱으로 얼굴을 할퀴고 여의주를 문 입으로 위협할 듯 하다. 17년 동안 만들어서 효종 4년(1653)에 완성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도선국사는 온화한 스님이기보다 당대의 날카로운 지식인이 아니었나 거북의 형상을 보면서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영암에 가면 꼭 들러보세요!
●●●일본 아스카문화의 창시자 왕인박사유적지
왕인박사는 백제사람으로 일본 응신천황의 초빙을 받아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후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었는데 일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왕인’이란 이름이 나온다.
일본 고대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성인으로 일본에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무덤은 일본 오사카와 교토 히라카타에 있다.
1987년에 조성된 왕인박사유적지에는 왕인박사 일대기를 그림으로 나타낸 전시관이 있고 안쪽에 사당을 모셨다. 정문을 나와서 오른쪽 길로 가면 왕인이 태어났다는 성기동이 있다. 또한 성기골 계곡물을 그가 마셨다고 하여 석천이라 부른다. 석천 옆에 약수를 먹으면 머리 좋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니 믿고 마셔보라.
월출산 중턱으로 40분쯤 오르면 박사가 공부했다고 전해오는 책굴과 문산재 양사재가 있다. 책굴 앞에는 왕인박사 석인상이 있는데 고려초기작품으로 부처와 닮았지만 봉수자세가 틀리다하여 왕인박사 석인상이라고 한다.
영암에서는 매년 4월초 <왕인문화축제>를 개최하며 다양한 문화 행사를 연다.

●●●구림마을과 영암 도기문화센터
월출산을 바라보고 있는 구림마을은 도선국사와 왕인박사가 태어난 곳이다. 회사정, 죽정서원, 국암사, 조씨 종택 등 고택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돌담이 잘 만들어져서 돌담을 따라 쭉 마을을 돌아보면 좋다. 구림문화센터 앞에는 왕인박사가 띠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는 상대포가 있다. 지금은 물을 막아서 작은 저수지가 됐지만 그 당시는 국제무역항이었다.
구림마을에는 도기문화센터가 있어 녹갈색, 흑갈색 유약을 입힌 시유도기를 볼 수 있다. 태토는 영암의 천연황토를 사용하고 유약은 황토와 소나무 재를 수비하여 만든 재유, 황토재유, 흑갈유 등을 사용해서 색감이 중후하고 자연스럽다. 옛 질그릇의 멋이 살아있다.
특히 무료로 도자기를 직접 빚어볼 수 있으며 만든 도자기를 가져가고 싶을 때는 1만원을 주면 유약을 입혀 구워서 보내주기도 한다(택배비는 별도).
(문의 061-470-2566)

●●●초가집이 아름다운 영보마을
영보마을로 가다보면 월출산이 멀어지는 듯 하다 막상 마을에 도착하면 월출산이 앞산처럼가까이 보인다. 구림마을이 잘 가꾸어진 마을이라면 영보마을은 아직도 시골 마을 정취를 간직한 곳이다. 특히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최성호 가옥은 호남의 대표적 부농 가옥으로 안채, 사랑채, 헛간채, 문간채가 초가집으로 지어졌다. 내부는 수리됐지만 옛 초가집의 매력이 그대로 남아있다.

●●●목포 유달산이 보이는 영암방조제
영암과 해남의 경계를 짓는 영암방조제는 현대삼호중공업 조선소가 보이고 그 너머로 목포 유달산이 보인다. 이 방조제에서는 9월부터 10월까지 갈치가 많이 잡힌다. 방조제에 앉아서 낚시대를 던져놓으면 초보자도 쉽게 잡을 수 있다고 한다.

●●●가는길 : 서해안고속도로 → 목포IC → 2번국도 → 819번 지방도로(독천) → 영암
●●●맛집
·청하식당 갈낙탕 - 영암 낙지는 빛깔이 희고 깨끗하다. 입으로 다리를 끊어도 쉽게 끊긴다. 갈낙탕은 싱싱한 낙지에 갈비탕을 넣어서 끓인 탕으로 깔끔하고 시원하다. (문의 061-473-6993)
·월출산종합음식문화원 - 월출산 천왕사지 매표소 바로 밑에 있다. 다양한 음식이 있으며 특히 된장국과 추어탕이 시원하다. (문의 061-471-9274)

●●●자는 곳
·월출산장호텔 - 도갑사와 5분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도갑사를 둘러보고 월출산을 등산하기에 좋다. 미리 예약하면 아침식사를 할 수 있다. (문의 061-472-0405)
·월출산신라모텔 - 월출산 천왕사지 코스 쪽에 자리하고 있다. (문의 061-473-7595)

●●●문의
·영암군 문화관광과 |061-470-2350
·디스관광정보연구원 |02-3453-5380

<백두대간대종주 ①>
20.남원 주촌리에서 월경산 중재까지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합니다. 전라도 지리산에서 강원도 진부령까지. 중간에 통일이 되면 백두산까지 가야겠지요. 이제 백두대간 7백여 km 산행을 52구간으로 나눠 종주합니다. 그 첫산행을 다녀왔습니다.
글·사진 박상대 기자 동행·솔터산악회 (011-380-3182) 취재협조·M&R (031-976-1644)
우리들의 백두대간

주촌리 → 노치마을 → 수정봉 → 입망봉 → 여원재 → 장봉 → 고남산 → 통안재 → 권포리(권포리에서 복성이재는 중국 출장으로 연기)복성이재 → 봉화산 → 월경산 → 중재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로 작정하니 며칠씩이나 가슴이 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종주했다는 백두대간. 여행잡지를 만들면서 언젠가는 종주할 거라는 다짐과 기대가 의외로 빨리 왔다. 참으로 우연히 솔터산악회(등반대장 우연희)를 만난 것이다.
3월 20일 새벽 4시 45분. 5시에 알람을 맞춰 두었는데 그보다 먼저 잠에서 깨어났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처럼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종로 3가에 도착하니 버스 두 대가 서 있고, 몇몇 사람들이 버스를 오르내리고 있다. 그중 유일하게 얼굴을 아는 우 대장과 인사를 하고 지정석에 앉았다. 동대문과 양재, 신갈에서 회원들을 태운 버스가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창밖으로 봄기운이 느껴진다. 언제나 여행은 신나는 일이다. 산행은 좀더 신나는 일이다. 적당한 운동과 가슴에 서정성을 담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나는 산에 오르면서 남들처럼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거창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갖가지 나무와 그들이 만들어 준 숲과 바위와 풀포기와 수많은 야생화들을 눈에 담는 것이 즐거워 산에 오른다. 그 산에서 흘러간 옛추억을 생각하고, 옛친구들을 떠올리고, 콧노래를 부르는 재미도 쏠쏠하고, 바짓가랑이가 젖을 정도로 많은 땀을 흘린 뒤의 상쾌함도 빠뜨릴 수 없다.
버스가 남원시 주천면 주촌리에 멎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버스에서 내린다. 버스 두 대에서 내린 대원들이 첫걸음을 내딛는 기념촬영을 하고 제각기 노치마을로 향한다.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외딴 시골이다. 이 한적한 시골에서 산을 오르기도 전에 나는 점심 걱정을 했다. 집에서 점심을 준비하지 않고 산 입구에서 김밥을 몇 줄 사갈 참이었다. 그런데 김밥장수는커녕 동네 사람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휴게소에서 달랑 조그만 물만 한 병 샀는데 과일이나 과자부스러기라도 사오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차마 굶기야 하겠어?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나는 거지 근성을 발휘하기로 하고 대원들 사이에 끼어 걷기 시작했다.
노치마을을 가로질러 수정봉을 향해 오르려는데 동네 샘이 보인다. 노치샘이다. 사계절 하루도 마르지 않은 샘이란다. 샘물이 진짜 내 고향 샘물 맛이다. 샘물을 떠 마시면서 보니 바로 앞에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얼른 들어가서 빵을 세 개 샀다. 이제 적어도 배가 고파서 산행을 못하는 일을 없겠지.
그런데 참 무지막지한 사람들이다. 샘물을 마시고 빵을 사서 일행을 쫓아갔는데 벌써 산행을 시작해 버렸다. 여유를 부리며 앞산 뒷산을 휘둘러보고, 이 골짜기 저 능선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산을 취재하고 다닌 나의 산행 습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두대간을 산행하려는 사람들의 보폭은 이미 나의 보폭과 견줄 바가 아니었다. 내가 소달구지를 타고 산천을 유람하는 보폭이라면 대원들은 말을 타고 달리는 격이었다.
저 앞에 오르고 있는 선두를 보자 은근히 걱정이 된다. 지난 가을 이후로 거의 산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지난 한 주일 내내 술을 많이 마셨다는 사실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러나 왕년에 다람쥐 소리를 듣던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여행스케치>에서 취재를 왔고, 완주할 때까지 동행 취재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동네 뒷산에 있는 수백년 된 노송 4그루를 카메라에 담고, 뛰다시피 산을 올랐다. 여기서 수정봉까지는 약 1시간 거리다. 가파른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는데 숨이 가쁘다. 남들이 볼까봐 차마 숨을 가쁘게 쉬지도 못하겠다. 그동안 운동하지 않은 잘못과 술을 많이 마신 죄를 반성하며 이를 악문다.
그런데 악! 오른쪽 다리에 쥐가 난다. 얼마나 운동을 안 했으면 쥐가 날까. 부끄러워 차마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앉아서 다리를 주무른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 뒤를 돌아본다. 들녘이 한가롭다. 들녘엔 봄기운이 아지랑이를 따라 새록새록 솟아오르고 있다. 들녘을 가로질러 성삼재에서 주촌리에 이르는 산등성이들이 우뚝 버티고 서 있다. 가까이 보이는 것이 고리봉이고 멀리 보이는 것이 바래봉, 덕두산, 세걸산 등이란다. 황사 때문인지 시계가 좋지 않아 사진 촬영은 큰 의미가 없겠다.
수정봉에서 오른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동네가 황산벌이다. 신라와 백제가 싸운 계백장군의 황산벌이 아니고,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전라 경상도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한 황산벌이다. 수정봉에서 입망치까지는 내리막길이다. 산행에 내리막길이 없다면 누가 산행을 할까? 쥐가 나던 다리가 좀 풀린다. 혼자 씨익 웃으면서 산을 내려간다.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던 양지꽃과 제비꽃이 눈에 띈다. 야산과 밭이 보인다. 여기서 여원재까지는 남원군 이백면과 운봉면을 좌우에 두고 마을 뒷산 주능선을 따라간다.

여원재는 그리 높지 않다. 4백70여m. 24번 국도가 뚫고 지나간다. 그런데 버스 두 대가 기다리고 있다. 낙오자를 기다리는 버스란다. 버스 안을 기웃거리는데 운전 기사 뿐 등반대원은 한 사람도 없다. 왜 하필 이런 데서 버스가 기다릴까? 인간의 나약한 정신력을 시험하는 하나님의 덫이 아닐까.
여원재에서 점심을 먹는데 먼저 먹던 사람들이 이것저것을 나눠준다. 빵을 먹을 새도 없이 얻어먹은 밥으로 배가 부르다. 과일과 커피에 술까지 얻어먹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곧장 일어나서 또 산을 오른다. 갈 길이 바쁜 모양이다.
산새가 지저귀고 비둘기가 난다. 까마귀 세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있다. 진달래 꽃망울이 구기자 모양으로 살며시 올라오고 있다. 이제 올라갈 산은 8백46m의 고남산. 송신탑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지만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조그만 마을을 지나고 논과 밭을 지난다. 오전에는 배가 고파서 힘들었는데 점심을 먹고 나니 배가 불러서 또 고역이다. 내가 이토록 아마추어였단 말인가. 물병의 물도 이미 바닥이 났고, 숨은 가쁘고… 산행이 이토록 큰 고행길이 될 줄이야.
고남산 정상 가까이에 암릉지대가 나온다. 짧은 로프를 잡고 바위를 오른다. 정상에 오르자 바로 아래 산불감시 초소와 헬기장, 한국통신 중계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이 다 내려다보이는 정상이다. 정상에서 통안제를 거쳐 시멘트 포장길을 20여 분 내려가니 권포리에 이른다. 권포리 마을에 다다르자 두엄냄새가 발길을 가볍게 한다.
젖소들이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고, 밭에서는 할머니 두 분이 감자를 심고 있다. 봄이 되었으니 농부는 씨앗을 심고, 대지는 새로운 기운을 뿜어 올리고 있다.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며
그동안 꽤 많은 산을 다녔습니다.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이름 있는 산들을 여러 곳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백두대간 종주는 처음입니다. 주저함 없이 시작했습니다만 과연 완주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여러 친구들과 가족에게 알리고 마음을 다잡고 종주를 시작합니다. 전라도 지리산에서 강원도 진부령까지 실개천 하나도 건너지 않고 뭍으로만 오르고 또 오른다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계절의 변화를 알리고, 산이 담고 있는 전설을 전하고, 골짜기나 봉우리와 그 능선에 피어 있는 꽃들의 이야기와 새들의 노래,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21.서동왕자와 백제 미륵사지가 있는 익산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한 미륵사지는 백제의 최대 사찰로 30대 무왕에 의해 창건되었고 17세기경에 자연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찰과 목탁소리는 사라지고 미륵산을 타고 내려온 바람만 복원된 동탑 풍경 위에서 잠시 쉬어 간다.
도움말·이신효 (익산시청) 노기완 (미륵사지유물전시관) 글·사진 김상미 (객원기자)
헤세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시인의 나라’라고 표현하며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든 돌아갈 길이라고 말하는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내 고향은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넓은 들판에서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으로 기억되는 익산이다. 누군가가 기다려 줄 것 같아 마음이 설레었다. 익산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이신효 선생님을 만나 안내를 받았다. 휴일임에도 취재에 동행해 주는 넉넉한 마음이 얼굴에서 배어 나오는 듯 했다. 하루 해로는 짧을 것 같아 서둘러 722번 지방도로를 따라 금마쪽으로 5분쯤 갔을까, 미륵사지터와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 차를 세웠다.

신라 선화공주를 얻고 왕이 되다
익산에는 백제 무왕(武王)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있다. 미륵사지, 왕궁평성, 궁터, 절터, 고분등 금마면에 흩어져 있는 유적으로 보아 왕위에 오른 무왕이 익산을 중심으로 정책을 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또 삼국유사에 무왕조에 대한 설화가 그것을 뒷받침 해준다.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용(임금을 말한다)과 관계를 하여 무왕 장(璋)을 낳았다고 한다. 장은 어릴 때부터 재주와 도량이 컸고 마를 캐 생업으로 삼아 서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서동은 효자이며 용기 또한 남달랐나 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가서 마을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어 친해진 다음 아이들을 꾀어 동요를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서동 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 대궐까지 들리니 임금은 용서할 수 없는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낸다. 공주는 귀향길에서 만난 서동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지만 믿고 따랐다. 서동과 관계를 맺은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요가 인연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공주가 서울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준 금으로 생계를 도모하려 하자 서동은 크게 웃으며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평생에 부를 이룰 금이라고 대답하자 서동은 마를 파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쌓아두었다고 말한다.
공주는 진귀한 보배이니 신라의 부모님에게 보내자고 했다. 금을 쌓아놓고 용화사 사자암 지명법사에게 찾아가 신라에 보낼 계책을 물으니 신통한 도술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로 보내준다. 많은 금을 보고 진평왕은 신비하게 여겨 서동을 기억하게 되었고 그 일로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미륵사지 창건설화
무왕이 부인과 함께 용화산 밑의 사자사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데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에서 나타나자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절을 세워주십시오”라고 청하여 지명법사가 도술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리고 못을 메웠다. 그리고 미륵삼존의 상을 모방해 짓고 회전(會殿)과 탑(塔)과 낭무(廊)를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지라 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가람배치에 있어서 세 개의 사찰을 한곳에 배치한 삼원병립식의 배치라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이나 중국에도 유래가 없는 형태로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감탄을 한다. 미륵사지의 창건은 무왕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미륵사지 창건은 왕권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이었으며 자신의 격상을 통해 백제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이상을 심어 줘 정신적인 단결을 꾀하고자 했다.
국보 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은 복원중이라 볼 수가 없었지만 1993년 복원된 동탑 9층 끝에 낮 달이 걸려 있었다. 미륵사지는 정유재란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자연 폐사라는 주장이 있다. 동원 중앙으로 절터를 바라보고 서 있는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허기가 느껴졌지만 서쪽에 있는 유물전시관을 빠뜨릴 수가 없었다. 1997년에 개관하여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노기완 학예연구 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백제의 역사를 다시 배웠다. 백제의 처마와 녹유연목, 석등을 보며 백제 문화는 돌과 둥근 선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륵사지를 나와 722번 지방도를 타고 금마 시내를 지나 1번 국도 전주 방면으로 직진하다가 뻥 뚫린 평야에서 유난히 붉은 황톳빛과 참새떼가 소란스럽게 내려앉는 대숲 마을 앞에서 석장승을 만났다. 동고도리 석불입상(보물 제 46호)을 인석(人石)이라 부르는데 근처에 있는 금마산이 말 모양과 같아 말에게 마부가 있어야 한다고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문득 물활론은 동양의 정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서쪽과 동쪽에서 애틋하게 바라보는 장승은 섣달 그믐날 밤에 옥룡천이 꽁꽁 얼어붙으면 서로 건너와 껴안고 있다가 새벽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설화가 있다.
자리를 옮겨가기 전 들판을 넘어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구릉지 같은 곳에 말통대왕릉이 보였다. 소왕릉 대왕릉이 있는데 백제 무왕과 부인인 선화비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다. 다시 전주 쪽으로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 무왕이 천도하려 했던 왕궁평성 발굴현장에는 백제역사를 다시 쓰느라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왕궁평성 중앙에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99호)이 햇살을 받고 명상에 잠긴 듯 서 있다. 탑의 생김새나 여러 가지 고증자료에 의하면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에 축조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발굴결과 탑의 하부에서 다져 쌓기로 조성된 건물지의 흔적이 발견되어 조성연대를 백제시대보다 다소 늦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 석탑은 지방적인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데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는 백제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지붕 돌은 평평한 모습을 보이고 네 귀에서 가볍게 들리어 있다.

백제의 자취를 찾아보기에 하루해는 너무 짧았다.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해를 보며 미륵산에 올랐다. 그리 높지 않아 30분 정도면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사자암에서 차를 마시며 내려다보는 김제평야, 서해바다와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사통팔달 빠져나가는 길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처럼 역사도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멀리 서해바다가 햇살을 받아 금빛을 뱉어내고 미륵산 자락 남쪽에 안겨 있는 금마는 평화로운 왕궁의 자리로 손색이 없는 지형이었다.

<봄맞이 여행>
22.봄냄새 맡으러 남쪽으로 떠나볼까
진도 둘러보기
서해안고속도로는 목포에서 끝이 났다. 그곳에서 진도로 향하는 이정표를 따라 가다보니 어느덧 진도대교에 이른다. 이순신 장군의‘명량대첩’으로 유명해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斜張橋), 그 진도대교 너머로 노을이 아스라이 지고 있었다.
글·사진 구동관 (객원기자)
구슬픈 가락의 아리랑이 먼저 떠오르는 진도는 작은 섬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 크기로 제주와 거제 다음이다. 섬 크기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적인 유적지도 많아 당일 여행은 어렵다. 넉넉히 돌아보려면 사흘은 족히 걸리는 곳이다.
그런 진도를 해가 지고서야 들어섰으니 마음만 급할 뿐이다. 식사를 해야겠기에 ‘바지락 회’가 유명한 맛집을 찾았더니만 자리가 없어 결국 다른 곳에서 배를 채워야 했다.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딱히 갈 곳도 없고 내일 일정을 위하여 우선 남도석성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남도석성에 도착했지만 여행지로 개발된 곳이 아니어서 마땅한 숙소조차 없었다. 대부분의 집들이 불이 꺼져 있는데, 석성 앞 구멍가게만 불이 조그맣게 들어와 있었다. 문을 빼꼼히 열어보니 일흔은 넘었을 할머니께서 나오셨다. 민박집은 없고 가까운 곳에 공사 현장에 나온 사람들이 묵고 있는 집이 있단다. 나의 고민이 눈에 보였는지 할머니는 가게 옆방에 불을 넣어 줄테니 기름값 만원만 보태서 하루밤 묵어가란다.

아침부터 바삐 움직일 생각에 알람을 맞춰 놓았지만 정작 잠을 깨운 것은 가겟집 할머니의 밭은 기침소리였다. 공기가 맑다. 봄의 흙내음에 갯내음까지. 신선한 샐러드향이 감도는 듯 하다.
남도석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석성안 집들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성벽을 따라 한 바퀴를 돌다보니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고려 고종 18년(1231) 고려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로 수도를 옮겼다. 40년 동안 전쟁을 벌였지만, 원종11년(1270) 몽골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배중손이 이끌던 삼별초군은 몽골에 항복할 수 없다며 전쟁을 계속했다. 그 때 삼별초군이 진도로 내려와 쌓은 성이 용장산성과 남도석성이다. 백제시대부터 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도석성에는 아직도 서른 채 정도의 민가가 남아 있다. 이제는 장독대와 나란히 자리 잡은 위성안테나가 과거와 현재를 함께 보여주고 있지만.
접도로 향했다. 진도에 딸려있는 섬 속의 섬. 섬 속의 섬은 무언가 특별한 느낌이 있다. 접도까지 이제는 다리로 연결되어 승용차로 편하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교통이 불편해 유배지로 쓰이기도 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유배자들의 발걸음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되돌아 나오는 길. 햇살좋은 터에 늘어서 있는 움막이 보였다. 움막 안에서는 할머니들이 굴을 까고 있다. “할머니 하루에 얼마나 벌어요? 대중없어. 하루에 3만원도 하고 5만원도 하지, 까는 만큼 버니까.” 말씀을 하시면서도 손은 계속 굴을 까고 있었다. 할머니의 손길을 보고 있노라니 늘 마흔 나이 아들의 운전을 걱정하시는 어머님이 떠오른다.

다음 목적지는 회동. 바닷길이 갈라지는 해할 현상중에 가장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 대사였던 ‘피에르 랑디’가 진도 여행을 다녀간 뒤 프랑스 신문에 이 현상을 소개하면서부터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바닷길이 열리는 날은 한 달에 2-3번 정도. 일 년이라 해도 30일 남짓이다. 회동리 앞쪽의 섬인 모도까지 길이 2.8km정도, 폭 40m 정도의 길이 생기는데 바닷길이 열리기 시작하는 곳에 뽕할머니 동상이 서있다. 진도사람들은 뽕할머니의 간절한 기원으로 그 길이 열렸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그렇게 열린 바닷길은 ‘영등살’이며, 그 전설을 축제로 즐기고 있다. 올해 26회째인 ‘영등축제’는 5월 5일부터 사흘 동안 열릴 예정이다.회동 바닷가를 뒤로하고 첨찰산에 올랐다. 해발 485m 진도에서는 최고봉이다. 운림산방을 기점으로 왕복 두 시간 남짓의 아름다운 등산길이지만, 바쁜 시간을 핑계로 산악도로를 이용했다. 회동바닷가가 있는 고군면에서 운림산방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인 두목재에서 진도 기상대쪽으로 나있는 산악도로는 승용차로도 무리가 없다. 2km 정도 진행하면 기상대 입구. 그곳에 주차를 시키고 20여분의 등산으로 첨찰산에 올랐다. 산 정상에 서니 진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 ‘안녕’하고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산에서 내려와 운림산방을 찾았다.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이던 허유(1807~1890)가 노년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던 화실이 있다. 허유선생은 추사선생의 서화수업을 받고 남종화의 대가가 되었는데, 헌종의 사랑을 받아 임금의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단다. 산방 앞의 아담한 연못에는 조금 전 올랐던 첨찰산이 들어있다. 산방을 넉넉하게 감싸면서 다정하게 어울려 있는 첨찰산과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을 만 했다.
진도읍에 가서는 진돗개시험연구소를 둘러보았다. 진도에는 진돗개를 자주 볼 수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진돗개만 키울 수 있도록 법률로 정해져 있어 다른 종류의 개를 보기는 힘들지만 그 중 혈통 좋은 녀석들은 이 연구소에 모두 모여 있다. 평일에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진돗개의 훈련 모습도 볼 수 있다.
진도읍을 빠져 나와 벽파와 용장산성을 거쳐 진도대교로 향했다. 벽파는 명량해협의 길목이며 진도대교가 생기기 전까지 육지와 통하는 관문이었다. 대마도를 굽어보며 서 있는 이순신장군의 전첩비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용장산성은 남도석성과 같이 대몽항쟁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인데

조선의 집
23.낙안읍성 민속마을
해질 녘 초가지붕 너머로 술 한잔 자신 아버지의 노랫가락이 흥얼흥얼 들려오고 땅따먹기 놀이를 하던 아이가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누구세요?” 할 것 같은 낙안읍성, 그리운 옛집을 다녀왔다.
글·사진 김연미 기자 취재협조·전라남도 관광진흥과
여섯 살 때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초가집이었다. 낮은 흙담 위로 초가지붕이 붕긋 올라선 집. 마당 한가운데 펌프우물에 유난히도 햇볕이 많이 들었다. 낮은 담 너머로 집안 구석구석 햇살이 비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어느 땐가 오빠가 잡아온 메기, 붕어가 대야에 가득 담겨있던 날, 고양이 한 마리가 초가지붕 위에 앉아 가는 실눈을 뜨고 기회를 엿보았다. 나는 그 대야 곁에서 고양이가 물고기를 채가지 않게 지키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고양이를 쫓아버리면 될 일을 그렇게 고양이와 함께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종일 오빠를 기다렸다.
내 어린 날의 기억은 늘 그 초가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 뒤에 새 집을 지었지만 왠지 햇볕이 들지 않는 답답한 마당만 생각난다. 한 여름 마루에 누워있으면 호두나무에서 울어대던 매미소리가 참 시원했다. 내 생에 어느 순간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면 햇볕 잘 드는 그 초가집으로 가고 싶다.
아마 낙안읍성에 다녀와서 그 생각이 더욱 간절했는지 모른다. 옛집을 생각나게 한다. 초가집이 한 동네, 성안 가득했다. 폴짝폴짝 뛰어서 징검다리를 건너도 될 듯 둥근 초가지붕이 옹기종기 이웃하며 살고 있다.
낙안읍성은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성안이 약 4만1천평, 밖이 2만6천4백72평이나 된다. 1백여 채의 초가집이 돌담과 싸리문에 살포시 가려진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민속가옥이 9동이나 있으며 객사, 동헌, 향교와 신당, 장터 등으로 남아 있다.
읍성은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 지방 관청과 민가 거주지 주위를 둘러싼 성을 말한다. 세종 때는 바다 가까운 지역인 경상, 전라, 충청도에 읍성을 많이 축조했다.
대개 성곽은 산이나 해안에 축조되었는데 반해 낙안읍성은 평야에 만들어진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 후 인조 4년 낙안 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토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에 한계가 있다고 석성으로 개축했다.
낙안읍성은 두 번의 왜란과 일제 식민지 등 6.25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는데 1984년부터 복원을 시작해서 옛 모습에 가까워졌다.
성곽 길이는 1천4백10m, 높이 4∼5m, 폭이 2∼3m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랑이가 자주 들어와 폐쇄했다고 한다. 지금은 남문과 동문만이 복원되어 있다. 활을 쏠 수 있는 총안이 있고, 왜구가 쳐들어오는지 망을 볼 수 있는 망루 역할을 하는 치성(雉城)이 있다.

성을 따라서 걸어보면 성 주위의 초가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정지용 시인의 ‘화문행각’중에 ‘조선 초가집 지붕이 역시 정다운 것이 알아진다. 한데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어 사는 것이 암탉 둥지처럼 다스운 것이 아닌가, 산도 조선 산이 좋다. 논이랑 밭두둑 흙빛이 노리끼하니 첫째 다사로운 맛이 돈다’가 나온다. 성을 걷다보면 이 말이 딱이다는 느낌에 저절로 손뼉이 쳐진다. 커다란 둥근 산밑으로 둥근 지붕이 옹기종기, 초가 지붕이 조선 산을 많이 닮았다.
집으로 이어지는 길도 어느 것 하나 눈에 거슬리는 게 없다. 길은 초가지붕처럼 일직선이 아닌 부드러운 곡선을 가지고 있어 더 없이 따뜻하다. 길의 역할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교통 수단이지만, 길은 또한 사색의 공간이다. 초가집 사이로 난 길을 걷다보면 아무 생각없이 씽씽 달려온 고속도로와 전혀 다른 감흥을 얻는다. 집을 지키고 있는 개 장군이도 생각나고 이웃집 순이도 생각나고 어제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한 직장상사도 생각난다. 초가집 모퉁이를 다섯 번쯤 돌면 “별일 아닌 것을…” 길은 사색이며 화해의 공간이다.

동대문을 들어서면 먼저 객사에 이른다.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건물이라 마을의 가장 중앙 상단에 위치한다. 객사는 왕명으로 또는 고을을 찾아오는 관리들을 영접한 곳이다. 객사 앞에는 임경업군수비각이 있다. 임경업장군이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세운 비각이라고 한다.
낙민루는 조선 헌종 때 세웠다. 여순반란 당시 좌익에 의해 지서가 소실되자 낙민루에서 임시로 경찰 업무를 했는데 6·25 때 공산군에 의해 불에 탄 것을 근래 복원하였다. 요즘 인기 있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쓸쓸하다. 아픈 역사를 가진 나라의 아픈 사건들을 낙민루 옆의 두 그루 느티나무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동헌은 조선 왕조 때 지방관아 건물이다. 감사, 병사, 수사, 수령 등이 행정업무를 처리한 곳이다. 그 옆으로 사또가 기거한 내아가 있다. 낙안읍성에는 중요민속가옥이 9가구가 있다. 문이 닫혀있어서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었지만 그리운 사람냄새가 난다. 벽에는 새끼줄에 엮인 약초가 달려있고, 절구통과 절구대가 예쁘게 세워져 있다. 지금도 사용하는지 속을 들여다봤는데 먼지가 쌓였다. 아마 10년 전까지만 해도 사용됐으리라. 초가가 생태학적으로 훌륭한 집이지만 여인네들이 생활하기에는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내가 태어난 당진은 집 뒤란에 장독대가 있다. 부엌 뒷문을 열고 나가면 장독대였다. 장독대 옆에 함박꽃, 앵두 등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있었다. 뒤란이 정원 역할을 했다. 앞문이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이라면 뒤란은 휴식을 주는 공간이었다.
낙안은 반대로 장독대가 앞마당에 있다. 싸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장독대가 부엌 가까이 마당에 있다. 장독대 주위로 낮은 담을 치고 그 위에 짚을 올려놓았다. 집안에 또 하나 공간을 만든 것이다.
장독대가 뒤란에 있던 풍경에 익숙해서 그런가 마당에 있으니 눈에 좀 설어서 신기했다. ‘장맛으로 그 집의 음식 맛을 안다’고 했던가. 부엌, 장독대는 여인네들의 생활 공간이며 지혜가 숨은 곳이다. 다음에 낙안을 찾을 때는 그런 부분을 엿보고 싶다.
쌍청루는 성곽의 남문이다. 예전에는 성안 사람이 죽으면 상여가 이 문을 통해서 나갔다고 한다. 쌍청루에 서면 낙안읍성 초가지붕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이산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쐬면서 성곽 너머로 푸른 들녘을 바라볼 수 있다.

낙안은 조선의 집이다. 현대를 살고 있지만 옛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긴 겨울이 시작되기 전, 까치를 위해서 감나무에 홍시 하나를 남겨두는 우리네 마음이 바로 조선의 마음이 듯 낙안에는 조선의 집 조선의 마음 그리운 것들이 살아 숨쉰다. 만지면 손에 묻을 것만 같이.
낙안읍성 가는 길
자가용 호남고속도로 쮝 광주 쮝 남해고속도로 쮝 송광사IC 쮝 송광사입구 쮝 순천 쮝 여상고에서 우회전 쮝 818번 국도 쮝 삼천교 쮝 낙안읍성
남해고속도로 쮝 순천IC 쮝 벌교 쮝 857번 국도 쮝 이곡 쮝 낙안읍성
현지교통 순천역 쮝 63번 시내버스 이용 또는 택시 20분 거리. 벌교읍에서 택시 이용 10분

Tips 알아두세요
순천시 관광안내센타 061-744-8111
낙안읍성 민속마을 관광안내 061-749-3347

24.자연이 만든 신비의 극치와 인간이 만든 신기의 절정
진안 마이산
겨울이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다. 몸은 점점 움츠러들고 모처럼 온 가족이 쉬는 휴일을 맞아도 선뜻 신발끈 매기가 쉽지 않다. 가고 싶은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닌데 한결가족답지 않게 뭉그적거리고 있다. 그렇게 방치하다간 몸이 더 처질 것은 뻔한 이치, 일단 나서기로 했다. 여전히 신기하고 신비롭기만 한 마이봉과 탑사가 있는 ‘마이산’을 만나고자 겨울 찬바람을 뚫고 전북 진안으로 향한다.
글·사진 한결가족
사람들은 ‘최고, 최대, 유일’이란 수식어를 붙이기 좋아한다. 마이산 앞에도 ‘세계 유일의 부부봉’이란 꾸밈을 곁들여 놓았다.
그전에도 대여섯 차례 찾은 적이 있지만, 오밀조밀하게 돌탑을 쌓아 놓은 ‘탑사’와 ‘은수사’를 거치는 가벼운 산책으로 마친 까닭에 이번엔 마이산을 빙 돌아 볼 참이다.
광주에서 출발, 88고속도로를 타고 순창, 임실 쪽으로 1시간 30여분을 달리니 저 멀리 우뚝 솟은 두 개의 봉우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이산은 가을이름이긴 하지만 말귀를 닮아 그리 지었다는 말에 한결이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중얼거리며 “브라질 리오에서 본 빵산(팡데아수카르)이 우리나라에도 있네요?”라고 거든다.
더 어렸을 때는 “정말 말귀랑 닮았다!”라더니 말이다.
도립공원이라 주차비와 입장료를 내고 관광안내도를 살피며 산길을 짐작해 본다. 겨울 산길이니, 어림잡아 3시간은 짱짱할 것 같다.
‘금당사-전망대-봉두봉-은수사-탑사’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암마이봉을 빙둘러 내려오는 코스를 선택했다. 여유 있게 둘러보면 다시 주차장까지 4시간 정도 걸릴 거리다.

입구에서 바로 왼쪽으로 돌아 산길로 접어들었다. 대부분의 가족단위 행락객들은 우리가 예전에 찾았던 길로 30분도 안 걸릴 탑사로 향하고 있지만, 산길에도 드문드문 등산객들이 앞서고 있었다.
여느 산길과 비슷한 산죽과 떡갈나무 숲을 가파르게 오르니 바로 능선에 다다른다.
어디에서건 암마이봉이 보여 눈길을 붙잡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능선 길은 그리 힘들지 않다
. 다행히 길이 남쪽 기슭을 따라 이어지고 있어 찬바람도 막아준다.
양지쪽에서는 햇살이 따스하게 옷자락에 내려앉는다.
쉴 것도 없고 별 어려움도 없이 천천히, 새로 짓고 있는 금당사 곁을 지나 한 시간 정도 걸으니 전망대가 서 있는 비룡대가 나타난다. 거대한 바위에 가파르게 만들어진 철제계단을 오르는데 마이산이 세계 최대규모의 천연 콘크리트 덩어리라는 사실이 탑사쪽에서 바라보던 것과 다른 실감으로 다가온다.
비룡대에선 마이산의 전경이 확실히 눈에 안긴다.
벌집모양의 지형, 즉 타포니가 꼭 포탄을 맞은 것처럼 움푹 패인 게 한 눈에 잡힌다. 타포니(taffoni)는 역암에서 자갈 사이를 메우고 있는 물질인 매트릭스(metrix)가 자갈보다 빨리 풍화되는 차별침식으로 역(礫), 즉 자갈이 빠져나가면서 생기는 구멍이다.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던 ‘과학박사’ 한결이도 처음 알게 된 것이라며 눈을 크게 뜬다.
그래도 “포탄자국보다는 달 표면 같다”며 이런 저런 설명을 곁들여 과학지식을 뽐낸다.
멀리 흰눈에 덮인 무주의 덕유산까지 바라보면서 마이산의 겨울 풍경을 한껏 맛보았다. 이제 진짜 마이봉을 앞에 두고 가는 길, 그리 험하지는 않다. 그런데 2시간 가까이 걷자 한결이가 슬슬 투정을 부린다. 혼자 뒤 처지기에 “다시 똥차가 되어 버렸는가 보다”라고 놀려도 별 대꾸가 없다.

그렇게 느리던 걸음이 마주치는 산행객들의 칭찬에 다시 힘을 넣기 시작하는데 선택의 순간이 왔다. 삼거리, 한 쪽은 탑사로 곧장 내려가는 길이고 다른 쪽은 암마이봉을 품고 한 바퀴 돌아가는 길이다. 엄마 아빠는 “이왕 온 길, 언제 다시 오겠느냐”며 일주를 주장하는데, 한결이는 탑사쪽을 고집한다. 앞으로도 1시간 이상 걸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럼 혼자 먼저 탑사에 내려가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에 “한결가족인데 나만 어떻게 빠져요?”라며 마음을 고쳐먹은 한결이 손을 잡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그런데 길이 만만치 않다. 북쪽 능선을 끼고 도는 길이라 길이 얼었고 경사도 심해 조금만 잘못하면 미끄러진다. 조심조심 엉금엉금 길을 내려간다. 온통 바위뿐인 암마이봉을 오른쪽에 안고 빙 돌아간다. 가끔은 반대쪽에서 오는 등산객들을 보내느라 몸을 바위에 붙이기도 한다.

조심스러운 길을 고생하며 30여 분 걸으니, 숫마이봉이 웅장하게 눈앞에 떡 나타난다. 바로 밑에는 예전에 우리 부부가 손잡고 걸었던 은수사 위 쉼터가 나온다. 그곳은 진안 쪽으로 넘어가는 사람, 그 쪽에서 넘어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별 볼 것이 없다는데도 한결이는 자기는 본 적이 없으니 꼭 봐야 한다며 쉼터 가까이에 있는 바위굴을 가잔다.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을 한 잔 먹어볼까 싶어 함께 갔더니 천장 쪽에 비둘기가 살면서 똥을 싸놓아 물을 먹을 수가 없다.
쉼터에서 내려가는 길은 굵은 나무로 튼튼하게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부턴 말 그대로 산책. 먼저 ‘은수사’가 반겼다.
미륵의 모습을 한 숫마이봉의 턱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이 절은 무량광전과 단 몇 채의 부속건물만 있는 단아한 사찰이다. 얼음이 언 약수 한 모금을 시원하게 마시고, 겨울철에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신비한 현상인 역고드름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청실배나무 아래에 많은 물대접들이 놓여져 있었는데 정말로 고드름이 위로 자라고 있었다. 마이산 안에서 겨울에 정화수를 떠놓으면 얼음 기둥이 이렇게 솟아오른다는데, 마이산에 심취한 사람들은 신령의 발로라고 여긴다.

마지막 코스는 이번 발길의 절정인 ‘탑사’다. 암마이봉 아래 좁은 골짜기 안에 80여기의 돌탑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가까이 보면 전부 외줄 탑과 원뿔형인데 3m가 넘는 탑들이 시멘트 한 줌 없이 세월의 비바람을 견디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 어떻게 이 탑들을 만들었을까 생각하는 것은 무리, 그냥 신비롭다는 정도로 묻어두는 게 더 아름답지 않을까 싶다.
간단하게 소개된 안내판에는 1860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난 이갑룡 처사가 스물다섯살 되던 해에 용화세계를 꿈꾸며 이곳에 들어와 사람들의 죄를 빌고 창생을 구할 목적으로 30년을 하루같이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108개의 탑을 쌓았다고 써 있다.
세계적인 지질학자들도 직접 보면 놀란다는 마이산.
‘부부봉, 건곤봉, 천지봉’이란 별명을 갖고 있고, 계절별로 호까지 지니고 있는 산.
겨울을 나고 봄 바위에 붙어 자라는 바위 옷을 보면 돛대처럼 보인다는 ‘돛대봉’, 용머리에 난 뿔처럼 보인다는 ‘용각봉’, 단풍이 검붉게 물든 가을의 ‘마이봉’, 겨울엔 눈이 붙어 있질 못하는 지형적 특색으로 화선지를 치려는 붓모양이라 하여 ‘문필봉’ 등. 자연이 만든 신비의 극치(마이산)와 인간이 만든 신기의 절정(탑사)을 함께 누린 날, 우리가족의 가슴속에도 ‘가족애’라는 새로운 신력이 쌓였다.

와불을 기다리며…
25.화순 운주사
남도땅 화순군 도암면에 자리한 운주사에 다녀왔습니다. 천불천탑지라고도 합니다. 계곡을 따라 부서진 석재와 석불, 석탑들이 무수히 널려있는 곳 천년풍상에 얼굴 지워진 석불들을 마주 대하며 한가로이 거닐었던 하루였습니다.
글·이영호 (대한항공 조종사)사진·김연미 기자
절 초입부터 무슨 야외조각 전시장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신라계와 백제계의 석탑들이 서로 이웃하며 나란히 서 있고, 이전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형식의 탑파들이 즐비합니다.
절벽에 기대어 있는 불상들은 해바라기를 하는 가족인양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원두막 같은 감실 안에 모셔진 석조불의 못 생긴 얼굴도 정겨웠습니다.

仁兄! 와불을 만났습니다
운주사 한편으로 흐르는 시내에 살고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대신해서 안부 전해드립니다.
시냇가의 넓적한 암반 위에는 불신을 잃어버린 부처님의 불두만이 남아, 그 물고기들에게 삼생의 설법을 들려주시는지 오랜 풍상에 깎여온 원만상호에는 희미한 미소가 빗소리처럼 가늘게 그어집니다.

새로 지은 불당의 당당함과 번쩍번쩍 눈부신 황금종의 화려함이 눈두덩이에 돋아나는 잡티처럼 잠시 불편하였습니다만, 산 속이라 해도 오가는 이의 마음은 번잡한 세사를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법이니, 내 마음의 굽은 잣대로 지금 눈앞의 사물을 재어보지는 않으렵니다.
어찌 알겠습니까, 이제 몇 백 년의 세월이 다시 흐른 뒤에 일주문과 황금종도 세월의 이끼가 덮여지면, 그를 보는 후인이 있어 그것들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찬탄하게 될 줄을 말입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의 보편성이 때로는 우리의 어리석음에 기대어 절대가치로 변신합니다.

법당 왼편으로 멀리 빗겨 있는 산길을 오르면 산언덕에 태평스레 누워 하늘에만 마음 두신 와불을 만납니다.
와불이란 실상은 좌불 한 분에 입불이 한 분입니다. 길고 넓은 목에 좁은 듯한 어깨 위로 우견편단의 가사를 드리우고, 가슴으로 모은 양손을 가사 속에 거두시니 그 가려진 수인이 합장인지 지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앉으신 매무새가 길상좌라 그저 좌불이라 칭합니다.
육계가 떨어져 나간 좌불의 왼편어깨에 다소곳이 기대신 또 한 분의 불상은 상호와 목이 길게 표현 된 입불의 형상입니다. 왜소한 어깨에는 좌견 편단을 두르시고 시무외와 여원인의 수인을 맺으셨는데, 조막손처럼 안으로 굽어 접히는 그 손 모양새가 오히려 현대미술의 추상적 미감을 더 앞서나가는 듯이 느껴집니다.
길게 흘러내린 목에서부터 급하게 휘어지는 어깨선을 따라 직선으로 끊어 내린 선의 유려함은 언뜻 모딜리아니의 회화를 연상케도 합니다만, 풍상으로 다듬어진 천년의 미를 어찌 한 점의 서양그림에 비기겠습니까.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에는 조선조 숙종 때 의적 장길산과 그의 무리들이 관군에 쫓겨서 이 곳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세운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민중이 세우는 새로운 세계. 와불의 전설은 ‘장길산’에서 언급한 뒤로 와불 현신은 전설로 떠돌고 있습니다.
와불이 일어서는 날이면 새 세상이 도래하니, 내세의 미륵불이 용화세상을 이룬다는 구름 같은 이야기가 입내림으로 전해진다 합니다.
그로 인해 운주사의 와불이 언제 일어설 것인가를 두고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와불은 결코 일어서지 않습니다.
앞으로 다시 천년의 세월이 흐른다 한들 와불은 누워서 하늘만을 바라볼 것입니다.
세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 말 타면 고삐 잡히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는 말처럼, 그저 누운 자세가 가장 편하기 때문입니다. 저라도 그냥 누워서 있을 겁니다. 둘, 둘러보아도 와불 주위에는 좌대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누워 계시도록 입안이 된 듯한데, 광배도 갖추지 못한 와불이 기댈 자리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일어선다면 스타일 구기는 일입니다. 셋, 누워 있는 것은 와불이 아니라 와불을 세운 이들의 마음입니다.
운주사의 불상, 석탑에서는 전대의 정형화된 형상과는 매우 다른 파격미가 느껴집니다. 기존의 양식에서는 도출되기 어려운 조악함의 미가 천불천탑 형상에 서려있습니다.
일부의 의견처럼 이 이지러진 물상들은 어쩌면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소외된 기층민중의 잠재된 소망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와불은 새 세상에 대한 약속과 이루지 못할 지복신앙의 오래된 기다림이 하나의 형상으로 체현된 것이며, 미륵불의 용화세상은 잡초같은 민생들의 고통을 위무하기 위한 진통제입니다.
지복세상을 코 큰 애들 말로 옮기면 UTOPIA입니다. 라틴어원으로는 OU(NOT)+ TOPOS(PLACE)라고 들었습니다.
어디에도 없는 세상, 땅 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오직 기다림으로만 존재하는 환상입니다. 미륵불은 내일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내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제라는 것은 오늘이 남긴 발자국일 뿐이며 내일이란 또한 오늘의 차명계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와불은 고통스러운 오늘을 견디기 위해 이 땅 위에 남겨진 당근이었습니다만,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라 해도 그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닙니다. 불완전한 현생에 대한 끝없는 인고 속에서 피폐해 가는 우리의 하루를 지탱해주는 한 병의 박카스-디라도 되어줄 수 있다면, 남겨진 약속의 의미는 그것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와불은 일어서지 않습니다.
와불을 일으키는 순간, 이 땅의 민초들에게 남겨진 약속은 사라지며, 굽어진 어깨를 보듬어 굴곡진 삶을 지탱하게 해주던 그네들의 마지막 희망도 깨어집니다. 오르기를 꿈꾸던 산정에 어느 날 이르러보면, 다시금 이어지는 것은 나락 같은 쓸쓸함 뿐입니다. 하여 와불은 다만 기다림으로 그의 의미를 이룰 뿐입니다.
일본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인생의 99%는 기다림이다’라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남겨진 1%는 싸움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삶의 여백을 채우기 위한 끝없는 투쟁, 생존의 그늘 속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지키기 위해 절벽 끝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전사들을 愚弟는 사랑합니다.

주말 하루, 천년의 기다림으로 나를 맞아준 와불에 합장합니다.
지금 나의 어리석은 마음 안에도 이름 짓지 못한 와불이 하나 누워있습니다. 어느 하루, 다시 깨어나 천년의 사자후로 내 오랜 기다림을 채워줄 와불을 기다리며, 愚弟는 아득바득 또 하루를 살아갑니다.
천지경계를 아득히 지워버릴 흰 눈 속에서 길게 누운 와불의 어깨에 나른히 기대어 앉아, 사무엘 베케트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주인공 에스트라공처럼 오래도록 나의 고도를 기다리려 합니다.
돌아갈 길 아직 정하지 못하였는데 해는 이미 산마루에 걸립니다. 어스름 해그늘을 등에 지며 돌아서는 나에게 와불이 바람처럼 속삭입니다.
“지친 자에게 가야할 길은 더욱 멀고, 어리석은 자에게는 삶이 길다.”

<그 섬에 가고싶다>
26.남해 최남단 최고의 등대가 있는
거문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가 있고, 남해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섬 거문도. 한때 침략자 영국군의 깃발이 나부낀 채 해밀턴 항이라 불렸던 거문도. 그리고 백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하얀 섬 백도.
글·박상대 기자사진·정대일 기자취재협조·여수시청
찬바람이 불면 바다로 가자! 참으로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온 말입니다. 찬바람이 불면 저는 바닷가에 갑니다.
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겨울 바다는 사랑을 가르쳐 줍니다. 검푸른 바다에서 밀려오는 하얀 파도, 하얀 물결 무늬는 가슴이 뛰게 합니다.

거문도를 취재하러 가던 날, 이른 아침에 여객선터미널에 나갔더니 파랑주의보가 내렸다네요. 그래서 여객선이 출항하지 않는답니다.
섬을 여행할 때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전날 인터넷 검색으로 날씨가 좋다고 해서 나선 걸음인데 항구에선 파랑주의보 때문에 출항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럴 때 여행객은 많이 당혹스럽습니다. 여행 스케줄을 바꿀 때는 순발력이 필요합니다.
뭉그적거리고 있으면 시간만 흘러가잖아요. 절벽아래 바다가 아름답고 일출이 유명한 향일암과 여수 시내를 둘러보고 가까이 있는 사도라는 섬에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사도가 고향인 선배가 있는데 꼭 다녀오라고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거문도 가는 여객선 ‘오가고호’가 돌산대교 밑을 미끄러져 나갔습니다. 여수항 주변 옹기종기 붙어 있는 건물들이 거대한 조각품처럼 보였습니다. 배가 육지에서 멀어져갈수록 바닷물은 더 짙은 검푸른 색을 띱니다. 크고 작은 섬들이 다가왔다 밀려갑니다. 아침 햇살이 바닷물에 반사되어 눈이 부십니다. 잔잔한 물결에 빛나는 햇빛을 볼 때마다 은빛날개를 한 수많은 나비떼의 군무를 떠올립니다.
파란 하늘, 드넓은 바다, 까마득히 떠 있는 작은 섬들. 여객선 갑판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는 여행객은 사색에 젖습니다. 제법 찬 바닷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가지만 여행객은 더 없는 행복감에 취합니다.
섬들이 간직하고 있을 수많은 전설들을 떠올리고, 바닷길을 항해하고 다녔을 무수히 많은 선원들과 여행객들을 떠올려봅니다.

어느 덧 배가 거문도에 도착했네요. 여수와 제주도 중간 지점에 위치한 다도해의 최남단 섬! 천연적 항만이 호수처럼 형성되어 있어 도내해(島內海)라고 하는 섬, 그래서 태풍이 불면 큰바다의 어선들이 쉬었다가는 섬, 서도·동도·고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섬에 학문이 뛰어난 문장가들이 많은 것을 보고 ‘거문(巨文)’으로 개칭하도록 건의하여 거문도가 되었다는 섬입니다.
거문도에 내리니 갯내음이 확 밀려듭니다. 여수에 사는 여행사 사장님이 다른 항구나 섬과 달리 거문도에는 찝찝한 갯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하네요. 하늘이 맑고 바람이 좀 불어준 덕분인지 정말 상쾌한 바닷바람이 여행객을 반겼습니다.

섬이름에는 ‘거’자가 있지만 항구는 아주 아담하네요. 배에서 내려 여객선 터미널 뒤로 가니 여남은 개 음식점들이 들어선 골목이 있군요. 허름한 식당에 들러 갈치회를 먹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갈치회를 최고 상품으로 친다고 해서요. 갈치회에 소주를 한 잔 보탰더니 입안에 생선 향내가 돌데요. 한참 동안 회맛에 취해 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갈치구이 한 도막을 내놓습니다.
갈치구이는 굵은 소금과 함께 할 때 가장 맛있지요. 굵은 소금을 뿌려 구었다는 갈치구이를 먹는데 혀가 춤을 춥니다.

남해에서 가장 남쪽에 있다는 거문도 등대는 서도의 동남쪽 끄트머리 수월산에 있습니다.
1904년에 설치되었는데 40km까지 불빛이 나가는 동양 최대 규모의 등대라네요. 동도에서 다리를 건너 찾아가는 길에는 동백나무가 1km 넘게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12월 초부터 동백꽃이 피는데 장관이라고 합니다.
등대 앞 정자 관백정(觀白亭)에 앉아 있는데 그냥 그대로 시간이 멈춰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갈매기가 날고, 어선들이 흰 물결을 만들며 지나가고,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고… 문득 사랑하는 사람이 떠올라 전화를 걸었습니다.

관백정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작은 섬들이 보입니다. 백도랍니다.
백도를 가기 위해 거문도 항구에서 다시 백도 유람선을 탔습니다. 30분을 더 가야 한다네요. 30분 쯤 선상에서 섬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여행이랍니다.

백도? 하얀섬인지 백 개로 된 섬인지 궁금했는데, 아름다운 전설을 들려줍니다. 옥황상제가 선녀들을 시켜 백도가 몇 개의 섬인지 알아 오라 했는데, 누구는 백 개라하고 누구는 99개라 한 겁니다. 직접 확인해보니 물이 빠지면 백 개요, 물이 차면 99개더랍니다.
그래서 어느 한쪽 편을 들어줄 수 없어 하얀섬 백도(白島)라고 표현한 거라네요.

백도에 다달아 섬을 한 바퀴 도는데 선상에서 열심히 마이크를 잡고 설명하는 아저씨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가슴이 둥둥 뛰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땅에 이토록 아름다운 섬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모든 섬들의 각기 다른 아름다움에 흠뻑 취했습니다.
선실 매장에서 기어코 맥주를 사서 한 모금 마시는데 또르륵 눈물이 떨어지데요. 아름다움에 취해 눈물을 흘리기는 처음이었습니다.

27.물은 여전한데 다향은 사라졌네
강진 다산초당
다산이 손수 팠다는 물은 여전히 맑다. 그가 차를 끓여 마셨다는 다조도 번듯하게 남아 있다. 울울창창 대나무와 송림은 무성한데 선비의 글 읽는 소리는 간데없다.
글·사진 이민학 기자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대나무와 송림이 어우러져 침침하다. 이런 곳에 거처를 두었나? 만덕산이 움푹 들어간 곳이다. 이렇게 냉랭한 산곡이라면 한여름에도 밤이면 서늘한 기운이 감돌 것만 같았다. 나중에 나오면서 산 밑에서 올려다봐도 저기 어디쯤일 것이라 짐작만 갈 뿐 보이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어둡고 습한 곳에 있다가는 며칠 못가 무릎 시리다고 호소할 듯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렇듯 은밀한 산골이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던 정약용에게 더 안심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다산이라는 호를 지니고 간 것을 보면 이곳에서 보낸 10년의 세월에 남다른 감회가 있었던 듯싶다.

만덕산의 다른 이름이 다산이다. 원래 해남 윤씨 일가의 산속 정자였는데, 윤단이 강진으로 귀양 온 정약용에게 자녀들의 교육을 맡기며 처소로 내어준 것이다. 다산은 초당 좌우로 동암과 서암을 짓고는 동암에 머물며 학문과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서암은 제자인 윤씨 가문의 젊은이들이 머물렀던 거처.
당시는 초당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정면이 5칸이나 되는 기와를 얹은 와당이다. 동암 옆으로 오르면 곧바로 산곡을 벗어나 절벽인데 이 곳에 서면 강진만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육지 깊숙이 밀고 들어온 좁은 바다에 섬들이 떠 있는 모습이 보는 이의 넋을 빼앗는다. 사람들은 다산이 흑산도로 귀양을 간 형 약전을 그리워하며 바라보던 자리라 하며 천일각이란 루를 세웠다.

정약용은 이 곳에서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대학공의 등 무려 2백30여권에 이르는 저서를 집필한다. ‘한적한 해변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니 20년간 속세의 일로 미처 알지 못했던 옛 임금의 대도(大道)를 깨치는 기회가 되었구나’ 하고 내심 반겼다는 이야기가 빈 소리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스물두 살에 과거에 합격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18년간 관직에 머물면서 내내 당쟁에 시달렸다. 집권세력에게는 강직하고 곧은 성품의 약용이 눈에 가시였다. 젊은 시절 한때 서학(천주교) 서적을 읽고 교분을 가졌던 이력 때문에 숱한 모함을 받았다. 사람됨과 재주를 아껴 막아주었던 정조가 승하하자 기댈 곳이 없어졌다.

그를 처단하려는 세력에서 “천 사람을 처단하고도 약용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거나 같다”고 했다니 그 살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셋째형 약종은 순교하고,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약용은 포항 장기를 거쳐 1801년 강진으로 유배된다.
강진 동문 밖 주막과 강진읍 뒤 고성암, 이후 다시 강진의 제자 집에 머물다 1808년 다산초당으로 옮기면서 안정을 찾는다. 이후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경기도 마현(지금의 양수리 부근)으로 돌아갈 때까지 교육과 저술에 전념한다.

다산은 유교의 경서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역사, 지리, 문학, 음악, 철학, 의학, 교육학, 군사학,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5백여 권이 넘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오죽하면 ‘다산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실은 아는 사람도 없다’는 소리가 나왔을까. 그만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족적을 남겼다는 이야기다. 그 해박함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시구나 경전을 외는 여느 책상물림과는 달랐다. 일찍이 28세에 배로 다리를 놓았으며 32세 때는 수원화성 설계와 돌을 나르는 유형거와 끌어올리는 거중기를 고안해 경비를 절감하기도 하였다. 경제면에서도 여러 가지 개혁안을 내놓았는데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경작하되 일한 만큼 가져가는 여전제 등 당시 사회로서는 획기적인 사고방식들을 내놓았다.

다산초당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필체. 혹자는 추사가 직접 쓴 글씨로 오해하는 데 실은 추사의 글씨 가운데 해당되는 글자를 찾아 모각한 것. 다산이 1762년생이고 추사는 1786년생이니 연배로 따지면 한참 아래지만 추사가 이 곳에 와서 잠시 머물다 갔다는 인연을 따져 현판에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보정산방’이라는 글자는 추사가 직접 쓴 글씨인데 그 뜻에서 추사가 다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전해진다.

동암의 ‘다산동암’이라는 현판은 다산의 친필을 역시 집자해서 모각한 것인데 그 중에 산자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곧고 우뚝한 모양이 다산의 성품을 잘 나타내는 듯 하다. 다산은 성품이 곧아 확실한 것을 좋아했는데 이 때문에 풍수지리설 등 뜬구름 잡기식의 이론은 질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맥진법에 대한 불신이나 관상을 보고 운명을 점치는 것을 배격한 것도 이런 이유인데 주역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역사전 등 여러 가지 저술을 남겼다.

다산의 호는 여러 가지인데 자하도인, 문암일인, 철마산초부 등에서는 왠지 도가의 영향이 느껴진다. 다산초당에 와서 먼저 한 일이 연못을 파고 한 가운데다 바닷가에 가서 골라온 돌들을 쌓아 연지석가산이라 이름붙이고 대나무줄기로 이은 물길을 만들어 비류폭포라 칭했다니 풍류도 대단했던 셈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여유당이란 당호를 썼는데 그 뜻이 깊다. 노자의 “여(與)여! 겨울에 냇물을 건너듯이 하고, 유(猶)여! 사방이 두려운 듯하라”는 말에서 비롯된 호인데 여는 의심이 많고 유는 겁이 많은 동물을 뜻한다.
18년의 벼슬길과 다시 18년의 귀양살이를 통해 다산은 자신의 성품이 직선적이고 그릇됨을 보면 앞뒤를 가리지 않아 그로인한 고초가 적지 않았음을 술회하고, 세상일의 이치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어 말년에 비로소 여유당이란 당호를 붙이고 자녀들에게 그 의미를 전한다.

다산초당을 가기 앞서 아래쪽에 있는 ‘정다산유물전시관’을 들르는 게 순서다. 그의 인생역정과 작품, 사상 등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으므로 한차례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다산초당 오르는 길이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Travel guide
광주에서 나주, 영암을 거쳐 강진까지 13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목포 쪽에서 오는 2번 국도와 합류하여 강진읍까지 간다. 강진읍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10분쯤 가다보면 좌측으로 다산초당 안내표지판이 나온다.

28.마을 따라서 떠나는 흑산도 여행
톡 쏘는 홍어를 안주 삼아 탁주 한 사발 들이키고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둠이 바다에 내리고 해안선을 따라 사리, 심리, 곤촌, 비리, 진리, 흑산도 섬 마을에 하나둘 불이 들어온다. 바다로 가는 길, 작은 포구 가로등은 외롭고 집은 따뜻하다.
글·사진 김연미 기자취재협조·파나관광(주) 02-730-5711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
예리에 내리니 햇살보다 먼저 비린내가 달려든다. 새끼 조기와 어린 갈치 마르는 비린내. 예리항은 배를 떠난 늙은 어부 같은 모습으로 스산하면서 어쩐지 불친절 할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80년대까지 다도해지역에서 가장 큰 파시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모텔, 여인숙, 다방 등 섬보다는 육지의 모습을 더 닮았다.
흑산도는 목포에서 92.7km 떨어져 있으며 쾌속선으로 2시간 정도 걸린다. 홍도와는 30분 거리. 사람이 사는 유인도 11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 89개, 1백여 개 섬이 위성처럼 떠 있다.
흑산도는 신라 덕흥왕 2년(828)에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당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서해에 출몰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상리산성(반월성)을 쌓으면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상리산성은 예리항 정면의 바다 건너에 있는 산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다.

해안선 24km 따라 11개 섬마을 여행
흑산도 여행의 묘미는 역시 해안선을 따라서 하는 24km 도로 일주이다. 예리에서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섬 마을을 볼 수 있으며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을 도로에서 조망할 수 있어 좋다. 어떤 지형에 마을이 만들어졌는지 살펴보면 사람들의 지혜에 새삼 혀를 두른다.
여행은 예리항을 출발하여 서쪽 마을부터 시작했다.
흑산도 두 개 해수욕장 중 하나인 진리 배낭기미 해수욕장을 지나면 흑산중학교가 보인다. 흑산중학교는 섬에서 섬으로 유학 온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곳으로 수업중인지 운동장이 조용하다.
진리에는 제주도와 흑산도에만 서식하는 초령목이 자생한다. 3백년이 넘었다는 초령목은 고사하고 주변에 어린 초령목이 3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열두 고개 초입에 3층 석탑과 석등만이 남아 있는 신라 무심사 절터가 있으며 산꼭대기에는 장보고가 세웠다는 반월성이 있다.
꼬불꼬불 열두 고개를 올라 상리산에 오르니 멀리 홍도, 예리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상리산 전망대와 봉화대, 흑산도아가씨비가 있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드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5백원 동전을 넣고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를 흥얼흥얼 따라 불러본다. 그 옛날 뱃사람들을 상대로 술을 팔던 흑산도 아가씨도 파시도 사라졌지만 씹을수록 톡 쏘는 맛이 더하는 홍어회에 탁주 한 사발 마시고 싶다.
상리상 봉화대는 일출 일몰을 다 볼 수 있다.

비리는 전복, 가두리 양식으로 유명하다. 흑산도 서쪽은 바람이 잔잔해서 가두리양식을 많이 하고 동쪽 마을은 바람이 세서 멸치를 잡는다고 한다.
길은 남쪽으로 갈수록 비포장 도로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해안절벽을 달리는 스릴은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진리를 지나면 포구와 가로등이 예쁜 곤촌리가 나온다. 바다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낮추고 있는 마을. 곤촌은 포구에 가로등이 들어오는 저물녘이 가장 아름답다.
암동에서 사리로 가는 길에는 홍도 뒤편으로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는 슬픈 노을을 볼 수 있다. 노을을 보려고 차에서 내렸지만 인연이 아니었던지 구름이 끼어서 일몰을 볼 수 없었다.

사리·천촌리는 유배 역사지
흑산도는 제주, 거제, 진도 다음으로 고려시대 이후부터 중벌을 받은 죄인이 가는 유배지라고 한다. 특히 흑산도는 양반뿐만 아니라 큰 죄를 진 서민들도 귀양살이를 했다고 한다.
‘고려동경’에서는 흑산도에는‘나라에 큰 죄를 지어 사형을 받아야 할 정도’의 죄인이 가는 곳으로, 고려 의종 2년(1148) 정수개가 최초 흑산도 유배자였으며 조선조까지 약 1백30여 명이 유배를 당했다고 한다.
특히 사리는 손암 정약전 선생이 순조 1년 신유사옥 때 유배되었던 곳이다.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의 친형이다. 손암은 벼슬을 버리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흑산도에 유배된다.

손암은 15년 귀양살이 동안에 흑산도 근해에 있는 물고기, 해산물 등 1백55여종을 채집하고 명칭, 형태, 분포상황 등을 기록한 ‘자산어보(현산어보)’를 저술했다. 사리에는 정약전 선생이 자산어보를 저술한 사촌서당이 복원되어 있으며 그 밑에는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올 법한 작은 성당이 있다.
소사리는 골이 아주 깊은 마을로 흑산도 멸치의 주 생산지이다. 멸치젓 곰삭는 냄새가 구수한데 강원도 산골 마을 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천촌리는 미역, 멸치가 많이 나는 곳이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면암 최익현 선생 유적지가 있다. 면암은 1876년에 왜선이 강화도에 들어와 수호통상을 강요하자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가 ‘왜적을 물리치지 않으려면 신의 목을 베라’고 엎드려 상소를 올렸다가 3년여 동안 유배를 당한다. 귀양살이 동안에 진리, 천촌리에 서당을 세우고 마을사람들의 교육에 힘썼다. 면암이 바위에 친필로 쓴 ‘기봉강산 홍무일월’이라는 글귀에서 면암의 나라에 대한 충정을 알 수 있다.
천촌리, 가는게 등 일주도로 가는 길에 만나는 보석 같은 마을들.
8척만 남았다는 홍어잡이 배는 보지 못 했지만 섬 마을 바다에 쏟아지는 빛이

29.추월산과 용추산 계곡이 어우러진 대나무골 호수
담양호
담양은 맑은 것이 많다. 물도 맑고 하늘도 맑고 사람들의 표정도 맑다. 담양읍에서 메타쉐콰이아가 늘어서 있는 도로를 따라 용면으로 자동차를 몰아가면 추월산과 영산강 시원이 있는, 용추산 가마골이 있는 담양호가 넓은 가슴을 열어 보인다.
글·박상대 기자사진·박상대, 나규채 (담양군청)
새로 뚫린 도로와 가로수 사이에 있는 길을 잇달아 달리는데 들녘이 평화롭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길가의 가로수 나뭇잎도 코스모스도 흔들거리지 않는다. 차창을 뚫고 내리 꽂는 햇볕이 따갑다. 누런 들녘에서 콤바인 굴러다니는 모습이 이채롭다. 기자가 어렸을 적에는 콤바인 대신 낫으로 벼베기를 했는데… 그럴 때면 스싹스싹 하는 낫소리가 들리고, 논두렁에선 일꾼들이 모여 앉아 맛있는 새참을 먹었다.
지금 들판에는 일하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벼를 베다가 새참을 먹고 있는 농부가 있으면 기어코 찾아가서 막걸리 한 잔을 얻어먹고 오리라고 군침을 흘리며 서울을 나섰는데… 꿈이 너무 야무졌던 모양이다. 이제는 낫으로 벼를 베지 않고 기계차로 베고 있다. 그동안 시골 풍경에 대해 환상적인 추억만 가지고 있었지, 농촌이 얼마나 많이 달라지고 있는지에 대해선 무관심하게 살아왔음을 반성했다.
담양읍내를 벗어나 순창 쪽으로 10여분 달리다가 담양호로 가는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을 했다. 다시 10여분을 달리자 추월산 정상과 담양호를 만든 거대한 댐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금성산성이 버티고 섰고, 그 초입에 담양리조트라는 온천이 앉아 있다. 담양호와 금성산성과 온천과 추월산을 하나로 엮는 관광벨트인 모양이다.

담양호는 76년 9월에 축조된 인공호수이다. 담양 평야의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다. 용추봉과 추월산 사이에서 흐르는 물이 고여 담양호를 이룬다.
담양호 제방에 이르자 검푸른 호수에 추월산이 거꾸로 박혀 있다. 대낮에 잔물결 하나 없는 잔잔한 호수. 몇 해 전, 파리한 보름달 아래서 저녁 호수를 본 적이 있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다. 호수에는 잔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잔물결은 은빛 지느러미를 가진 은어떼가 댄스 파티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호수 가득 반짝이던 은빛 물결! 데이트하던 ‘그녀’가 입을 다물지 못했던, 청춘 남녀의 혼을 쏙 빼놓았던 그 은빛 물결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초승달도 안 뜨는 날이란다. 호수로 야간 여행을 떠날 때는 달이 있는 날을 골라서 갈 일이다.

남부 지역이라 아직 단풍이 제대로 들지는 않았지만 주변 경관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호숫가로 뚫린 도로를 달리는데 저절로 콧노래가 난다. 꼬불꼬불 풀어 놓은 새끼줄 같은 도로를 15분쯤 달리자 ‘전망좋은 곳’이란 표지판이 있다. 추월산 터널 앞이다. 차를 세우고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현지에서 동행한 진 사장이 느릿한 말투로 말한다.
“10월 하순 즈음에 오셨으면 더 좋은 꼴을 볼 것인디…” 전망 좋은 곳이라는 표지판 앞에 차를 세우고 호수 안으로 시선을 가져간다. 단풍든 산이 호수에 깊게 엎드려 있다.
담양호 상류 가마골에 영산강의 시원(용소)이 있다. 용소 폭포에 햇살이 부서진다. 용소에서 몸을 뒤로 돌리자 머리 위로 구름다리가 놓여 있다.

담양군 용면 용연리 용추산(해발 523m)을 중심으로 사방 4km 주변을 가마골이라고 부르는데, 여러 개의 깊은 계곡과 폭포, 기암괴석이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어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영산강의 시원이며, 6.25 때 남부군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이른바 빨치산으로 불린 남부군이 완전 소탕될 때까지 약 5년이 걸렸다고 하니 전쟁이 가장 늦게 끝난 깊은 산골이다.
담양호는 추월산 국민관광단지와 가마골 청소년야영장, 금성산성 등이 감싸고 있어 담양 제 1의 관광지이다. 또한 산허리를 뚫은 터널을 관통 하는 호반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도 각광받고 있어 주변 모두가 도시민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다.
중간 중간에 아름다운 전망을 갖고 있는 카페와 전원 음식점들이 있어 여행객들이 사계절 찾아드는 곳이다. 호수 초입에서 가마골 가는 중간 지점에 있는 수목원 가든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가을철의 붕어찜과 메기찜, 겨울철 빙어가 여행객을 붙잡는다. 안주가 좋으니 어쩔 수 없다며 핑계로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는데 장거리 운전으로 지친 몸에 생기가 돈다.
점심을 먹고 추월산을 오르는데 숨이 가쁘다. 막걸리 탓인지 과식한 탓이지… 담양호는 검푸른 물과 화려한 단풍과 붕어찜과 막걸리에 취하는 호수이다.

30.빨간 우체통이 바다에 띄우는 편지
홍도
섬은 동백잎으로 여름처럼 푸릅니다. 그러나 북풍에 몰려오는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모자를 눌러 쓴 손이 시립니다. 찬바람을 맞으며 빨간 우체통 앞 의자에 앉아 홍도, 이름처럼 붉은 섬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흑산도를 돌아 이 편지가 당신 손에 닿을 때 다시마, 멸치 마르는 소리 전할 수 있겠지요.
글·사진 김연미 기자취재협조· 파나관광(주) 02-730-5711
홍도로 향하는 뱃길은 멀미가 심했습니다. 목포항에서 서남쪽으로 1백15km 떨어진 홍도는 6.87㎢의 작은 섬이지요. 쾌속선을 타고 2시간 30여분. 한번 마음먹었을 때 가야지 미루면 내내 가기 힘든 먼 섬입니다.
어제 내렸던 폭풍주의보가 해제되었다지만 파도가 얼마나 높은지 배가 붕 날았다 가라앉았다 정신이 아찔하더군요.
처음으로 멀미를 했습니다. 여기 저기서 겁먹은 소리가 들리대요. “돈주고 죽으러 왔소잉!” 바다가 드셉니다.
홍도선착장에 도착하니, 마음이 저절로 급해지대요. 예전 같으면 사람들이 다 내린 후 조용히 내렸을 텐데, 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서둘러 내렸습니다.
바다, 머리가 맑아지도록 차갑습니다. 선착장 뒤로 모텔, 여관이 있는 홍도 1구 마을이 동백나무, 후박나무 등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홍도는 유명한 풍란이 자생하고 희귀식물이 540여종, 동물·곤충이 231종이나 서식하고 있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입니다. 물건을 실을 수 있게 개조한 홍도 교통수단인 오토바이가 마중을 나왔습니다. 카메라 가방, 삼각대, 옷 가방, 여행을 나선 사람치고 짐이 좀 많지요. 빨리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섬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겨울 해가 짧군요.
첫째 날 여름이야 사람들로 북적대지 겨울은 좀 썰렁합니다. 타지에서 와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도 겨울철에는 목포로 돌아간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홍도에 빈집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홍도는 5백 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분교에는 학생이 3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섬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광경이 흔치 않은데 홍도에서는 골목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나 아이들은 참 예쁘지요. 가파르게 서 있는 집들 사이로 좁은 골목이 인상적이더군요. 저는 사람이 다니는 길에 애착이 많습니다. 특히 집과 집을 잇는 좁은 골목을 좋아합니다. 남보다 빨리 등을 보이고 살다가도, 사람의 정을 움직이게 하는 길을 만나면, 작별을 나눈 사람의 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고 싶습니다.

홍도 골목이 그렇더군요. 골목 사이로 걷다가 어느 집 마당에 널려있는 미역줄기를 잘라 씹어 봅니다. 미역만큼 짭짤한 바다 냄새를 품고 있는 해초가 또 있을까요?
집마다 옥상에 노랗고 파란 물탱크가 있더군요. 섬 생활의 지혜지요.
분교로 가는 길에 빨간 우체통을 만났습니다. 우체통 너머로 파란 바다, 엽서에 나오는 그림 같지요. 그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편지를 쓰고 싶더군요. 홍도에 가실 때는 꼭 엽서를 준비하세요. 오랜만에 편지를 쓰는 것도 괜찮지요.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분교 뒤 깃대봉 쪽 산책로를 올랐습니다. 5백m 정도는 길이 가파르고 나무가 없어서 바람이 세더군요. 넘어지지 않게 발에 힘을 주고 서서 나무에 걸리지 않는 바다를 멀리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깃대봉 가는 길에 동백나무 터널이 나옵니다. 어둠이 동백나무 터널에 먼저 내려 돌아섰습니다. 산길은 혼자 하는 여행자에게 좀 두렵죠. 당신이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여행의 동반자가 그립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동백나무 숲에 살포시 안겨있는 무덤 근처에서 저녁노을을 보았습니다. 홍도는 화장을 하지 않는답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지만 섬사람들은 무덤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간혹 산에 오르다 작은 무덤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지요.
바다가 노을에 젖고 무덤 주위로 스산한 바람이 붑니다. 산길을 내려오는데 저절로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홍도 1구 마을에 불이 하나둘 켜집니다. 아직 천막을 거두지 않은 선착장 포장마차에 백열등이 켜지고, 집이 그리워지는 시간입니다. 마을의 불빛은 따뜻하지만 여행하는 사람에겐 여간 쓸쓸한게 아닙니다.
홍도해수욕장의 파도가 거세게 놉니다. 여름철 홍도해수욕장 부두는 많은 관광객이 내렸다가 또 떠났던 곳입니다. 겨울에는 바람이 홍도해수욕장 쪽으로 강하게 불기 때문에 선착장을 홍도 1구 마을 앞으로 옮겼습니다. 섬을 사이에 두고 바람의 세기가 달라지다니, 진짜 섬에 와 있군요.

돌아오는 길에 서해횟집 청년이 오토바이를 태워주었습니다. 뒤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으니, 비탈진 골목을 달려서 숙소까지 씽 하고 오더군요. 어찌나 신나던지 서바이벌게임이 따로 없더군요.
취재를 많이 다녔지만 혼자서 섬은 처음입니다. 선착장에 나가서 1만원어치 해산물을 샀습니다. 해삼, 참소라, 전복 등. 소주 한 병도 샀지요. 비닐봉지에 담아 달랑달랑 들고 숙소에 들어왔습니다.
홍도는 물이 깨끗해서 해산물이 싱싱 그 자체입니다. 우럭, 농어, 전복, 해삼, 멸치, 다시마, 돌미역 등 바다 맛이 제대로 나지요. 우럭은 육질이 어찌나 쫄깃쫄깃 한지 혼자서 거뜬히 한 접시를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역시 혼자 기울이는 소주는 맛이 없군요. 유람선이 낮의 소란함을 털어내고 검은 바다에 누워있습니다. 내일은 유람선을 타 볼까합니다.

다음 날 노적산 뒤로 하늘이 붉게 물듭니다. 저는 일몰의 빛과 일출의 빛을 구분하지 못 합니다. 그저 해가 뜨고 지고 난 후, 밝고, 어둡다는 사실에서 일몰과 일출을 구분할 뿐입니다. 일출 사진을 한 장 찍고, 유람선을 탑니다. 홍도의 진짜 비경은 유람선에서 보는 홍도 33경입니다. 유람선은 10년 째 해상 관광을 안내하고 있다는 홍도 토박이 김달남 씨의 걸쭉한 농담을 타고 미끄러지듯 바다로 갑니다. “여러분 배타니까 좋지라, 여자도 남자도 배는 다 좋아하지라이” 한바탕 웃음이 터집니다. 뒤늦게 저도 따라 웃습니다.
홍도는 섬 전체가 홍갈색을 띤 바위섬으로 다양한 모양의 바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홍도라고 한답니다.
도승바위, 남문바위, 탕건바위, 기둥바위, 돛대바위, 시루떡 바위, ET바위, 부부탑, 독립문바위 등. 다양한 모양의 바위가 35개나 있습니다. 기둥바위, 돛대바위는 옛날부터 그 이름이었고 남문바위는 원래 구멍바위라고 했으나 거시기 하다고 남문바위로 고쳐 부른답니다. 특히 서재필 박사가 지은 이름이 많다고 하는데 서재필 박사도 관광을 왔었나보지요. ET바위는 중학생이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데 아마 ET영화가 나왔을 때 붙인 이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백원을 주고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처음 극장에 갔었지요.
“부부탑은 사모관대를 쓴 신랑과 족두리를 쓴 신부가 나란히 서 있는 데 신부의 배가 불룩하지라이. 옛날에도 속도 위반이라는 게 있었나보지라이.”

홍도 33경은 입담 좋은 아저씨를 통해서 생명을 얻고, 이야기가 생깁니다. 절벽 사이로 뿌리를 내린 소나무는 키를 낮추고 늠름한 가지를 옆으로 뻗어냅니다.
겨울 바다는 물빛이 진해서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간혹 무지막지하게 큰 해파리가 수면 가까이에서 헤엄을 칩니다.
아침에 잡은 싱싱한 생선을 싣고 온 어선이 유람선 옆에 나란히 붙어서 회를 팝니다. 갓 바다를 떠난 싱싱한 우럭 한 접시를 선상에서 맛을 보며 물처럼 맑은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낯선 여행객 사이에 앉아서 참견하면 한 점 줄까나?
유람선에서 내리면 저는 흑산도로 출항하는 여객선에 몸을 싣겠지요.
선착장에는 말린 미역, 다시마 꾸러미가 쌓여있습니다. 말린 미역냄새가 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제 생일이군요. 어머니께 미역 한 꾸러미를 사다드려야겠습니다.

31.‘순천만 포구’ 나들이
불빛들이 빛나기 시작한다. 저 불빛은 화포의 불빛이고, 저 불빛은 거차의 불빛이며, 저 불빛은 와온 마을의 불빛이다. 하늘의 별과 순천만 갯마을들의 불빛들을 차례로 바라보며 나는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하는 싱거운 생각에도 잠겨본다. 당신 같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나의 선택은 마을의 불빛들이다. <곽재구의 포구기행> 중
글·사진 한결가족
가을 한낮에 들어선 ‘화포’포구는 온통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수런수런, 두런두런, 와아와’ 저렇게 빛나는 물빛을 보노라면 수십만의 사람들이 모여 맑고 고운 표정으로 일제히 손을 흔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일요일 오후 느긋하게 가족 모두가 손을 잡고 함께 걸었던 게 언제였을까. 오후 출근 덕에 항상 쫓기듯 일요일 오전을 후딱 해치웠던 우리가족이 모처럼 하루 종일 한가롭게 바닷가를 거닐게 되었다. 그것도 ‘포구기행’으로 친근한 곽재구 시인과 말이다.
순천대에서 만나 화포로 함께 온 시인은 ‘시간과 길과 인연’을 이야기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한결이는 <아기 참새 찌꾸>를 쓴 아저씨를 직접 만난다는 설렘으로 더욱 즐거운가 보다. ‘찌꾸’는 한결이와 나이가 같다. 1992년 2월 1판 1쇄. 한결이도 그 2월에 생명을 얻어 엄마 뱃속에서 찌꾸를 읽었다. 집에서 가지고 간 책을 보여드리니, “이야, 출판된 해에 읽었네!”라고 너무 반가워한다. 아가에게 책을 읽어 준 엄마가, 태어나 또 함께 읽자고 책 앞쪽에 메모를 해두었는데 그 옆에 사인도 해준다. ‘늘 지혜롭고 튼튼하게 자라 이 세상을 뒤덮는 큰 나무 되렴’

물론 한결이는 <아기 참새 찌꾸>를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을 뿐 아니라 <초원의 찌꾸>,
<아기 참새 찌꾸 2>도 읽었다. “근데 찌꾸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었어요?” 참새 이름이 참 마음에 든다던 한결이가 시인에게 궁금했던 걸 풀어놓는다. “아, 그거. 내 이름이 ‘재구’잖냐? 참새는 ‘짹짹’ 운다고 하고. 참새소리와 내 이름을 합친 거야” “으음, 그랬구나. 너무 멋져요” 답을 들은 결의 얼굴이 기쁨으로 차오른다. 옆에 다가오더니 귀엣말로 <낙타풀의 사랑>을 사 달라 한다. 이쁜 녀석.

수더분하게 생긴 시인은 먼저 바다와의 인연으로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갔다. 화포와의 인연은 어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체험에서 비롯됐다 한다. 수 년 전 완전한 도시인이었던 그 때, 더 이상 길이 없는 이 곳에 들러 아낙네들이 맛조개를 잡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더란다. 비 오는 날, 갯벌 흙을 뒤집어쓰고 맛을 잡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방인에게 그네들이 처음부터 좋은 감정을 갖긴 어려웠을 터. “뭘 그렇게 보느냐”는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몇 시간이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더니 결국은 맘을 열더라는 것. 이후 이 마을은 마음이 뭔가를 그리워하면, 그저 달려가 안길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었더란다. 그러면서 이 곳을 기점으로 한 ‘거차’와 ‘와온’, ‘달천’ 등 순천만 포구마을들은 차츰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닷가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재첩처럼 생긴 조개를 가득 잡아오는 아주머니의 바구니를 함께 들며 물어보니 ‘썩서구’라고 부른다는데 두 번을 들어도 발음을 잘 잡을 수 없다.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이나 거부감이 전혀 없어 너무 편하다. “이젠 웬만한 도시사람들보다 수입이 낫기 때문에 생기는 여유”라고 시인은 분석한다.
다음으로 시인이 안내한 곳은 순천만에서 가장 유명한 ‘대대포구’ 갈대밭이었다. 갈대가 그 특유의 자태와 은빛으로 부서지려면 시간이 더 흘러야만 할 것 같은데, 갈대밭 곳곳에는 탐방객들로 가득 찼다. 포구를 휘감고 있는 방조제에도 행렬이 이어진다.
이 곳은 처음 온 게 아닌지라 다른 이들처럼 경탄까지 나오진 않았는데, 시인과 함께 방조제를 걸으면서 느낌이 달라지고 절로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얼마 전 느리게 걸으며 명상하는 걸로 유명한 틱낫한 스님이 송광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단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주차장에서부터 경내까지 걸어가는데, 그렇게 느릴 수가 없더란다. 한 사람이 스님께 여쭈었다. “이렇게 천천히 걸으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지금 이 순간, 발끝에 닿는 모든 것을 느끼지요”

첫 만남에 오늘은 많이 걸을 거라 이야기하더니, 바로 이렇게 걷는 것이 틱낫한 스님의 모습에서 힌트를 얻은 걷기라는 말도 더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수만 평의 갈대밭도 장관이지만, 지금 우리가 걸으면서 갈대를 함께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하고 의미 있는 발걸음이 되는 순간이었다.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것보다 의미 있고 값지지만, 또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만물이 다시 들어오고 느낌이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갈대에 대한 온갖 표현이나 찬사는 이 순간만큼은 별 의미가 없다.
여유로운 발걸음은 더욱 한가함을 이끌었다. 시인이 단골이라는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장척마을의 찻집에서 시간을 늘리게 됐다. 언덕배기에 말 그대로 하얀 집을 지어 놓고 손님을 맞고 있는 이곳은 주인이 정성스레 가꾼 너른 뜰의 온갖 화초가 또한 일품이었다. 한가롭게 잔디밭에 앉아 꽃을 감상하면서 아이들과 노닥노닥, 하하호호 웃다 보니 해가 어느새 바다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어스름으로 사위가 여위어가고 가로등이 하나 둘 불을 밝힐 무렵, 시인과 우리는 그가 가장 아낀다는 ‘와온’ 마을을 찾았다. 와온(臥溫), 말 그대로 따뜻하게 누울 수 있는 이곳에서 시인은 “꿈이 있어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며 그 배경을 이야기했다. 시인에 따르면 땅끝마을은 그냥 땅 끝이라는 호기심 때문에 가기도 하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찾는 곳이라는 것이다.
포구도 마찬가지. 더 이상 갈 곳 없는 바닷가 끝에 서서 생을 정리하는 사람들이 있단다. 실제로 IMF 때 한 실직자가 삶의 의지를 잃고 세상을 떠돌다 이 와온 마을까지 스며들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뭔지 모를 따뜻함을 느끼고 다시 생의 의지를 되찾았단다. 그리하여 막노동을 하면서 마을 외딴 산기슭에 땅을 사고, 하루 벌이로 벽돌 몇 장씩 사 나르며 지금도 집을 짓고 있단다. 시인이 가리킨 그 집은 외로이 떨어져 있긴 했지만 이야길 들어선지 새나오는 불빛만은 너무도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이 곳에 꿈을 하나 심어 놓았단다. “글만 쓰는 사람 같은 이들은 어쩌면 사회적응능력이 없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위해 이 곳 와온 마을에 방 몇 칸 있는 문예학교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그들이 글만 써도 좋고 그렇게 지내다 사회적응력을 키우면 더 좋겠지요.” 시인이 ‘포구기행’을 시작하게 된 것도 바로 이 곳, 와온 마을의 힘이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시인과 함께 할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여느 포구와 다를 것 없는 마을들이 시인의 눈과 마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순천에 사는 사람들도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잘 몰라요” 그렇다. 발길 닿았던 곳도 그냥 지나치면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와온에서 바라 본 순천만 여러 포구들의 불빛은 그대로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건 아름답다거나 곱다거나 하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별들도 안온함을 더한다. “이 포구에 가로등이 18개 있거든요. 제가 지인들에게 하나씩 분양했어요. 저기 불도 안 들어 오고 허리가 조금 꺾인 가로등이 제 거예요.”라고 말하는 시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듯하다.

그렇게 ‘시간과 길과 인연’의 이야길 차곡차곡 쌓다보니 어느새 포구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내음’을 실어 나르는 불빛들만이 점점 또렷해지고 그 가운데 그래도 삶은 살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연신 파도가 밀려오는 방파제엔 나트륨 가로등이 노란빛을 따스하게 내린다. 그 편안함과 따스함을 가득 안고 와온 포구를 뒤로 우리가족의 가슴속엔 ‘인연’으로 덧댄 ‘시간’의 흐름 앞에 ‘꿈’이라는 길이 길게 뻗어 있다.

32.추억이 잡아당겨 되돌아 본 섬
선유도
선유도 여행은 초행길이 아니다. 십수 년 전 군에 간 교생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친구와 함께 겨울바다를 가던 일이 생각난다. 눈발이 날리던 바다 한가운데 서서 교생선생님의 눈 속에 담긴 바다를 보았다. 아득한 시간을 돌아서 다시 선유도에 간다. 세월을 건너온 섬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글·사진 김상미 (객원기자)
오후 2시 40분 선유도행 마지막 배를 타기 위해 초등학교 운동회때 달리던 실력으로 뛰어서 붙잡아 탓다. 갑판 위로 올라가니 이미 만원이었다. 토요일이 여가 시간으로 주어진 탓인지 친구들과 낚시 가방을 메고 떠나는 사람들, 부부동반 여행객이 대부분이었다.
여행객들의 어수선한 잡담이 갑판 위를 장악하고 있는 틈 사이에 초등학생인 듯 싶은 아이 둘을 데리고 운동복 차림으로 여행을 떠나는 가족이 인상적이었다.

“어디에서 왔어요?”
“청주에서 왔는데요. 아빠가 쉬는 토요일이라 학교 수업은 뒤로 미루고 갯벌체험학습 여행을 떠나는 중입니다.”
교육의 첨단을 걷는 부부였다.
된장국을 끓여 놓고 기다리는 어머니 같은 장자도
햇살이 바다 위에서 물수제비를 뜨는 한낮, 나도 갑판 위에 널려진 채 1시간 50분쯤 바다를 건너 왔을까? 선생님 대신 선유도 선착장에 세워진 관광안내지도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예전에는 리어카가 운송수단이었는데 지금은 자동차로 주인이 바뀐 듯 싶다. 민박집 자동차가 호객행위를 하는 사이를 비집고 선유2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바닷물이 만조를 이루어 도로까지 혀를 낼름거리고 있다.

선유팔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햇살을 붙잡았다. 6시 40분쯤 장자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유낙조를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전거를 빌렸다. 선유도와 장자도, 무녀도가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자동차는 통행금지 상태다. 걸어서 가기에는 지루하고 자전거 하이킹하기에 딱 이다. 나는 자전거 무면허라 2인승 자전거를 빌려 동행한 미소(다움 까페 바닷가 우체국장.청주대학생)가 운전을 하고 뒷좌석에서 선유팔경을 찾았다.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능선 길을 달리고 있을 때 맨 처음 은빛바다와 조화를 이룬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눈에 들어 왔다. 소란스럽던 여름바다를 잃어버린 채 덩그마니 놓여 있는 모습이 외로워 보였다. 누군가가 백사장에 흘리고 간 ‘나 잡아봐라’ 소리가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조금 지나 장자교 근처에서 장자어화(장자도의 고깃배)를 만났다. 바다로 내려앉은 노을 위에 배들이 줄을 맞추고 서있는 풍경은 된장국을 끓여 놓고 기다리는 어머니 같았다. 빨간색을 칠한 장자교를 건너가자 노을이 부벼대는 언덕이 있었다. 그 곳에서 선유낙조가 빨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둠이 급하게 길을 지워버리는 바람에 남겨진 선유팔경은 내일 찾기로 하고 파도소리를 베고 누워 잠을 청했다.

붉은 바다 수선스럽더니 해 떠오른다
다음날 새벽 어제 해가 빠진 곳에서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데 내가 자리 잡은 곳이 촬영 포인트인지 사진동호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6시 20분이 지나자 주변을 어수선하게 붉은 색으로 칠하더니 해가 산 위로 올라섰다.
내가 보기에 가장 먼저 햇빛이 가 닿는 곳은 장자봉 남쪽에 있는 장자할매바위였다. 남편이 장원급제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 할매바위는, 지금도 흰 띠로 아기를 업고 남편 향한 마음을 뭍으로 보내고 있다.

이제 이 곳은 사랑을 약속하는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장자할매바위를 보면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세요. 사랑은 잘 이루어지지만 만약 외도하면 돌이 된다는 새로운 전설이 전해진다고 하네요’ 사랑도 약속하고 바닷가 쪽으로 난 몽돌밭길을 걸으며 파도소리를 들으면 연인의 마음을 확실하게 붙잡는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비가 오는 날에 볼 수 있는 망주폭포
다시 자전거 바퀴를 돌려 무녀도 쪽으로 길을 냈다. 갯벌에는 사람들이 갈매기처럼 앉아 있고 해수욕장 옆으로 무뚝뚝하게 서 있는 망주봉이 보였다. 비가 오면 선유팔경의 하나인 망주폭포를 볼 수 있다.
망주봉은 유배되어 온 충신이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한양 땅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하였던 곳이라는 유래가 있다. 곧 바로 망주봉에서 내려다보면 기러기가 앉은 듯한 모래밭이 있는데 이곳이 평사낙안이다.
다시 선착장을 지나 깎아지른 듯한 언덕을 오르자 선유교가 바다를 건네주었다. 오른쪽 바다에서 무인도이자 바닷새의 천국이기도 한 3개의 섬 삼도귀범을 찾았다. 그밖에 신시도 월영산 달빛아래 날리는 단풍을 월영단풍, 끝으로 투구 쓴 병사 같은 모습의 섬 봉우리를 무산십이봉이라고 한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무녀도 갯벌에는 사람들이 모여 조개를 채취하고 있었다. 종패는 뿌리지 않고 자연산 바지락, 굴을 봄·가을에만 수확한다. 주로 멸치잡이가 생업이었는데 지금은 해태양식을 많이 한다고 했다. 무녀교 밑에서는 수집된 조개의 무게를 다느라 분주한 모습들이다.

마지막으로 모감주나무 군락지를 둘러보고 무녀교를 넘는데 신시도를 떠나오던 배가 뱃고동을 길게 울렸다. 섬을 떠나기 위해 길게 늘어서 행렬 뒤로 산 그림자가 배웅을 하고 있었다.

선유도 가는 길
자가용 이용시
서해안고속도로 쮝 군산IC 쮝 706번 지방도 쮝 27 국도(성산) 쮝 이마트 쮝 군산여객선터미널
대중교통 이용시
강남고속터미널에서 호남선 군산행 버스(3시간 30분소요. 배차 30분간격). 군산버스터미널에서 군산여객선 터미널까지 택시요금 2천원 정도.
배편
군산 쮝 선유도
군산여객터미널에서 하루 두번 운행(1시간 40분 정도 소요.) 물때가 달라 운항시간표가 월별로 다르다. 꼭 군산항 여객터미널 063-446-7171, 버스시간 및 여객선 문의 063-445-8085 확인해야 한다.

[Tips]
싱싱한 해삼물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집.
평사낙안식당 063-465-2620

33.가을에 거닐어야 더 맛나는
순천 선암사
산책하는 것처럼 넘어가는 유명한 산길이 몇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선암사와 송광사를 넘나드는 길이다. 나는 이 길은 가을에 넘어가야 그 맛을 깊이 음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길이 있고, 순천시 승주읍과 송광면에 걸친 조계산(해발 884.3m)이 품고 있는 태고종의 남방거찰 선암사.
글·사진 한결가족
한결 가족은요…
<길과 글을 사랑하는 한결가족(han6872.hihome.com)>은 이경수(41), 문희숙(38), 이한결(11) 셋이 ‘한결’을 가훈으로 삼고 나라안팎 여행과 책읽기, 글쓰기를 중심으로 ‘따로 또 같이’ 꾸리며 무등산 자락에서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함께 길을 가는 가족간의 사랑과 믿음이 한결가족의 힘입니다.
선암사를 찾아가는 길은 늘 설레고 흡족하다. 우린 지인들에게 오월 연두색이 산하를 깨울 때와 11월 중순 넘어 선암사를 찾으면 더 좋다고 자주 권한다. 그리고 우리 가족 역시 아무리 바빠도 꼭 11월엔 선암사를 찾는다. 결이는 해마다 11월이면 선암사에 다녀와 시를 쓰고 있다.

다른 해보다 일주일쯤 이른 것 같아 조마조마하며 찾은 선암사, 노오란 은행잎이 기와 지붕의 골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얀 꽃을 어여쁘게 피우고 그윽한 향을 내뿜고 있는 차나무 위로 새색시처럼 곱게 단장한 단풍이 절정에 이르러 숨가빠하고 있었다. 일주일 정도의 차이로 선암사 주변은 해마다 다른 모습으로 우릴 반기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선암사를 이 계절에 찾는 가장 큰 이유는 거기에 고고하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가을의 햇살을 통과시킬 정도로 투명한 은행잎을 지닌 은행나무와, 이제 막 이가 나기 시작한 아기의 잇속같은 고운 꽃을 부끄러이 올리는 차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언제부턴가 그 짜임새 있고 옷깃을 절로 여미게 하는 경내는 대충 돌아보거나 들르지 않고 바로 건물들의 가장 뒤편에 있는 숲으로 향하곤 했다.

거긴 절의 담장 뒤로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호위하고 있고, 나무 위쪽으로 차밭이 있고, 차밭의 위쪽으로는 단풍이 애절한 숲이 있다. 11월에 위쪽의 빨간 단풍나무 숲에서 바라보면 비처럼 내린 은행잎이 기와지붕을 노랗게 옷 입힌 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앞쪽으로 선암사를 품은 산들이 고요한 웃음을 보내오는 게 넉넉하게 보인다. 차밭엔 향이 그윽하기만 하고, 우리들이 서있는 빨간 숲은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게 활활 타오른다.
차밭을 나와 절의 오른쪽에 등산로를 조금 걸으니 조계산에만 가을요정이 사나 싶다. 도대체가 돌아 내려오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른쪽엔 절의 담장을 끼고 왼쪽에는 물소리 청아한 계곡을 안아 내려오는 길에도 수많은 낙엽들이 말을 걸어온다.
물론 단풍나무 숲 뒤로 난 길을 따라 걷는 것도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작년엔 그 오솔길에 취해 긴 시간을 낙엽따라 노닐었다. 어린 결이도 감탄할 정도였으니.
선암사를 승용차로 가자면 광주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승주IC로 들어가 857번 지방도로를 10여분 타는 방법과 화순을 지나 사평쪽(남면)으로 15번 도로를 타고 가다 곡천교 지나 삼거리에서 오른쪽 27번 도로로 외서를 지나, 낙안읍성 들어가는 58번 도로로 가다가 낙안에서 857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다.

급한 일정으로 다니러 온 사람이나 여행은 목적지만 가면 된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린 꼭 후자 국도를 이용하기를 권하곤 한다. 그 길엔 사평휴양림, 백민미술관, 대원사-티벳불교박물관, 조상현 판소리연구소, 유마사, 서재필 기념관, 고인돌 공원, 낙안읍성, 금전산 등이 있어 여행 일정 짜기에 따라선 보너스까지 주어지는 흐뭇한 나들이가 된다. 물론 가는 길의 들녘과 주암호의 반짝이는 물, 물 위의 많은 다리들을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낙안읍성의 찻집이나 주암호 주변의 수많은 찻집에서 차 한 잔으로 여유를 부려보기도 할 일이다. 오늘 나들이 길엔 활짝 피어 고개를 넘어버린 억새가 햇살을 받아 손짓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또 선암사는 들어가는 길의 곱고 넉넉함이 좋다. 무릇 산사는 이렇게 걸어 들어가야 한다. 무언가를 만나러 가는 설렘도 좋고, 낙엽이 그득 쌓이면 바스락거림을 품을 수 있어 좋고, 길에서도 물의 밑바닥이 다 들여다보이는 수정 같은 계곡을 끼고 있는 덕에 투명하리만큼 찬란한 단풍들이 제 각각의 몸짓을 드러냄도 좋다. 혼자 걸어도 좋고, 연인이나 가족과 손을 잡고 거닐어도 맛나는 길이다. 이렇게 걷는 길은 선암사를 상징하는 승선교(보물 제404호)에서 절정에 이른다.

승선교는 반달모양의 무지개 다리로 물 속에 또 하나의 다리를 만들어 둥근 달이 된다는 극찬을 받는 다리다. 장대석을 연결하고 있지만 좌우에는 돌을 박아 기슭까지 막아놓았으나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내고 있다. 승선교를 사이에 두고 갈라진 두 길 중 들어갈 땐 왼쪽 길을 택하면 물위 반달과 물속 반달의 원 사이로 위쪽의 강선누각이 들어와 그야말로 선경을 만들어 낸다. 다리 위엔 늘 사진 찍는 이들로 붐비고 아이들은 보물찾기하듯 다리 밑 중앙의 용머리 찾는 즐거움으로 웃는다.

승선교를 지나면 절 앞 삼인당 연못이 나오는데, 불교의 제행무상인(諸行無常人), 제법무아인(諸法無我人),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삼법인을 뜻하는 것으로 길쭉한 알 모양을 하고 있고, 도선대사의 비보설에 의해 축조된 것이라 한다. 연못을 지나면 선암사 경내로 들어가는 일주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는 글처음에 이야기한 계곡과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에 있다. br>
선암사는 절기록에 의하면 백제 성왕7년(529년) 아도화상이 비로암이라는 이름으로 개산했다 하나 증빙이 없고 신라 말 도선국사(827-898)가 지금 이름으로 중창할 때의 흔적인 삼인당, 강황전, 직인통 등의 당우가 몇 군데 남아 있다. 전통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가람의 배치가 절묘한 것을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 불교문화 연구에 있어서 송광사와 쌍벽을 이룬다 한다.

<고려불교의 여러 사상이 선과 교의 승풍으로 융합되어 많은 선승을 배출한 태고종의 본산으로 이름나 있다. 고려 문종의 왕자로 태어나 맏형이 순종이요, 중형이 선종이었지만 일찍이 출가하여 송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 말 5교 9산을 교선합일로 이끌어 낸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천태종을 개창하였고, 선암사가 천태종의 남방중심 사찰로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지금 선암사 경내에는 40여 동의 건물과 석탑, 석등 등 보물 7점, 지방문화재 9점, 문화재 자료 2점이 남아 있다. <태백산맥>을 쓴 작가 조정래와 인연,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 <임꺽정>의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예불시간을 맞춘 덕에 선암사에선 처음으로 법고, 운판, 목어, 범종 소리를 가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 어두워가는 사위와 너무도 어울리는 그 소리는 찾아오는 이에겐 서슴없이 다 열어 보여주겠다고 약속하는 듯….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나오는 길은 달빛 없이도 넉넉하기만 했다.

34.천년 세월의 이끼가 피어 있는 산
담양 금성산성
하늘이 높으면 산도 높다. 죽세공품으로 유명한 전남 담양에 천년 전 사람들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쌓아 놓은 산성이 있다. 금성산성이다. 이 산성에 승우네 가족이 다녀왔다.
글·국근섭 (담양예술인협회 회원)사진·박상대기자
가을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있었다.
배낭에 과일과 녹차 우린 물만 챙겨서 집을 나섰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가로수 메타세콰이아 가로수 터널을 지나면 쌓인 스트레스가 날려간다. 이곳은 가끔 영화나 드라마 촬영장소로 쓰이곤 한다.
금성면 소재지를 지나 담양온천 바로 못 미쳐 금성산성 안내도를 따라 산길을 오르다가 산중턱 주차장에 차를 두고 산성에 오른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은 수업중이라 함께 못 가고 초등학교 3학년 아들 승우와 아내가 길동무가 되어 산길을 올랐다. 산을 오르는데 떡갈나무, 상수리나무에 단풍이 드는 것도 볼 수 있고, 마중 나온 다람쥐가 앞장서기도 한다. 소나무 오솔길을 지나면서 큰 호흡으로 솔 향기를 맡으니 머리까지 개운해진다. 이 곳을 지날 때면 늘 부르는 소리(사철가)가 있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삭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은 황국 단풍도 어떠한고… 어허~ 세상 벗님네들 이내 한 말 들어보소~ 인간이 모두가 팔십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살 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이 흙이로구나~”
소리가 메아리 쳐 되돌아온다.
“그래, 꿈같은 인생 한번 잘 살아보자. 사랑도 하고, 사람들 귀한지 알며, 하고자 하는 일들 열심히 하며 살아보자!”
뒤에 오던 아내가 얼씨구! 추임새를 넣어 다리 힘을 돋궈주니 어느새 금성산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외성 보국문 앞에는 너른 바위가 있는데 겨울이면 눈이 많이 와서 성터 앞을 자주 쓸어 주었다고 한다. 그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그래서 그 바위이름이 빗자루바위라는 전설이다.

성안 보국문에 올라 뒤를 돌아보니 탁 트인 시야가 시원하다.
호남평야가 시작된 넓은 들녘과, 멀리에 구름모자를 쓴 무등산도 보이고, 삼인산·병풍산이 둘려져 있으며 전라도 명산인 추월산이 손에 잡힐 듯 웅장하게 버티고 있다. 그뿐인가? 자주 내린 비로 만수가 된 담양호는 산 그림자를 담고서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 ‘아~~ 좋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난다. 우리나라 산천어디인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으랴만 특히 이곳은 산·들판·호수가 어울러져 더욱 아름답다.
그곳에서 바로 보이는 내성 충용문(남문)에 가면 시루봉, 연대봉, 철마봉을 따라 7천4백여m에 달하는 성이 동서남북 성문으로 이어져 있다. 특히 서문은 웅장하기도 한데 오랜 세월을 버텨서 기개가 느껴진다. 성에서는 주변을 관망할 수 있지만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성안은 전혀 볼 수도 없고, 성이 있는 곳이 암벽과 벼랑으로 되어 있어 천연의 요새이다.
이 성을 쌓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어 굶주리고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고 때론 돌에 치여 다치며 정성을 쏟아 땀과 피로 만든 성이리라. 때문에 성에 있는 돌 하나마다 옛님들의 숨결이 느껴져 숙연해진다. 삼국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금성산성은 임진왜란·정유재란·병자호란·동학혁명·6.25 전쟁까지 수많은 전란 속에 민초들이 함께 했던 곳이라 그들의 피맺힌 함성이 들려온다.
성을 돌면서 아들에게 우리네 역사와 인생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 해주었다.
성안은 분지로 되어 있어 예전에는 마을을 이루어 살았으나 동학혁명 때 없어지고 이제는 그 터와 보국사 터가 남아 있으며 한 처사가 집을 하나 지어 살고 있다.

가을이 그곳에도 있었다.
청명한 하늘에 수많은 잠자리가 날고 작은 개울물은 맑은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구철초가 가을을 반기며 무리지어 피어 있다. 아들과 아내는 가을 속에 파묻혀 발걸음이 더디다.
금성산성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에 가을 석양을 배낭에 담아 가져왔다.
금성산성은 가족끼리 가보기에 참 좋은 곳이다.

그리 힘들지 않은 코스이며, 역사적인 곳이라 아이들에게 산 교육이 되며, 주위 경관 또한 산과 호수가 어울려져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다. 금성산성은 담양읍에서 차로 30여분 거리고, 주차장에서 다시 걸어 보국문(외남문)까지 30분 소요되며 거기서 쉬었다 내려올 수 있고, 좀 시간적 여유 있는 분은 성을 한바퀴 돌면 4시간 정도 걸린다. 금성산성 중턱에 연동사라는 절이 있는데 전국 유일의 노천법당에는 고려 때 지장보살 석불과 삼층석탑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개장된 수질 좋은 담양온천이 있어 등산후 피로를 말끔히 풀 수 있으며, 대나무 파크공원인 대나무 야영장과 아름다운 담양호와 영산강 시원인 가막골, 천연기념물 관방제림과 메타세콰이아 가로수가 가까이 있다. 그리고 담양은 가사문학 산실인 수많은 정자와 우리나라 민간정원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소쇄원, 명옥헌이 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한국대나무박물관과 죽세공품 상설 판매장도 있어 가족 여행을 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35.티라노사우루스 발자국을 따라가면 1억년 전 공룡시대 문이 활짝!!!
공룡이 살던 섬, 사도
사도는 가족이 여행하기에 딱 좋은 섬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룡 발자국이 무더기로 있어 찾아내는 재미가 솔솔. 물결 모양의 절벽이나 시루떡 모양의 기암괴석 사이로 당장이라도 공룡이 튀어나올 듯해 한층 더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글·사진 김연미 기자
사도는 여수항에서 서남쪽으로 뱃길 27km에 자리하고 있으나 섬으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그렇듯 몇 섬을 걸쳐서 1시간 30여분이 소요된다. 아낙들이 해산물을 팔고 섬으로 귀향하는지 배 안이 소란스럽다. 뻥튀기를 안주삼아서 1.5ℓ짜리 막소주가 돈다. 장마철이라 구름이 낮다.

섬 아낙들의 갯바람 나는 트로트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배 안은 트로트 메들리가 불려지고 춤바람이 인다. 출렁거리는 가락에 맞춰서 텁텁한 노랫가락에 뽑아져 나온다. 사람들의 박수가 한 소리를 내고 한 아낙의 독무대가 된다. 어디서 저런 푹푹 삶아진 노랫소리가 터지는 지. 갯바람인가. 내려야할 섬들이 가깝다.
하화도는 영화 ‘꽃섬’의 촬영지란다. 섬들이 아담하고 낮다. 밭두렁의 경계가 섬을 푸근하게 한다. 아래꽃섬과 윗꽃섬, 섬이 예쁘다. 그래서 꽃섬인가. 배는 사도를 향해 내달린다.

사도의 ‘모세의 바닷길’과 ‘공룡발자국’
사도는 ‘모세의 바닷길’로 잘 알려진 곳이다. 선착장 근처 소나무 다섯 그루가 있는 섬이 나끝, 그 옆으로 돌만 있는 바위섬을 연목, 마을이 있는 사도, 중도, 시루섬(증도), 장사도, 추도가 있다. 평소에도 물이 빠지면 추도만 빼놓고 모든 섬을 걸어서 갈 수 있다. 추도와 사도가 이어지는 길이 드러나는 시기는 1월의 그믐, 2월의 영등, 3월, 4월, 5월은 보름에 한번 있다. 이 때는 섬 전체가 ‘ㄷ’자의 형태가 된다고 한다. 사도와 추도 거리는 780m로 걸어다니면서 게, 조개, 해삼 등을 잡을 수 있다.
사도가 다시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공룡발자국이다. 약 7천∼8천만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 때 살았던 공룡발자국 화석이 약 800여 점이 발견되었고 30여 개는 공룡의 보행렬로 함께 발견됐다. 공룡의 발 길이는 20∼45cm로 다양한 크기고 평균 보폭은 95cm정도란다.

섬을 돌면서 공룡이나 찾아볼까
선착장에 내리면 마을 입구에 커다란 티라노사우루스 2마리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고 그 뒤에 배모양의 건물이 마을을 가리고 있다. 섬다운 맛이 입구의 조형물로 인해 깎이는 듯 했지만 막상 마을을 쏘다닐 때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마을은 22가구에 35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 고령의 노인들이다. 담쟁이넝쿨에 둘러싸인 돌담이 골목을 만든다. 돌담을 돌 때마다 옥수수 수염이 햇빛에 타고 고추 약 오르는 냄새가 좋다.
날씨가 좋은 날은 낭도와 멀리 여수의 화양면이 다 보이는데 안개가 끼어서 보이지 않는다. 아침 바다가 안개로 인해 저녁빛깔이다.
마을 뒤쪽으로는 산책 코스가 있다. 곳곳에 정자와 의자가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 할 수 있다. 단지 모기가 많아서 긴 바지를 입는 게 좋다. 산책 코스를 내려오면 천년층이 있는데 공룡발자국이 발견된 것이다. 바위가 미끄럽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공룡발자국 앞에 안내문이 붙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3개의 발자국 밖에 찾지 못 했다. 사실 절벽의 기암괴석이 안개에 쌓여서 공룡이 튀어나올 것 같아 겁을 먹어서 제대로 찾지도 못 했다. 천년층을 옆으로 중도로 가는 다리가 있다. 그 옆으로 새 다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중도와 증도 사이에는 중도 해수욕장이 있다. 목걸이 만들기에 좋은 고둥이 파도에 예쁘게 다듬어져 있어서 꿰면서 놀기에 좋다. 중도에서 증도로 가는 길에는 커다란 돌이 놓여져 징검다리를 건너 듯 건너야 한다. 장사도 가는 길의 돌들은 미끄러워 특히 조심해야 한다. 증도에는 거북바위와 얼굴바위가 있다. 이 곳은 용궁 가는 길이 있다고 하는데, 바위에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으니 있을 법도 하다.

땅이네 엄마의 깃둥치기
선착장에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흰 끈이 바다로 이어져있다. 끈을 끌어당길 때마다 통발이 올려진다. 통발 놓는 것을 사도는 ‘깃둥 치러 간다’고 한다. 통발 안에는 문어 (저녁에 삶아서 초고추장을 찍어 먹었다), 뱀장어, 새우, 장 담그기에 딱 좋은 크기의 게, 볼락, 불가사리 등이 잡힌다. 사도는 양식을 하지 않아서 물이 깨끗하고 갯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물이 빠져나간 섬 주위로 할머니들이 바구니를 들고 고둥을 잡는다. 섬 주위 어디서나 고둥을 잡을 수 있다. 돌바닥에 붙은 고둥을 떼어 담는다. 군부와 삿갓처럼 생긴 배말이는 바위에 찰싹 붙어 있어 손으로 떼기가 어렵다. 이 때 칼을 가지고 밑 부분에 집어넣으면 군부가 바위에서 떨어지면서 도르르 말린다. 운이 좋으면 게를 잡을 수 있다. 바위 밑에서 두 다리를 뻘떡 드는데 칼로 누르면 집게 다리가 칼을 잡는다. 그 때 장갑을 낀 손으로 다리 등 뒤를 잡으면 된다. 살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독하게 물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안개가 많이 끼어서 정기여객선이 오지 않았다. 마을 이장님 배를 탔다. 1시간 30분이나 걸리던 뱃길이 화양면 공정리 포구로 나오니 1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사도는 안개에 쌓여서 보이지 않았다. 마을 입구 티라노사우루스가 살아나 성큼성큼 안개 속을 헤집고 달려올 것 같은 날이다.

Traveler’s Guide
<잠자는 곳>

땅이네 민박 061-665-9203 (민박 2만원, 1끼 식사 5천원), 이장님 061-665-6580, 혁이네집 061-666-9005, 김장수 061-666-9199, 이장섭 061-665-9213

<가는 길>
여수역 앞에서 여수항여객터미널 가는 버스 20분 정도 소요.
여수항 쮝사도는 매일 6시 30분, 오후 3시에 정기여객선운행 (7월 17일부터 방학기간 동안 10시 30분, 1시 30분 2회 증편). 1시간 30분 소요. 요금 7천5백원
(문의 한려수도 061-644-6255, 644-6256)

<알아두세요>
사도 가는 여객선을 놓쳤거나. 낚시가 하고 싶다고요. 그럼 이장님 (061-665-6580)께 전화 한번 하세요.
·사도는 민박은 있지만 워낙 고령의 노인들이 많기 때문에 땅이네 민박을 제외하고는 식사는 좀 어렵기 때문에 식사 준비해 가세요.

<tips>

극동 다도해 유람선 8월에는 12일, 13일, 14일에 사도 관광유람선이 있다. 가는 길이 2시간30분 정도 소요되며 사도에서 2시간 정도 체류할 수 있다. 요금은 15,300원. 선착장은 돌산대교 아래. (문의 061-644-2000)

3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