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경기광주/7학자의 은둔지,칠사산
★ 김문기 글
경기도 광주시에는 ‘칠사산’이라 부르는 산이 있습니다. 일곱 명의 한림학자들이 숨어살던 곳이라는데, ‘숭고한 절개’를 상징하는 산으로써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때는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들어선 후의 일입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오래도록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자기로서는, 썩어빠진 고려 왕조를 무너뜨렸고 앞으로 정치를 바르게 펴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구제한다면 천하가 자기를 따르리라 생각했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웬일인지 사람들은 어리석고 부패한 옛 고려 임금을 그리워 할뿐 자기를 따르는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특히 고려 왕조의 신하로 있던 사람들은 궁궐에 들어오기는커녕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행방을 감추기 일쑤였습니다.
그 중에 한림학자로 있던 일곱 사람이 제일 문제였습니다. 홀연히 사라졌는가 싶더니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어느 산 속에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림학자들은 산 정상에 올라가 멀리 북쪽 개경을 그려보며 고려의 멸망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고려의 임금을 그리며 눈물 속에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태조 이성계는 그 산으로 신하들을 보냈습니다. 하루 빨리 궁궐로 들어와 함께 정사를 논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림학자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절대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성계는 할 수없이 다시 형조판서를 보냈습니다.
“상감께서 부르시오. 어서 개경으로 가십시다.”
“이 누추한 곳까지 사람을 보내시다니……. 황공하신 말씀이오나 따를 수 없다고 전해주시오.”
“어허, 여러분들에게 큰 벼슬을 내리신다 하오니 받아들이셔야 후환이 없을 듯 합니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한림학자들은 너무나 완고했습니다.
“그것은 대체 무슨 까닭이오? 혹시 벼슬이 부족할까봐 그러시오?”
“아니오. 나라를 잃은 우리들인데 들어갈 수 있는 벼슬자리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러니 대감이나 어서 가서 오래오래 벼슬을 누리시기 바라오.”
“어허, 그러지 마시고 상감께서 간곡히 여러분을 청하실 때 못이기는 척 궁궐로 들어가십시다. 혹시나 여러분이 끝끝내 고집을 부리시면 그 화가 크게 미칠 것이오.”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차라리 대감의 손으로 우리들을 이 자리에서 죽이시오. 그리되면 대감은 돌아가서 후히 상을 받으실 것이니까.”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오! 나는 다만 상감의 명을 받고 왔을 따름이오. 상감께서 여러분을 죽이라고 명을 내리시진 않았지만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라오.”
“옛날부터 여자들은 지아비를 잃으면 죽을 때까지 정조를 지키는 것이거늘 하물며 신하된 자로서 나라와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한 몸이라오. 대체 우리가 어찌 두 임금을 섬긴단 말이오.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한 짓이라오.”
결국 형조판서는 고려의 신하들을 설득시키지 못한 채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불쾌하고 괘씸한 생각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은근히 비꼬면서 고고한 체 하는 그들이 너무 싫었습니다.
‘당장 죽여 버리고 싶네. 하지만…….’
형조판서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개경으로 돌아가 방원(나중에 태종임금이 됨)을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 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일등 공신이었고 그만큼 세도가 당당했습니다.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그래, 어찌 되었는가? 궁궐로 들어온다고 하더냐?”
“아닙니다. 일곱 명의 한림학자들은 자기들이 숨어있는 곳을 자칭 칠학사(七學士)의 산이라 불렀고 각처에 사람을 보내어 역적모의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뭐라고? 역적모의?”
형조판서는 방원에게 계속 모함을 했습니다.
“그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후환이 두렵습니다.”
“내 예측이 맞아. 그렇다면 그냥 놔 둘 수 없는 일이로다.”
형조판서의 모함으로 인해 방원은 크게 화를 내며 곧 군사를 풀었습니다.
다음 날, 형조판서는 궁궐 어전회의에 나아가 방원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이성계에게 말했습니다. 아울러 이미 군사를 풀었다는 말까지 전했습니다.
그러자 이성계는 깜짝 놀라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무슨 짓이냐! 어서 군사를 거두어라! 한림학자들이 안 들어오겠다면 그만 둘 일이지 누가 잡아들이라고 했느냐?”
“하오나…….”
“듣거라! 그렇지 않아도 고려의 신하들을 많이 죽였다는 이유로 민심이 날로 시끄러운데 그 한림학자들까지 왜 죽인단 말이냐?”
“황공하옵니다. 상감마마, 하오나 그들은 역적모의를 하는 줄로 아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야? 그들은 모두 늙은이들뿐이고 글만 안다 뿐이지 아무 힘도 없질 않느냐!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역적모의를 한단 말인가? 당치도 않은 소리로다!”
이렇게 이성계는 형조판서의 모함을 애당초 묵살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야심가인 방원으로서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성계의 명령 때문에 곧바로 군사들을 돌아오게 하였으나 마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놈들! 기회가 생기는 대로 네 놈들을 잡아 죽이마!’
방원은 벼르고 별렀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을 수시로 광주 땅 ‘칠학사의 산’으로 보내 한림학자들의 행동거지를 감시케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한림학자들은 무언가 불길한 자들이 수시로 산에 나타난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한밤중에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나중에 드러난 일이지만, 광주 땅을 벗어난 그들은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향했고 그 동쪽에 있는 광덕산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광덕산 골짜기 ‘두문동’으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자신들의 몸에 불을 질러 자결함으로써 고려에 대한 숭고한 절개를 지켰다고 합니다.
세월은 흘러, 조선 왕조 숙종 때의 일입니다. ‘우암 송시열’이라는 학자는 광주 땅 칠사산에 찾아가 한림학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글을 지어 그들의 영혼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숭고한 절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찬사를 받게 되는 모양입니다.