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방동네’ 의 큰별 허병섭 목사
빈민의 영원한 친구 ‘꼬방동네’ 의 큰별 허병섭 목사 별세
-‘똘배의 집’ 탁아소 운영, 건설 노동자들의 권익 증진에 바쳐
'꼬방동네 사람들'에 빈민 운동가로 등장하는 공병두 목사의 실제모델이었던 허병섭 목사가 27일 오후 4시30분 폐혈증으로 3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별세했다. (향년 72세)
허병섭 목사 별세는 빈민의 영원한 친구로 늘상 사회적 약자 곁에서 ‘빈민운동’의 최선봉에 서있었던 그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는
점에서 정치권과 노동계, 시민단체의 애도의 물결이 넘쳐나고 있다.
허 목사는 1941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74년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 활동을 계기로 빈민운동에
뛰어들었다.
빈민운동에 헌신해 온 허 목사는 가난과 절망에 빠져있던 도시빈민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가르치려 애쓰며 그들의 벗으로
형제로 부모로 살았다.
무자비한 철거에는 몸으로 맞서 싸웠고 1970년대 빈민선교단체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활동을 하면서 동대문구 신설동
‘꼬방동네’에서 빈민 사역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1976년에는 하월곡동 달동네에 '동월교회'라는 민중교회를 설립, 6년 뒤(1982) 국내 최초의 교회 안 탁아소 '똘배의 집'을 만들었다.
똘배의 집은 탁아소 입법화의 단초가 됐다.
또한 1990년 마지막 기득권이라 여기던 목사직을 버리고 '빈민과 함께 하겠다'는 뜻을 실천하기 위해 막노동판 미장이로 변신,
노동자 공동체 '건축일꾼 두레'를 설립하여 노동자들의 사회적 기업 운동의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이후 1996년 무주로 귀농 생태, 생명을 전개하는 가운데 대안학교 ‘푸른꿈 고등학교’와 ‘배움터’(녹색대학 2005년)를 설립 생태운동과
후진양성에 힘써왔다.
평생 가난한 사람들의 벗으로 민주화운동, 생명, 교육 운동을 온 몸으로 실천해 온 허 목사는 자신의 전 재산 ‘무주의 땅과 집’을
자연 생태 보존을 위해 자연 환경국민 신탁에 기탁했다.
'노가바' 사건 당시 변호를 맡았던 한승헌 변호사는 지난 2009년 뇌손상으로 의식불명에 빠진 허병섭 목사에 대해 "사서 고생하는
성직자의 길을 줄곧 걸어왔다"고 증언했다.
20년 전 ‘해직 교사 후원회’에서 글을 쓰기 위해 허 목사를 인터뷰로 만났던 이미숙씨는 “이불을 다리 위에 덮고 앉아 조근 조근 말씀하시
던 모습이 선하다”며 “너무 낮은 모습으로 가난하게 사시는 모습에 놀랬고 너무나 선하고 맑은 모습에 감동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지금도 눈에 선한데 떠나셔서 눈물이 난다”고 애도했다.
또한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아는 생전의 허 목사님을 알리고 싶고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http://cafe.daum.net/echocouple)
에 글을 올렸다.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지며 유족으로는 부인 이정진 씨와 두 딸, 아들이 있으며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발인은
29일 오전 10시, 장지는 모란공원묘지이다.
<포토영상 제공 : 다음카페 http://cafe.daum.net/echocou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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