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삶 이야기

옥천 육영수님, 정지용님 생가 방문

너른숲 2012. 1. 9. 11:31

언제 : 2012년 1월 7일 토요일

구경간곳 : 옥천 육영수 여사님 그리고 정지용님 생가 방문

 

느끼 : 새벽 계족산 일출 맞이후 집에서 잠시 쉼을 하고 아내는 아줌씨들과 맛난 음식 먹으러 간단다.

         그럼 남은 우리 가족은 뭘 하나 애들과 옥천시장 초량순대집가서 국밥 먹기로 하고 장인 모시고

         옥천시장 가서 맛난 순대와 국밥에 쇠주 한잔 하고 여태 가보기 못한 육영수 여사님 생가를 방문한다.

 

         역시 애들은 관심조차 없다. 역사의 흐름은 그때 그때 정권에 따라 많이 변화 하는듯.

         옛 부귀영화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육영수 여사의 생가를 옛 고증을 통해 최근에 복원 했단다.

         생각보다는 육영수 여사가 옛 갑부집 막내 따님 인듯. 그런데 내가 이곳을 찾았을때 광주에서 버스2대가 도착되었다.

         그리고 중년을 넘긴 그분들 한결같이 최고의 국모 였다며 8.15식장에서 문세광의 저격으로 돌아가신것을 아쉬워 하신다.

 

         육영수 생가 초입에 위치한 정지용 시인 생가는 전에 한번 다녀간 곳이다.

         월북 시인으로 생가가 여기 입니다. 문패조차 내 걸수 없었던 그 곳도 나름대로 복원이 되었지만

         육영수여사 생가 와는 확연히 다르다. 역사는 돌고 도는 듯. "향수"란 노래가 대 히트를 하고

         정지용 시인의 노랫말이란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 생가도 복원된 듯.

 

  옥천 주변길 1박2일을 통해서 자전거 여행 코스로 소개 되기도 함.

 

 

 육영수 여사 생가.

 

 육영수 여사를 보내고 그리움에 젖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을 담은 구구절절 애틋한 사연.

 첫번째 수식어가 가난을 극복한 대통령 그리고 독재자 하지만 아내를 잃은 마음은 세상 모든 남편들의 마음과 똑 같은듯.

 

 

 

 

 

 

 육영수 여사의 방은 생각보다 적어 보였다. 요즈음 기준 1평 남짓.

 

 

 

 

 

 

 

 

 

 육여사와 탁구 시합하는 대통령.

  

아명은 지용(池龍).

한의사인 아버지 태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홍사용·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

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도쿄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 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정지용 시인(鄭芝溶, 음력 1902년 5월 15일/양력 1902년 6월 20일 ~ 1950년 9월 25일?)

 

 

 초가집에 작으마한 집 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